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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혁명.



소련에 가족, 청년, 문화. 



가족 내부에서 테오르미도르 반동.



10월혁명에는 여성들에 대한 자신들에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했다. 갓 탄생한 소련 정부에는 여성에게도 남성과도 동등한 모든 정치적·법적인 권리를 부여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유사 이래로 무슨 정부들이든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도 여성에게만큼은 모든 형태에 경제적·문화적 활동들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조치를 능력들로부터도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취했다. 그러나 매우 대담한 혁명에서도 "전능한" 영국의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임신, 출산, 육아 등에 부담들을 동등하게 남성이나 여성들에게도 쉽게 나누어 줄 수는 없겠다. 혁명에는 소위 "가정"이라는 곧 노동계급들에 여성들도 나서 죽을 때까지도 노예선이나 노예노동까지도 수행해야 하는 케케묵고 답답한 제도를 파괴하고자 영웅적으로도 노력했다. 계획들에 따른다면 일종에 폐쇄된 소기업들인 가정 대신에 산부인과, 병원, 요양소, 체육단체, 영화관 등에서도 완벽한 공공서비스 체제들로부터 가정에 역할들을 대신하게 됐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관들로부터 가족들에 가사를 완전하게 소화해서 모든 세대들을 연대와 상호부조들에 틀로부터 통일할 경우에는 여성이나 사랑하는 부부들에게는 천년이나 지속된 족쇄를 진정으로 벗어던질 수 있을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문제들 가운데에서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다. 사천만 소련 가정들에서는 절대다수로부터 중세적인 반동, 여성노예제와 히스테리, 아동들에 대한 일상적인 모욕, 여성이나 아동들에 대한 미신 등으로 자라나는 어두운 소굴들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슨 환상들마저도 쉽게 품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련에 가족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에 연속적인 변천들은 소련 사회에 실제 현실이나 소련 지배층들에 진화과정에서도 매우 특징적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가족제도를 단번에 일소하는 건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저 의지마저도 부족했거나 가족들로부터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너무도 확고하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정부는 창설했던 탁아소, 유치원, 등으로부터 같은 기관들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던 시기를 잠시 경과한 후에는 노동여성들로부터 이후로는 좀 더 선진적인 농민들은 가사에 대한 사회화뿐만 아니라 아동들을 집단적으로도 돌보는 제도들로부터 한없는 장점들을 인정하게 됐다. 불행하게도 소련사회는 너무도 가난하고 문화수준마저도 낙후했던 걸로 판명됐다. 국가에 대한 실제자원들은 공산당들로부터 계획이나 의도들에는 제대로 부합하지도 못했다. 가족을 "철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가족은 더 좋은 다른 형태로도 대체할 수도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 실제적인 해방으로는 그저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상황에서는 실현할 수는 없었다. 이미 80년 전에 마르크스도 정식화했던 이 엄격한 진실들에는 경험으로부터도 곧 증명했을 뿐이었다. 상황들도 아주 어려운 몇 년 동안에는 곳곳에 노동자들,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 가족들은 공장들이나 다른 공공식당에서마저도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로부터도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삶으로부터 가는 이행기적 현상으로도 간주됐다. 혁명 이후에는 각기 다른 시기들 즉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제일차오개년계획시기들에 대한 특성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을거다. 이후로는 식량배급표도 철폐된 1935년부터는 상황마저도 좋던 노동자들은 가정들에 식탁으로도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러한 후퇴현상들로부터는 단지 사회주의 체제들에 대한 부정이라고 간주한다면 크게 부정확할거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도 사회주의 체제는 시도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정작 정말로 사태를 비관적으로만 만든 건 관료집단들도 조직한 "공공식단"들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나 부인들도 가졌던 판단들 때문이었다. 리넨 천들도 세탁되는 양보다도 찢기고 도난당하던 양들도 참 많던 공공세탁소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들을 내려질 수 있을거다. 다시 가정으로도 돌아가자! 그러나 현재 웅변가들이나 언론인들에 의해서 후안무치하게도 찬양되고 있던 가정취사와 세탁들은 노동자들에 부인들에게도 다시 자신들에 그릇이나 냄비들로도 되돌아간다는 건 곧 옛날에 노예제도로도 차마 돌아간다는 걸 뜻한다. "소련식사회주의에서 완벽하고 돌아갈 수 없는 승리"마저도 선언했던 코뮌테른들에 결의문들은 공장지대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아주 설득력들을 가질 거라는 건 기대하기는 힘들지는 않겠는가! 농촌가정에서는 가내수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밀접한 관계들도 있기 때문에 도시들에 가정들보다는 한없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몇 안 되는 일반적으로도 지극하게 빈곤한 농촌공동체에서는 혁명에 첫 몇 년 간 공공식당이나 탁아소를 도입했다. 처음 발표된 담화문들은 농촌에 집단화들로부터 가족제도들에 대한 결정적인 변활를 가져올 조치들을 시도할 거라고 선언했다. 농민들은 소유한 닭이나 소를 괜히 징발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소련 전역에서도 공공식당들에 당당한 진군들에 대한 담화문들로는 아주 많이도 발표됐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로부터도 후되는 시작됐을 때 현실들은 이 허풍스러운 말에 대한 그림자들로부터도 갑자기도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로도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도 자기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이 가축들에게도 먹일 사료들만을 얻을 수 있었다. 육류, 유제품, 채소 등들은 거의 완전하게도 집단농장들 옆에서도 위치했던 개인소유에 텃밭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일단 우선 가장 중요했던 생필품들로부터도, 가족들에 고립된 노력들로부터도 획득했던 이상으로부터 공공식당들에 대한 말들은 더 이상 나오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개인소유들에 소규모 농장들에서는 개인가정들에 새로운 물질적 기반들을 제공함으로 여성들에게 이중들에 부담으로도 작용했다. 



