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 <소련, 가족 관계>. P. 241-255. 재인용. 

지금 미국에서는 소련을 승인하던 문제도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물론 외교 관계를 승인한다고 해서 두 나라는 서로 상대방에 정치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을 승인하지도 
않은 건 주로 도덕적 이유 때문이었다. (리버티) 편집자는 나에게 던진 물음들에 이런 이유들은 담겨 있었다. - 혹여나 글을 보신다면 리버럴들에 오늘날 질문 수준을 살펴보신다면 좋다. 

1. 소련 국가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오히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톨스토이나 러스킨 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기계문명이 자유로운 농민과 수공업자를 따분한 자동인형으로 바꿔 버린다며 기계문명에 반대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비난은 주로 미국에 산업 시스템(테일러 시스템과 포티즘)을 겨냥했다. 그런데 이젠 기계가 영혼을 파괴한다고 비난하는 격렬한 항의도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나오는 건가. 그렇다면 돌도끼와 흙집에 시대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또, 양가죽 옷으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그런 퇴보를 거부한다. 기계화 분야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은 지금까지 미국에 제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도중에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마 이 질문이 겨냥하는 건 기계에 작용이 아니라 사회질서에 독특한 특징일 거다.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국가는 기계가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가 소유기 때문에 인간이 로봇이 되고 있는 거냐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다. 그 질문에 뜻을 분명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질문도 
근거는 없다는 걸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정치체제, 냉혹한 독재, 모든 세력에 초긴장 상태, 주민에 낮은 생활수준이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이런 사실들을 부인하는 건, 터무니 없는 짓일거다. 그러나 그건 새로운 체제에 표현이라기 보단 후진성에 끔찍한 유산만 드러난거다.


나라에 경제적 복지 수준은 높아지면 독재는 더 완화되고 부드러워져야 할 거다. 

그러면 인간을 통제하는 현재에 방식은 사물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뀔거다. 

그건 로봇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더 수준 높은 인간으로 가는 길이다. 

- 도대체 이걸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가! 


2. 소비에트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외피를 쓰고 과두 권력을 휘두르는 크렌림에 

소수 집단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결코 그렇지도 않다. 똑같은 계급은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정치 제도와 방식에 도움을 받아 통치할 수 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역사적으로 절대왕정, 보나파르티즘, 의회 공화국, 파시즘 독재로 자신에 지배를 실행했다. 이 모든 지배 형태에 자본주의적 성격은 국민에 가장 중요한 부, 

생산수단과 학교와 언론을 여전히 부르주아지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한, 그리고 법률이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에 재산을 보호하는 한 유지된다. 

소비에트 체제는 프롤레타리아에 지배를 뜻한다. 권력을 수중에 직접 집중시킨 계층이 얼마나 광범한지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다. 


- 보나파르티즘: 계급 지배가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서는 독재 체제 또는 독재 체제에 특징을 띤 정권을 가르키는 마르크스주의 용어. 의회 정당이나 대중운동보다는 

군대, 경찰, 군가 관료를 기반으로 삼는다. 


3. 소비에트는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교육을 볼셰비즘에 선전 도구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가. 


아동교육은 어디서나 항상 선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선전은 손가락보다 손수건이 낫다는 사실을 주입하는 데서 시작하고, 미국에 공화당 공약이 민주당보다 낫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종교 정신에 교육도 선전이다.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선전가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 거다. 


프랑스 혁명으로 널리 보급된 세속적 교육은 뼛속까지 선전으로 물들어 있다. 그 세속적 교육에 주요 사상은 모든 미덕은 프랑스 국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지배계급에게 고유한 거라는 견해다. - 저열하다. 프랑스!


소비에트에 아동교육도 선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다. 유일한 차이는 부르주아 나라들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낡은 제도와 사상을 존중하도록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반면, 소련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가르친다는 거다. 따라서 선전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나쁜 의미에서 '선전'은 사람들은 보통 원하지 않는 사상을 옹호하고 퍼뜨리는 걸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보수주의와 안정에 시대에는 일상적 선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혁명에 시대에는 

선전은 반드시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기 마련이다. 

