내게는 무엇도 의미란 없다. 

 신이나 인류라는 이 탁월한 사례들을 보면 이기주의자야말로. 

 최고에 존재라는 건 분명하지 않는가. 이를 교훈 삼아서, 

 나는 이제 신과 인류라는 이기주의자들을 숭배하지도 않고서도 

 내 자신은 이기주의자로 되려한다.

 신과 인류는 다른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다. 

 나도 이들처럼 내 자신만 생각하려 한다. 

 따라서 완전하게 내게 아닌 건 모두 꺼져라. 

 내 자신보다도 더 내게 의미 있는 건 없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에 소유>(1845) 재인용.



고드윈이나 슈티르너도 현대에 아나키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체계적이지도 않고 상당히 모호한 개인주의는 아나키스트에 사고방식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요소이므로, 극단적 개인주의, 즉 '자유로운' 개인은 아무런 제약도 받지도 않고.

타인과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에 목적만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비판적으로도 검토할 가치는 있다. 


첫째로. 그렇게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순수한 이기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존재다. 즉, 사회에 다른 구성원에 의존하면서 산다. 국가도 없고

별도에 정치적 권위도 없던 수렵·채집 사회에서 개인은 결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자신만 챙길 순 없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사냥을 해야 했고. 사냥은 집단적·협력적 활동이었다. 

집단에 구성원으로서 자신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개인은 집단에서 배제되었는데, 

당시 집단에서 오랫동안 배제된다는 건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순수한' 자유는 오로지 생산 영역을 무시할 때만 생각할 수 있는건데, 인간은 생필품을 생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순수한' 자유란 생각은 생산품을 당연한 걸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즉, 옷이나 음식 같은 생필품은 어디선가 어떻게든 생산돼서,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가정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매우 엘리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태도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생산이라는 문제를 토대로 자신에 역사 이론으로 발전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는 재화도 아주 풍족한 사회를 건설해서 사람들도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일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에 문제, 즉 누가 어떻게 그런 사회를 건설할 건가 하는 문제도 해결되는 건 아니다. 


둘재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극단적 개인주의에 사회적 기원은 매우 부르주아적이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신, 교회, 신으로 정해놓은 사회질서로 철학에선 출발점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에 격언처럼 

개인주의로 출발점이 된 건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근대 초기에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에 사상, 즉 인간에 삶은 기본적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에 투쟁'이라는 주장은 반아나키스트적 결론, 

즉 강력한 국가는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당화했다. 신고전파 부르주아 경제학도 개인적·합리적 

이기적 소비자라는 '경제인'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더군다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개인주의적 반권위주의에 좌파적 색채를 입히려 하지만, 많은 보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 반권위주의를 토대로 매우 우파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건 

결코 우연도 아니다. P.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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