1932년에는 일상적으로 운영되던 탁아소수용인원들은 전체 육십만명들이었고 들판에서 일할 경우에만 아이를 맡는 계절적인 탁아소 수용인원들은 고작 사십만명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5년에 어린이용 침대에 수는 560만 개로 갑자기 급증해서 달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에 수는 전체 수에 아주 적은 비율에만 불과했었다. 더욱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서조차도 일반적인 탁아에 요구들에 대해서도 탁아소 서비스는 대체로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했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잣다고 느끼는 탁아소는 탁아소도 아닌 질도 나쁜 고아원에도 지나지 않는다"고 주요한 소련들에 신문들도 불평하고 있다. 상황들로부터 좀 더 좋은 노동자 가족들로부터 탁아소를 기피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질 나쁜 고아원"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아주 최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기아들이나 고아들에게도 개인가정에서도 양육되어야 한다는 결의문들을 채택했다. 매우 고위에 기관들로부터도 관료집단들은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적 기능들을 자신들로부터 수행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1930년부터 1935년에 오년 간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들에 수로는 37만 명에서 118만 일천 명으로도 늘어났다. 1930년 대에 수치는 너무 낮아서 두드러지는데 1935년에 수치는 소련에 가족 수에 비해서 대양에서 물 한 방울에도 지나지는 않아 보인다. 조금만 더 조사를 진행해보면 이러한 유치원들에 대다수나 심지어는 거의 모두가 행정부, 기술요원, 스타하노프 운동원 등에 자녀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들을 밝혀내게 될거다.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얼마 전에도 "기아와 고아에 일소들에 대한 결의문마저도 제대로 실행에도 옮겨지고 있지는 않다."고 공개적으로도 증언하지는 않을 수 없었다. 이 냉정한 자백에는 과연 무슨 현실들도 숨겨져 있을까. 조그만 활자로 인쇄된 신문에 실린 발언들로부터 우연하게도 모스크바에서는 일천 명 이상에 대한 아동들은 "아주 어려운 가족상황 속에서도" 살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수도에 고아원들에서는 대략 1,500명에 아동들도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거리로도 나앉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5년 가을 2개월 동안 "아동들을 버린 죄로 7,500명에서 부모들도 재판장에 섰다." 이들을 재판정에 서게 한들 무슨 소용마저 있을까. 몇천 명에 부모들은 재판장을 얼마나 모면했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들 속에 놓인" 아동 중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로도 통계에도 잡혀지지는 않았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이나 그냥 어려운 상황에는 무슨 차이마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해답마저도 찾지는 못하고 있겠다. 왜냐하면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공개되어 있던 집 없는 아이들에 대단하게 많은 숫자들로부터 과거에 가정들도 너무 빨리 해체되어서 새로운 제도들마저도 이걸로는 택도 없이 대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회적 위기들에 직접적인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신문들에 대한 발언들이나 형사사건들로부터도 독자들은 돈을 지불하는 남자들에 이해들로부터도 여성들은 극단적으로도 타락하는 현상인 매춘에 대한 존재를 소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가을ㄹ <이즈베스챠>는 독자들에게 모스크바에서 "무산계급 수도들에 대한 거리에서도 비밀리에 자신들에 몸을 파는 1,000명이나 되는 여성들도" 체포됐다고 보도했었다. 

체포된 여성들 가운데에서는 177명에 노동자들, 92명에 점원들, 5명에 대학생들도 있었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던가. 불충분한 임금, 궁핍, "옷이나 신발들을 살 약간에 돈마저도 벌기 위한" 필요 등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학에 정도들을 대충이나마 알고자 하는 놀력들은 성과마저도 없을거다. 하급관료들도 마찬가지로 통계요원들에게 그저 침묵을 지키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만 명령한다. 그러나 이렇게 강요된 침묵으로는 소련에 매춘부, "계급"에는 그 수도 많다는 걸 오류에 대한 여지없이도 증어할 뿐이다. 이들에 존재로는 "과거에 잔재"라는 주장들은 근본적으로도 말도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젊은 세대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적어도 이성마저도 갖추고 있었다면 문명에 대한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사회악들에 대해서는 소련체제를 비난하지는 않을거다. 그러나 매춘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건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문들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도 있는 허가를 받는 한에서는 "매춘행위는 감소하고 있다"고 물론 주장하고 있다. 기아와 피폐에 해이던 1931년부터 1933년대 사이에 상황들로부터 비교해봐도 이 말은 진실하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도 화폐경제는 충분하게 회복되었거나 직접적인 배급제도는 철폐되었으므로 집 없는 아동들이나 매춘들은 불가피하게도 새롭게 증가할거다. 특권층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버림받은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집 없는 아동들에 많은 수는 의심에 여지 없이도 여성에 어려운 상황들을 매우 오류 없는 비극적으로만 보여주는 증후들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프라우다>까지 가끔 쓰디쓴 자백들을 하지 않을 수조차도 없겠다.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들은 이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아주 심각한 위협을 주는 요인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정부는 늘 여성들에게도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었다. 거세된 남성들이나 노처녀들은 무엇이라고 하든 궁핍이나 가족에 대한 어려움들 속에서 낙태는 여성에 가장 중요한 시민적·정치적·문화적 권리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들에 권리이던 낙태 역시나 현재와 같은 사회적 불평들에 체제에서는 특권으로도 변질되고 말았다. 낙태들에 관행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로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우랄지방에 어느 한 지구에 있는 농촌병원 한 곳으로부터는 1935년에 "195명에 여성들은 산파들로부터 몸을 상했었다." 이 가운데에는 33명에 노동여성들, 28명에 사무직 노동자들, 65명에 집단노동 여성들, 58명에 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구는 낙태에 대한 정보로는 언론으로도 흘러들어 갔다는 건 대부분 다른 지구들과도 차이는 많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매일 소련전역에서도 산파들에 의해서 몸을 상하고 있을까. 