내가 1917년 5월 초에 우리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우리 아들 

둘을 '김나지움'에 보냈는데, 그 김나지움은 임시정부에 장관 몇 명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에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김나지움 전체에서 볼셰비키는 우리 아들 둘뿐이었고 

동조자도 한 명 더 있었다. "학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공식 규칙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은 겨우 12살이었는데도 볼셰비키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내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 뒤 우리 아들은 '의장'이라고만 불렸으며 

갑절로 두들겨 맞았다. 그건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선전이었다. 


낡은 사회에서 헌신하는 부모와 교사는 '선전'에 반대한다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국가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학교에서 시작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있겠는가.


"소비에트에 선전은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있는가."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다른 모든 나라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아이들도 뛰어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울음을 터뜨린다. 소비에트 체제는 아이들을 비범하게 보살핀다는 건 심지어는 악의적인 관찰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구체제와 비교하면, 유아사망률은 절반으로 낮아졌다. 


소련에 아이들은 그리스도에서 흔히 말하는 원죄나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내새에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죽은 뒤에야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에 내새 문제 전문가는 아무도 없으므로, 

나는 그런 소실은 얼마나 큰 건지를 감히 판단할 순 없다. 

그래도 현세에 고통은 내세에 즐거움보다 우선한다는 건 확실하다. 

만일 아이들이 필수 열량을 섭취한다면, 넘치는 생명력은 즐거움에 충분한 이유는 될 거다.


2년 전에 5살까지 우리 손자는 모스크바에서 여기 터키에 프린키포로 왔다. 비록 우리 손자는 신에 대해 아무거도 몰랐지만, 나는 그 녀석은 신문지 뭉치로 세면기 배수관을 꽉 막아 버렸을 때를 빼고는 그 애한테서 딱히 범죄 성향이라고 할 만한 걸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 손자는 프린키포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그 애를 보내야 했다. 훌륭한 수녀들은 이제 거의 7살이 된 우리 무신론자에 도덕을 그냥 칭찬했을 뿐이다. 바로 이 손자 덕분에 나는 지난해에 러시아에 아동 도서, 즉

러시아인 망명자들이 만든 책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 책도 꽤 잘 알게 됐다. 

망명자들에 책에도 소비에트에 책에도 선전은 들어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 책은 훨씬 더 

신선하고, 더 능동적이고, 더 활기차다. 아이들은 이런 책들을 읽거나, 어린들이 읽어 주는 걸

들으면 무척 즐거워한다. 그렇다, 소비에트에 선전은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있지 않다.


4. 볼셰비즘은 의도적으로 가족을 파괴하고 있는가. 

5. 볼셰비즘은 성에 관한 도덕적 기준을 모조리 파괴하는가. 

6. 소련에 제도에서 중혼이나 일부다처제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 도대체! 이걸 질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결혼 계약, 교회에 승인, 재산권, 단일 여권에 바탕을 둔 강제적 결합이라면, 그렇다면 볼셰비즘은 이 억압적인 가족을 그 뿌리까지도 파괴했다. 


- 1914년까지 러시아 기혼 여성은 남편에 허락을 받아야만 자신에 여권을 따로 만들 수 있었다.


또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부모가 자녀를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아내는 법률적 권리가 없는 거라면, 그렇다면 볼셰비즘은 유감스럽게도 이 오래된 사회적 야만에 잔재를 아직 철저하게 파괴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이 이상적 일부일처제(법률적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 의미에서)라면, 

그렇다면 운 좋은 예외들 말고는 세상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걸 

볼셰비키는 파괴할 수는 없을 거다.


소련에 혼인법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를 부추긴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결혼 

관계를 조사한 통계 자료(실질적 자료)는 구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길게 나열된 통계 수치들은 없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모스크바에서 배우자 있는 사람이 배우자도 아닌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간통이나 결혼 파탄 건수는 뉴욕, 런던이나 파리에 수치와 별로 다르진 않고 어쩌면 훨씬 더 낮을 수도 있다는 거다.(누가 알겠는가.)


성매매 반대 투쟁은 줄기차게 그리고 상당히 성공적으로 전개됐다. 이것이 입증하는 바는 

소련은 성매매에서 가장 파괴적·해악적으로 나타나는 난잡한 성행위를 용납할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거다. 


상호 애정과 협력을 바탕으로 죽을 때까지 오래 지속되는 결혼, 이것이 이상적인 기준이다. 