필요한 의학적 도움이나 위생시설들을 갖춘 낙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그들에게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마저 없음으로 밝혀지자 마자 국가는 방침들을 갑자기 바꾸어 놓고서는 낙태를 금지하는 쪽으로도 방침을 단독으로만 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상황에서도 필요를 강변하고 있다. 소련 대법원 판사 솔츠는 현재 결혼문제 전문가이다. 앞으로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들을 옹호하면서도 그는 실업자마저도 없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은 "엄마로 되는 기쁨"마저도 거부할 권리마저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건 경찰들에 권한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성직자들만에 철학들일 뿐이다. 바로 이전에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그리고 아마 절대다수에 여성들에게도 출산에 대한 "여성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련에 최고기관들로부터도 "고아와 기아들에 일소정책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이 말들은 집 없는 아동들에 수는 새롭게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이 소련 대법원 판사는 "인생마저 행복한" 나라에서는 낙태는 감옥행으로만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건 그저 인생만 슬플 뿐 자본주의 국가들이나 똑같은 정책들일 뿐이다.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간수들에 손아귀에서 고생할 사람들은 주로 노동여성, 하인, 농민들에 부인 등인데 이들은 자신들에 어려움들마저도 숨기기란 참 힘들었다. 고급향수나 기타사치품들에 대한 수요들을 창출하는 고위층들로부터 "우리 여성들"은 관대한 법으로보는 바로 앞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한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한사코 모른 체하면서도 솔츠는 결론 내린다. "우리는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아이들을 낳으시지요."라고 수백만 노동여성들은 이 고위판사양반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거다. 이는 물론 관료집단들로부터도 이들에 입을 꼭 봉해서 완전하게도 침묵하도록 하지 않을 경우에만 아무래도 할 수 있을거다. 사회주의란 여성들에게도 낙태를 강요하던 원인을 제거하는 체제이지 모든 여성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정작 불한당 같은 경찰들을 동원해서 "엄마로 되는 기쁨"들을 강요하는 체제는 아니라는 사실들을 이들 높으신 양반들을 완전하게도 잊어먹은 거 같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 초안들이 소위 광범위한 대중에 논의를 위해서도 제출됐다. 그러나 소련 언론이라는 가는 체를 통과하기는 했더라도 강한 불만이나 억눌린 저항마저 터져나왔다. 그러자 토론들은 그걸 개시됐을 때만큼도 갑작스럽게 중단됐고 6월 27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들로부터도 치욕스러운 초안들도 세 배나 더 치욕스러운 법들로 전환되었다. 관료집단들에 낙태금지 변명자들도 일부는 낭패라는 빛을 보였다. 루이스 피셔는 이 법들로부터도 통탄할 정도에 오해는 존재하는 가운데 통과됐다고 선언했다. 고위관료들에 부인들을 제외한 여성들에 권리를 금지하는 이 새로운 법들은 실제로는 테르미도르 반동들로부터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루블화에 복권이나 함께 동시에도 가족과도 복권되었다. 얼마나 은총들은 가득한 우연들에 일치들이던가. 그런데도 이 복권들로부터도 국가에 물질적·문화적 파산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공개적으로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적 관계를 창출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거도 증명됐다. 우리들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은 이 목적들을 실현하는거"라고 말하는 대신에 소련에 지도자들은 깨어진 가족들에 외형들을 다시 아교로 이어붙이는 걸 강요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극심한 벌칙들에 위협을 동원해서도 가족들로부터 승리한 사회주의에 성스러운 중핵으로도 바라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로부터 가져온 사회적 후퇴를 눈으로 측정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입법자, 문학가, 법원과 민병대, 신문이나 학교교실 등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사물들로부터도, 새로운 정책 속으로도 끈에 묶인 채로 끌려 들어오고는 있다. 단순하고 정직한 어느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그에 신문에도 다음으로 같이 대담하게 글들을 실었다. "여성들은 가족들로부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도에도 골몰하는 건 좋을거다." 그런데도 이 청년들은 곧 뺨을 두세 차례나 맞고 침묵들을 지킨다. 공산주의라는 기본적인 정책들은 "좌익적 노선들에 과도함"으로도 선언됐다. 문화적 소양마저도 없는 속물들에 어리석고 썩어빠진 편견들에 새로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끝없이도 광활한 나라들에 모든 구석구석들에는 무슨 일들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언론들은 오직 미세한 정도로만 가족 내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을 반영하고만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라는 고상한 열정으로는 죄악에 대한 증대와 함께 더 뜨거워진다. 따라서 십계명에 제7조 "간음하지말라"에는 관료지배층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련에 도덕론자들은 문구를 약간만 고치면 된다. 너무 빈번하고 쉽게 발생하는 이혼들을 반대하는 캠페인들이 지금도 시작되고는 있었다. 소련에 입법자들에 창조적인 사고로는 이혼을 신고할 때조차도 신고료를 받고 이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신고료를 인상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를 이미 발명했었다. 위에서 이미 가족들에 복권으로부터 루블화라는 교육적인 역할들에 대한 증대를 수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고료 징수는 돈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고를 하기를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 당연하다.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이 정도에 세금들도 하등에 어려움들도 초래하지는 않기를 우리는 더욱 희망한다. 더욱이 고급 아파트, 승용차, 기타 좋은 걸 많이 소유하고 계시는 고위인사들은 자신들에 신상을 필요로 없이도 알리지 않기 위해서 신고를 하지도 않는다. 매춘에 무겁고 모욕적인 성격에는 사회에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만 가해진다. 소련사회에서 상류층에서는 권력에 대한 안락함으로도 결합되는데 여기서 매춘들은 소규모로 된 상호서비스라는 우아한 형태를 갖추거나 심지어는 "사회주의 가족"들에 측면들을 뒤집어쓴다. 지배층에 타락과정에서도 "승용차여자요인"들로부터 갖는 중요성들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부터, 소스노프스키로부터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정적이고 학자풍이던 서방에 대한 "소련에 친구들"은 무엇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눈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만 한다. 10월혁명으로부터는 확립된 혼인법이나 가족법들은 당당한 긍지들에 대상이었는데 이제 지배계급들에 국가들에 법률창고들로부터도 대대적인 차용들을 고쳐지거나 찢겼다. 경멸에 대한 눈빛을 보이면서도 배반이라는 도장들을 고의로도 찍기라도 하듯이 낙태와 이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유를 옹호하고자 제출됐던 주장들 곧 "여성해방", "개성을 추구할 권리들에 대한 옹호", "모성보호" 등으로부터 이제는 이러한 자유들을 제한하고 완전하게 금지하고자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에 대한 후퇴는 구역질 나는 위선에 대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필요라는 절칙들로부터 요구한는 거보다는 한없이 더 나아가고 있다. 이혼여성들에 대한 위자료 지급이나 같은 지배계급들에 법형식들로부터 회귀하는 현상들은 객관적인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료지배층으로부터 지배계급들로부터 법들을 더욱 많이 도입해야만 하는 사회적 이해관계들로부터도 결부되고 있겠다. 현재로는 관료집단들로부터 가족들을 신성시하게 하는 매우 주요한 이유 이들로부터 사회관계에서 위계들을 안정적으로도, 정적으로도 확립해야할 필요성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나 권력들을 지지하던 사천만 개에 기관들로부터 청년들을 현 체제로부터 요구하던 규율들로 그저 묶어버리기 위한 필요성으로도 작용해버렸다.



새로운 세대들에 교육들을 국가에 손으로만 집중하고자만 하는 희망들을 소려지배층들은 아직도 버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에서는 부모를 위시했던 "어른들"만에 권위를 지지하던 일에는 관심이나 흥미마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도 어린이들을 가족들로부터 분리하고자 하기 위해서 최선에 노력들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을 정체된 생활양식들에 대한 전통으로부터도 격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일차오개년 계획들로부터 시행됐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나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는 작은 어린이를 이용해서라도, 술주정뱅이 부친들이나 그저 종교를 가졌던 모친들을 폭로했고, 모욕줬고, 일반적으로도, "재교육"해놨다. 어쨌든 이 방법들로부터는 기존에 부모들에 권위를 뿌리째 흔들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도 역시 급격한 정책전환들로부터도 일어났다. 십계명으로부터 제칠조로부터도, 함께, 제오조, "신들을 모욕하지는 말라"도 완전하게 권위마저도 회복해놨다. 그렇다고 신들을 부르는 단계까지도 도달한 건 아니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학교에서는 십계명, 제오조를 들먹이지도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 보수성이나 판에 박힌 규율들을 주입할 수 있는 일에도 성공하고, 성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세대들에 권위들에 대한 관심이나 우려로는 벌써 이미 종교와 관련된 정책들에 대한 전환들을 가져왔었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 그들에 대한 도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적들에 대한 부정들은, 혁명권력들로부터 아동이나 부모들 사이에 박은 가장 예리한 쐐기였었다. 그러나 문화들에 발전, 진지한 선전, 과학으로부터도 입각했던 교육들보다도 훨씬 앞서서 진행되던 종교에 대한 투쟁으로는 야고슬라브스키와 같은 인물들에 지도 아래에서도 종종 익살이나 장난기로도 타락했다. 이제 가족들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로도 하늘나라들에 대한 공격도 갑자기 멈추었다. 품위들에 대한 평판들을 신경쓰지는 않을 수 없는 관료집단들에서는 젊은 "무신론자들"에게도 종교들에 대한 싸움들을 멈추고 독서를 하고자 책상에도 앉기를 명령했다. 종교들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중립정책들로부터는 이제서야 확립됐다. 그러나 이건 아직 첫단계에 불과하다. 사건에 진전들로부터 관료집단들로부터는 좌지우지 된다면 두번째 단계들이나, 세번째 단계를 예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도 않겠다. 지배층들에 견해로부터 드러내는 위선들은 모든 곳에서도 그리고 언제나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도 확대판으로도 발전해왔다. 이건 대체로는 사싱이라는 역사적 법칙들이다. 사회주의들로부터 이름들에 값하려면 탐욕들로부터도 개입되지도 않던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들도 없는 우정들, 저속한 계산들도 없는 사랑들로부터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소련들에 공식적인 사상으로는 이러한 이상적인 규버들로부터 이미 벌써 실현됐다고 선언하고나 앉아있다. 이를테면 1936년 4월에 채택된 공산주의 청년동맹들에 새로운 강령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진정한 평등에 기반해서도 새로운 가족들도 등장했다. 이 새로운 가족들을 번성하게한다는 건 소련정부들에 관심사들이다." 이 강령들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으로는 강령들을 보완하고 있다: "우리 청년들은 평생 친구들인 아내들이나 남편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사랑이라는 오직 하나에 동기와 충동만을 가지고 있다. 금전적인 편의로부터 개입된 지배계급들에 대한 결혼으로는 성장하는 세대들에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프라우다> 1936년 4월 4일. 일반적인 노동자들에게도 관계되는 한에서는 이건 어느 정도로도 사실들이다. 그러나 "돈들을 위한 결혼"으로는 자본주의 세계들에서도 노동자들에게도 비교적 대부분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는 있지도 않겠다. 