소비에트 학교, 문학, 여론은 흔히 그쪽으로 영향을 미친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가 경찰과 성직자에 속박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경제적 필요라는 속박에서도 해방되면 제 갈 길을 찾을 거고, 그 길은 생리학과 심리학에 의해서 그리고 인류에 복지에 대한 배려에 의해서 결정될 거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해결을 위한 만만찮은 전제 조건들은 

만들어 냈다. 어쨌든 결혼 문제는 이제 더는 맹목적인 상황에 압력과 무비판적 전통에 문제가 아니다. 그건 집단적 이성에 과제가 됐다.


해마다 소련에선 550만 명에 아이가 태어난다. 사망자보다 신생아가 300만 명 이상 많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인구가 그렇게 증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실만 봐도 러시아인들에 

도덕적 붕괴나 활력 저하 운운하는 건 이치도 맞지 않고, 하나에 일관된 논의도 부족한,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7. 근친상간을 형사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나는 형사 처벌에 관점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소련 법률에 

근친상간 조항에 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그런 조항은 있다면) 답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그래도 내 생각에 이 문제 자체는 한편으로는 병리학,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에 영역에 속하는 거지 범죄학에 영역에 속하는 건 아니다.  근친상간은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바람직한 

특성과 능력을 감소시킨다. 바로 그런 이유로 건강한 인간의 대다수는 근친상간을 정상적 기준을 위반한 걸로 여긴다. 사회주의에 목표는 경제 관계뿐 아니라 인간에 생물학적 기능에도 이성을 최대한 많이 투입하는 거다. 오늘날 이미 소련에 학교들은 인간에 육체와 정신에 현실적 필요에 대해 아이들을 계몽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다른 나라들보다 러시아에서 병리학적 근친상간 사례들은 더 많을 거라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바로 이 분야에서 사법적 개입은 이롭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컨대, 영국 사법부가 바이런을 감옥에 보냈다면 인류에게 이득이 됐을지는 의심스럽다. 


8. 요청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인가. 


물론 사실이다. 다르게 묻는 게 더 적절했을 거 같다. "혼인 관계에서 어느 한쪽은 요청해도 

이혼할 수 없는 나라들이 아직도 있다는 건 사실인가."라고.


- 구속시키는 남성들이 있는데, 여성들이 이혼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마저도 

  더 곤란해지므로. 이 말이구나. 


9. 소련에서는 남성과 여성에 순결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인가. 


내 생각에는 이 분야에서 감소하고 있는 건 존중이 아니라 위선이다. 

예컨대, 평생 소련을 철저히 적대시하고 엄숙한 금욕주의자로 묘사된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가 소련에 콤소볼 청년 남녀는 포옹할 때 교회에 승인을 구하지 않는다며

부도덕하다고 여러 차례 비난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1929년에 금융 폭락이 없었다면 , 크뤼게르는 증권 시장의 의인이자 도덕의 기둥으로서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 보도를 보면,

 크뤼게르가 여러 대륙에서 관계를 맺은 여성의 수가 그의 성냥 공장 굴뚝 수보다 훨씬 더 많다. 


프랑스·영국·미국의 소설들은 이중 가족, 삼중 가족을 예외가 아니라 규칙으로 묘사한다. 

매우 박식한 독일의 청년 관찰자 클라우스 메네르트가 소련 청년들을 다룬 책을 최근 펴냈는데,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 청년들은 미덕에 모범은 아니라는 건 사실이지만 ··· 도덕적으로 그들은 확실히 같은 또래 독일인들보다 결코 수준이 낮지 않다." 나는 이 말이 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17년 2월 어느 날 밤 뉴욕의 전철 안에서 20여 명의 남학생과 여자 친구들을 봤다.

비록 전철 안에는 그들에 일행이 아닌 사람도 많았지만, 아주 발랄한 이 연인들의 행동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이 청년들이 비록 원칙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신봉하더라도 실천적으로는 여러 우회로를 거쳐 일부일처제에 도달할 거다"라고.


미국에서 금주법이 폐지된다고 해서 새 정부가 술주정을 부추기려고 애쓴다는 듯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생활, 순결 등을 보호한다는 많은 법률을 소련 정부가 폐지한다는 건,

가족에 영속성을 파괴하거나 난잡한 성행위를 부추기려는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단지 물질적·문화적 수준을 높여서, 형식적 금지나 공허한 설교로는 도무지도 

얻을 수 없는 걸 얻으려는 노력일 뿐이다. 


- 요즘에는 이런 해명도 듣기란 힘들다. 


10. 볼셰비즘에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생활에서 벌이나 개미에 단계를 재생산하려는 건 아닌가. 

11. 곤충이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면 널리 퍼졌을 문명 단계와 볼셰비즘에 이상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인간뿐만 아니라 곤충에게도 불공정하다. 개미든 벌이든 인간 역사에서 

가득 찬 끔찍한 짓들에 책임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악독하더라도 곤충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있는 법이다. 소련에 임무란 바로 이것, 

즉, 인간 사회에서 개미의 특성을 파괴하는 걸 입증하기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개미뿐만 아니라 벌도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일부는 일하거나 싸우고,

다른 일부는 재생산을 전담한다. 사회적 기능의 그런 전문화에서 볼셰비즘의 이상을 

볼 수 있을까. 이것들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 문명 자본주의에 특징이 극한에 이른 거다. 

특정한 종에 개미들이 다른 피부색의 형제 개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거다.


- 감탄만 나온다! 여타에 생물학자들보다 트로츠키는 더 안목은 높았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것과도 닮은 구석은 전혀 없다. 개미들은 아직 

개미판 존 브라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 유명한 특징 묘사는 

마르크스주의 역사 해석에 기초다. 인위적 도구 덕분에 인간은 동물에 왕국에서 벗어나게 됐고 

정신노동을 위한 자극을 받았다. 인위적 도구가 노예제에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로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거다. 


질문에 의미는 분명히 보편적·포괄적 통제가 개성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에 해악은 지나친 통제 있다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련에 다른 질문들은 앞서 봤듯이 소련이 인간 생활에서 가장 친밀한 분야들, 

즉 사랑·가족·성관계 등을 국가 통제 아래 두기를 거부한다고 비난한다. 모순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소련은 결코 사람들에 정신적·도덕적 능력을 통제하는 걸 임무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생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 개성은 시장에 지배와 시장에 맹목적인 힘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포드는 자동차 생산을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조직했고 그래서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렸다. 

생산기술에 원칙 문제로 들어가 보면, 사회주의에 과제는 컨베이어 시스템 위에서, 즉 부분들에 정확한 조화를 바탕으로 계획을 세워서 전체 국민경제와 국제경제를 조직하는 거다. 단일 공장에서 모든 공장과 농장으로 이전된 컨베이어 시스템은 포드에 성과조차 디트로이트 곁에 있는 

아주 작은 수공업 작업장처럼 보이게 할 만큼 엄청난 생산 실적을 올릴 거다. 

일단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게 되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고 더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거다. 그게 바로 개성에 해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예컨대, 하루 서너 시간에 노동만으로도 모든 물질적 필요를 대체로 충족할 수 있게 되면 

모든 남성과 여성은 일체에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 시간을 20시간씩 얻게 될 거다. 그러면

교육에 문제들, 즉 사람들에 육체적·정신적 구조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는 문제들은 핵심적 관심사로 될 거다. 철학과 과학 학파들, 문학·건축·예술 일반에 서로 대립하는 경향들은 처음으로 상류층 뿐만 아니라 주민 대중 전체에게도 필수적 관심사로 될 거다. 맹목적·경제적 압력에서 벗어나게 되면, 여러 집단·경향·학파 사이에 투쟁은 매우 이상적이고 이타적인 성격을 띠게 될 거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에 개성은 고갈되지 않을 거고, 오히려 처음으로 활짝 꽃을 피울거다.


12. 소련에서는 아이들에게 부모를 존경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건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일반적인 형태에 이 주장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말일 뿐이다. 

그래도 기술·사상 또는 방식에 영역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진보는 대체로 부모를 포함해서 나이 든 세대에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건 사실이다. 교수들은 다윈에 이론을 가르치면, 이브는 아담에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부모들에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소련에서는 모든 충돌은 비할 바 없이 날카롭고 고통스럽다. 콤소몰에 관습은 자녀를 결혼시킬 때 자신에 현명한 판단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부모에 권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트랙터와 콤바인 다루는 법을 배운 적군 병사는 나무 쟁기로 일하는 아버지에 기술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 아버지는 자신에 위엄을 지키려고 손으로 성상을 가리키면서, 말 안 듣는 아들에 뺨을 때려 봐야 소용없다. 부모들은 종교적 무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학교에 공식적 권위에 스스로 근거한 자녀들은 자신들은 더 잘 무장돼 있음을 보여 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부모들은 흔히 국가를 비난한다. 이게 바로 새 체제에 근본적 과제들에 적대적인 가족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부모에 다수는 국가는 부모 구실을 더 많이 인수함에 따라 자신들에 권위는 상실된다는 걸 더 쉽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이 집단들 안에서도 세대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농민 사이에서는 세대 갈등은 특별히 더 첨예하게 나타난다. 이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는 없을 거다.