그러나 소련에 중산층들이나 상류층들로 가면 상황들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계층들은 자동적으로도 인간관계들에서도 자신들에 특성들을 반영해낸다. 권력이나 돈들로부터 이성적인 관계들에 미치는 악행들은 소련관료집단들 내에서도 아주 흔하게도 퍼지고 있겠다. 마치 이들은 이에 대해서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을 능가하겠다는 목적을 벌써 정한거 같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금까지도 인용된 <프라우다>에 기사내용들과는 정반대로도 "정략결혼"에는 소련언론들로부터 우연하게는 도는 피할 수 없이도 정직함들을 드러낼 때 비로소 자백하듯이, 이제는 완전하게도 부활했다. 자격요건, 임금, 고용, 계급 등들에서도 점점 더 커다란 의미마저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는 신발, 모피외투, 아파트, 욕실, 그리고, 최종적인 꿈들인 승용차구입 등에 대한 문제들로도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단칸방들을 구하고자 하는 투쟁들은 매년 모스크바에서도 적지 않은 수로도 부부들을 결합하고 있고 헤어지게들 만든다. 그리고 친척관계들에서도 결혼에 있어서도 예외적인 중요성들을 획득했다. 군사령관이나 영향력 있던 공산주의자 장인들을 두거나 높은관리들에 대한 여동생 장모를 둔다는 건 출세나 안락한 생활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마저도 없을거다. 이와는 다른 상황들에서도 도대체 소련에서는 어떻게 할 수나 있겠는가. 소련들에 대한 두꺼운 단행본들에 대한 가장 극적인 장들 중에 하나로는 소련가정에 대한 해체와 붕괴들에 대한 이야기일거다. 남편들은 당원들, 노동조합간부들, 군사령관들, 행정가들을, 역임하면서도 새로운 취향들을 개발해낸다. 그러나 부인들은 가족이라는 굴레에만 묶여서 과거에 수준들에만 여전하게 머물려 있겠다. 소련이라는 관료집단들에 두 세대로부터 걸어온 길들에는 부인들도 남편들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뒤처진 비극으로도 가득하다. 같은 현상들은 이제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나타난다. 가장 커다란 잔학행위는 아마 관료집단 상층부들에서도 볼 수 있을거다. 이들 중에 많은 비율로는 교양마저도 거의 없는 벼락출세파들이고 모든 건 자신들에게만 열려 있다고 그저 생각만한다. 언젠가 고문서 보관서에도 비치된 비밀문서나 회고록도 공개되면서부터 이들에 부인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한 추악한 범죄들도 드러날거다. 가족들에 도덕이나 강제적 "모성에 대한 기쁨"을 복음주의자처럼 외치던 이들은 여성들이나 가족들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높은 지위들로 인해서 기소마저 되지도 않는다. 아니다, 소련여성들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겠다. 법 앞에서도 완전한 평등으로는 노동자 여성들이나 농촌여성들보다도 상류층여성, 기술·관료·교육 등 일반적으로도 지식분야를 대표하는 여성 등에게는 한없이도 많은 특궐들을 부여해왔다. 사회는 가족들에 물질적 걱정들을 직접 해결하지도 못하는 이상 주부는 흰옷을 입은 노예 곧 보모, 하인, 요리사 등들을 부릴 수 있을 때에만 자신들에 사회적인 기능들을 성공적으로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사천만 가구들 중에서는 5퍼센트나 또는 10퍼센트만이 가정노예에 대한 노동들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만 의존한다. 소련에 존재하는 하인들에 대한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소련에 대한 법률체계만큼이나 소련여성들에 지위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평가에도 중요할거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소련에 통계로는 "노동여성" 또는 "기타다른사람들"이란 이름 아래에서 하인들에 존재를 숨긴다.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에 부인들은 요리사를 구비하고 상점에다 주문할 수 있는 전화를 구비하고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 승용차 등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상점으로 뛰어가야만 하고, 저녁들을 준비해야만 하고, 유치원이 있을 경우에는, 거기까지도 걸어가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노동여성과도 공통점은 거의 없겠다. 사회주의라는 명찰들은 이 사회적 격차를 은폐하게 할 수는 도무지도 없겠다. 이 격차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에 여성들이나 노동자 여성들 간에 격차만큼이나 매우 크다. 



참기도 참으로 어렵고, 모욕적이기만 한 가정생활에 대한 어려움들은 사회전체에 노력들에 의해서도, 제거된 진정한 사회주의 가족으로는 무슨 강제적 통제도 요구하지는 않을거다. 그리고 이러한 비로소 자유로운 가정들 내에서는 낙태와 이혼에 대한 법률들을 생각하는 거 자체만으로 하더라도 매춘굴이나 인간제물사원들을 생각하는거만큼이나 아마도 끔찍하게나 느껴질거다. 



10월혁명들에 대한 법률들은 이러한 가족들을 창조하기 위한 대담한 첫발들을 내딛었다. 그러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으로 잔악한 반동들마저 초래해왔다. 테르미도르 반동들에 대한 법률들은 심지어는 이제 지배계급들이라는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들에 성스러움들에 대한 거짓 연설들로 가려져 있겠다. 이 문제들에서도 사회주의 건설들에 실패잗르인 소련지배층들은 위선적인 품위들로도 자신들을 위장하고 있겠다. 

특히 아동문제들에 대한 높은 원칙들이나 추악한 현실들에 사이에서도 격차들로부터 충격들을 받은 진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채택된 가혹한 형법적인 조치들은 여성이나 아동들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법률들을 조야한 위선으로 밖에는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암시하기로는 더욱 더 충분해진다. 법률들이나 행정기구들에 형태로도 거짓 치장한 사상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관대함들로부터 속아버린 정반대 종류들에 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궁핍한 주부, 창녀, 집 없는 아동들을 보면서도 이들 낙관주의자들은 물질적 부는 좀 더 증대하면서도 사회주의 법류들에 피와 살들을 붙게 될 거라고 스스로 말한다. 위에 두 가지 접근방식들 중 어느거도, 무엇도, 좀 더 오류들이고, 해로운지를 판단한다는 건 쉽지도 않겠다. 역사 맹인증들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 계획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대답함, 이 계획들에 대한 실행초기단계들로부터 중요성, 그리고 이로부터 열린 엄청난 규모들에 가능성들 등을 심지어는 보지도 못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소련에서도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증대로는 눈을 감고 그저 미래를 바라보기만하면서 정작 관료집단들에게만 존경스럽게도 미래에 열쇠를 맡기는 부류들도 있겠다. 이들은 불평등한 현실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그저 위안하면서도, 그저 수동적이고, 그저 기본적으로도, 그저 무관심한, 그저 낙관론자들에 불과해진다. 이들에 대해서 분노마저도 느끼지도 않는다면 도무지도, 도대체, 이상한 일이기만 할거다. 여성들이나 남성들에 권리평등들은 관료집단들로부터 권리박탈들에 평등으로도 전화되지 않듯이, 이들은 생각마저 하고 있겠다. 무슨 성서에 지혜서에서 소련에 관료집단들은 자유를 대신해서도 새로운 억압들을 도입하지는 않을거라는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듯이도, 이들은 또 생각하고 있겠다.



과연 남성들은 여성들을 어떻게 그저 노예로 만들어왔는가, 착취자와 이 양자를 어떻게 모두 지배해왔는가, 노동인민들은 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에상태들에서 자신들을 해방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떻게 해서 하나에 쇠사슬들은 그저 다른 쇠사슬들로만 바뀌었을 뿐인가. 역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거에 대해서는 정말로 많은 애기를 들려주고, 해준다. 이건 역사들로부터 우리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에서는 아동, 여성, 인간들은 과연 스스로를 해방할텐가. 이 문제를 해결할 믿을만한 모델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모든 부정적이고, 부정된 역사적인 경험들은 대중들로부터도 통제되지도, 통제하지도 않던, 억압체제들에 수호자들이나 모든 특권층들에 대해서는 노동인민들은 그저 결코 지워지지도 않는 불신으로만 무장하기를 간곡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또한 요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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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가운데.