내 경험을 짧게 이야기하고 싶다. 17살 때 나는 집과 결별해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 인생에 

진로를 결정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300년이 지나도 

네가 말한 목표는 실현되지 않을 거다. 그 목표라는 건 고작 왕정을 전복할 뿐이다."


나중에 아버지는 당신에 영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셨고, 그래서 나와 우리 가족에 관계는 회복됐다. 10월 혁명 뒤에야 스스로 실수를 깨달으신 아버지는 "네가 말한 진리는 더 강력하더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례는 수천 개나 있고, 나중에는 수십만, 수백만 개라도 들 수 있을 거다. 그건 바로 '낡은 속박'은 산산조각 나는 결정적 격변기에 특징이다. 


13. 볼셰비즘은 종교를 처벌하고 종교 예배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건 사실인가. 


의도적 날조인 이런 주장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증거·증언에 의해서 수없이 많이 반박당했다. 그런데도 왜 항상 새롭게 다시 나타나는가. 왜냐하면 교회는 정부 예산과 경찰력에 지원을 받지 못할 때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박해라는 교회에 보복에 굴복하지 않을 때 교회 자신은 박해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에서 종교 신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범죄로 여긴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냥 용인한다. 소비에트 국가는 다르게 행동한다. 종교 예배를 범죄로 여기지 않고 다양한 종교에 존재를 용인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교 신앙에 반대하는 유물론적 선전을 공공연하게 지지한다. 바로 이런 상황을 교회는 종교적 박해로 해석한 거다. 


14. 볼셰비키 국가는 종교를 거대하면서도 무지한 대중에 편견을 이용한다는 건 사실인가. 

예컨대, 러시아인들은 성인이라도 사후 시체는 썩어 버리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레닌에 미라를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건 편견과 적대감이 만들어 낸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내가 훨씬 더 자유롭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처음부터 나는 레닌에 부인 N.K. 크룹스카야와 마찬가지로 

레닌에 시체를 방부 처리하고 사당(祠堂)이나 탑(塔). 영묘를 건설하는 등에 단호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레닌도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자신에 사후에도 파라오처럼 미라로 만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분노해서 미리 당에 호소했을 거다. 나는 이런 색다른 의견, 이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레닌에 시체는 레닌에 정신과도 어긋나게 사용돼서는 안 됐다.


나는 또, 레닌에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썩지 않게' 만들면 종교적 미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방부 처리 발상을 옹호하고 주도한 건 분명한 고참 볼셰비키 당원 중에 

대외무역 인민위원을 지낸 레오니트 크라신으로 다음과 같이 내 주장에 반대했다. "오히려, 신부들에게 기적에 문제였던 건 우리 손에서는 기술에 문제가 될 거다. 우리나라에 그토록 위대한 변화를 가져다준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수많은 사람은 알게 될 거다. 과학에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대중에 이런 정당한 관심을 충족시킬 거고,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시체도 썩지 않는 신비도 설명할 수 있게 될 거다.


틀림없이 영묘 건설은 정치적 목적은 있었다. 스승에 권위를 이용해서 제자들에 권위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종교적 미신에 활용을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영묘 방문객은 시체도 썩지 않고 보존되는 건 화학 덕분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에 답변은 소련에 현재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거도 아니었고 경제적·문화적 성과를 과소평가하려는 거도 아니었으며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소련 체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모순과 극단적 어려움으로 가득찬 이행기 체제일 거다. 그래도 우리는 사실에 발전에 비춰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소련은 로마노프 제국에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15년 동안 적대적 세계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다. 


포위당한 요새에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특별히 천하고, 상스러운, 

조야한 형태를 부여했다. 일본에 정책들을 보면 러시아는 결코 안전하다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소련 영토에서 소련과 전쟁을 벌였던 미국은 오늘 이때까지도 모스크바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소련 내부 체제에 엄청난 영향, 물론 부정적 영향을 미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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