우리는 10월 혁명들로부터 성공했다. 그러나 이 혁명에는 출판에 영역에서도 좀처럼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10월 혁명에 격동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이 혁명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조직적인 측면들을 다루고, 올바르게 부각한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단 한 권도, 단 한 줄도 출판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불행한 사실도 또 있다. 혁명 준비 작업 및 혁명 그 자체에 대한 세부정보들을 담고 있는 1차 자료들이나 그 중에는 가장 중요한 공식 문서들로부터는 아직까지도 출판되지도 못하고 있다. 10월 혁명 이전까지에 혁명사 및 당사와 관계된 허다한 문서들이나 자료들은 벌써 출판됐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정작 10월 혁명들은 제대로 관심이나 흥미마저도 끌지 못하고 있다. 혁명으로부터 승리했으므로 그걸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내린 듯이 보인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연구는 미룰 수 없는 사회주의 건설 과업에서도 직저적이고 즉각적으로도 도움마저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와 관계된 실제조건들, 혁명에 대한 실제적인 완수 및 과정, 혁명 이후에도 혁명 성과를 공고하게 한 첫 몇 주일 등들에 대한 연구는 아무런 이득마저 되지도 않는다고 이미 결론내린 듯이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들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설령 잠재해 있다고 하더라도 굉장하게 잘못됐다. 특히나 편협하게 치우치고 일국적인 사고들에 단면들을 잘 보여줄 뿐이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경험들을 다시금 반복할 필요마저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러한 경험들로부터는 무엇도 배울거도 없다는 결론에는 결코 내릴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인터내셔널에 일부이고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자신들에 '10월혁명'을 성취해야 할 과제마저도 안고 있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말해준 실례들을 작년에도 많이도 접했었다. 서방에서는 매우 선진적인 공산당들조차도 10월 혁명들에 대한 교훈들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혁명들에 대한 실제 사실들을 대체로 알고 있지도 못했다. 내 주장들을 반대할 사람들도 분명 있을거다. 10월 혁명을 그저 연구했거나 그와 관계된 문서들을 출판한다는 건 과거에 대한 이견들을 다시금 부추기는 꼴만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건 아주 치졸할 뿐이다. 1917년에도 있었던 이견들로는 아주 중요한 의미마저도 담고 있었고 그저 단순하게, 우연하게 발생한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는, 당시에도 오류를 범했던 인사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때의 이견들을 들추는 더럽고 치사한 행위는 없을거다. 그러나 사소한 개인적인 고려들 때문에 10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건 더욱 인정할 수도 없겠다. 왜냐하면 10월 혁명들로부터 제기한 문제들에는 국제적인 의의마저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불가리아에서는 혁명마저도 처참하게 패배를 당했다. 무엇보다도 불가리아 공산당에서는 숙명론이나 교조로부터 젖어 있다가도 둘도 없는 혁명에 대한 기회마저도 놓쳐버렸다. 6월 차코프 쿠데타에 이은 농민봉기로는 혁명들을 성공할 수 있었던 둘도 없는 기회였지만. 그리고선 오류를 만회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정치적·조직적인 준비들도 없이도 9월 봉기를 일으켰었다. 불가리아혁명에는 독일혁명에 대한 전주곡으로 됐어야만 한다. 불행하게도 불가리아에서는 엉터리 전주곡들은 독일에서 더 지독한 엉터리 혁명들을 불러일으켰다. 작년 하반기, 독일에서는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하고 절대적으로도 유리한 혁명에 대한 기회를 찾아왔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정작 이걸 말아먹는 방식으로 아주 모범적으로도 보여주었다. 그보다 더욱 불행한 일들도 더 있었다. 작년 불가리아와 독일에서도 실패한 혁명으로는 그러한 중요성에 비추어서도 올바르게, 또는 충분하게 평가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나는 독일에서 상황들을 개괄적으로도 묘사한 글을 쓴 바 있었다. 그리고 내 묘사는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올바르다는 건 사태에 대한 전개로도 하나하나 입증됐었다. 그런데도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설명마저도 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도, 정작 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개괄적인 묘사 이상으로도 필요하다. 작년 독일에 대한 상황에서는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실에서도 입각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이 매우 참혹한 역사적 패배에 대한 원인들을 구체적으로도 해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10월혁명을 정치적·전술적으로도 자세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리아와 독일에 사건들을 분석한다는 건 사실상 할 수 없다. 10월혁명에 성사방법이나 성과는 단 한 번도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10월혁명에 승리에 그저 열광에서는 유럽에서도 자동적으로 혁명으로 터져서 이 혁명에 대한 교훈들을 이론적으로도 되새길 시간마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 같다.

그러니 현재까지에도 사태들로는 노동계급혁명들을 지도하는 정당들 없이는 혁명 그 자체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입증했다. 노동자들은 자생적인 봉기들로부터 국가권력들을 장악할 수 없다. 고도로 공업화되었으며 고도에 문화적인 수준마저도 누렸던 독일에서조차는 1918년 11월 노동자들에 자생적인 봉기로는 권력들을 자본가계급들에게 넘겨줬을 뿐이다. 한 유산계급들은 다른 유산게급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 자신들에 부와 문화적 수준 그리고 국가기구 내에서는 수 많은 연줄들로부터 정치적 행동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들은 자신들에 혁명정당들 없이는 절대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겠다. 1921년 중반이 되어서야 '대중들을 획득하라', '공동전선들을 수립하라' 등들에 구호를 외치면서 각국에 공산당들을 조직할 수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10월혁명들로부터 제기했던 문제들은 뒷전으로 그저 밀려났고 동시에 10월혁명들에 대한 연구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작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동계급들에 혁명에 대한 문제에도 봉착했다. 모든 관계된 문서들을 수집하고 모든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출판하고 연구에 몰두해야 할 필요는 이제 더욱 절실해졌다! 



모든 나라, 모든 계급, 심지어는 모든 당들도 가혹한 경험이란 매질들로부터만 뭔가를 배운다. 이를 우리는 당연하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다른 계급, 다른 당들에 대한 경험들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에 대한 경험들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스 대혁명, 1848년에 혁명들, 파리코뮌 등을 연구하지도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10월혁명들을 쉽게 성취할 수는 없었을거다. 과거 혁명들에서 제시했던 교훈들을 연역하고 이로부터도 혁명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들에 대한 논리를 확대하고 적용해보면서 우리는 러시아 혁명들에 '일국적' 경험들을 거쳤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닥친 반혁명 시기 전체를 보더라도 우리는 1905년에 교훈이나 의의를 연구하면서 견뎌나갔다. 그러나 승리한 10월혁명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진행되지는 않았다. 아니, 그동안 연구들에 들인 노력에 10분에 1도 10월혁명들에 연구에 바쳐지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는 현재에도 반동에 시기를 경과하고 있거나 망명객들에 처지를 놓여 있지는 않다. 현재에도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역령이나 자원들은 과거에도 어려운 시기에도 비하면 한없이 증대했다. 다만 현재에는 우리들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건 당이나 인터내셔널로부터 된 차워에서도 명확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하도록 10월혁명들에 연구들에 대한 필요성들을 제기했던거다. 왜냐하면 10월혁명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정치노선들에 대한 최상에 시험대로 되었으며 미래로 넓은 문들을 활짝 열어서 젖혔기 때문이다. 작년에 독일혁명들에서는 10월혁명들에 혁명연구들로부터 중요성들을 심각하게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절박하게도 경고했다. 

그러나 10월혁명에 대한 과정들에서도 가장 철저한 지식마저도 독일 공산당들에 혁명승리를 결코 보장할 수는 없었을거라는 반론들로부터 물론 제기될거다. 그러나 이런 유로부터 된 극히 속물적인 논리에는 우리에게는 하등에 도움마저도 되지는 못한다. 물론 10월혁명을 연구만 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 혁명들로부터 승리들은 확실하게는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조건들로부터 무르익었으나 혁명에 대한 법칙이나 방식들을 이해하고 있는 선지적이거나 결연한 당 지도부로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경우로는 얼마든지 있겠다. 작년에 독일에도 정확하게는 이런 경우였다. 이와 비슷한 상황들로부터 다른 나라에서도 반복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노동자혁명들에 대한 법칙이나 방법들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는 10월혁명에 대한 경험들로부터도 더 중요하고 깊이 있는 연구대상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을 비판적이고 아주 세세한 연구들로부터는 10월혁명들에 역사를 소화하는 일들을 아직까지는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들로부터 보여준 전략적·전술적·기술적 경험들을 연구하지는 못한 채로 현재까지도 새로운 전쟁들을 준비하는 총사령관과도 같다. 총사령관들은 필시로 군대들을 패배로도 이끈다. 당에서는 노동자 혁명들에 필수적인 도구들이다. 1917년 2월부터 1918년 2월까지는 단 일년에 경험으로부터만 그리고 핀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 독일에 보충적인 경험들로부터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혁명 준비 작업에서는 즉각적인 권력쟁취 투쟁들로부터도 노선들을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당들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겪을 수밖에는 없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당내 위기는 전환에 대한 시초 또는 전환에 대한 결과로는 심각한 국면으로 조성될 때마다 일어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당 발전들에 모든 시기들로부터 그 나름대로에 특징들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활동 방식들이나 습관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술로에 대한 전환들에는 이 습관들이나 방식들로부터 어느 정도 단절된다는 걸 뜻한다. 바로 이 때문에 당내에 모든 갈등들이나 위기들에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발생한다. 1917년 7월 레닌도 이렇게 말했다. "급격한 전환에 대한 시기로 봉착하게 되면 진보적 정당들도 당분간은 새로운 상황에도 적응하지는 못한다. 이 결과로 과거에는 옳았으나 이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 구호들을 외치는 경우는 너무 자주 있었다. 과거에 대한 구호들은 이 경우에도 역사에 대한 급격한 전환들로부터 '갑자기' 닥친만큼이나 빨리 그러한 뜻들을 '갑자기' 상실했다." <슬로건들에 대해서>. 따라서 이러한 전환들이 너무나 갑자기 일어날 경우에는 그리고 지난 시기에 관성들이나 보수적인 활동방식들로부터도 축적되어서 당 주요 기구들을 지배할 경우에는,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이나 준비해왔던 결정적인 혁명들에 순간들에 당들은 자신들에 지도력들을 발휘할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당들은 위기들로부터 파괴되어지고 혁명운동들은 당들을 내러벼두고 멀리 앞으로 나아가서 패배로도 줄달음치게 된다. 혁명정당들은 다른 정치세력들로부터도 압력을 받는다. 발전들에 매 단계마다 당들은 이 압력들에 대해서 반격하고 저항하는 방식들을 개발한다. 그런데도 전술전환들에 시기로는 당내에는 분파들로부터 모였다가 흩어지고 갈등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들에도 대처하는 당들에 위력들로부터 약화된다. 이로부터는 당내분파들은 전술전환들에 필요성들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원래대로에 논란수준들을 넘어서서 다양한 계급들을 지지하는 버팀대로도 발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늘 항상 제기된다. 이걸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자신들에 계급들에 역사적인 과업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당들에는 다른 계급들에 간접적인 지배도구로도 전락할 위험들도 있겠다. 현재까지도 말한 바로 모든 심각한 전술전환들에 경우에 적용된다면 전략적 대전환들에 시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군사학에 대한 비유를 빌려서 말해보면 정치에서 전술이란 개별적인 작전들을 수행하는 기술들을 뜻한다. 전략들은 정치권력 장악들에 대한 기술들이다. 일차세계대전 세계전쟁으로부터 일어나기 전에는 전술이나 전략도 차이는 없었다. 두번째 인터내셔널 시기에는 우리에게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전술개념들에도 갇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건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당들은 의회전술, 노동조합전술, 시의회전술, 협동조합전술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모든 역량들이나 자원들을 결합해서는 적들로부터 승리하는 문제로는 권력장악들을 위한 투쟁들을 실제로도 조직하는 임무와도 관계되어 있다. 따라서 두번째 인터내셔널 시기로는 이 문제들은 결코 제기되지도 않았다. 이로부터 오랜 시간들이 흐른 후에는 노동계급들에 권력장악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들, 즉 전략적인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건들은 바로 1905년 혁명들이었다. 따라서 1905년 혁명들에 경험들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곧 볼셰비키들에게 엄청난 강점마저 되었다. 혁명전략들에 대한 거대한 시기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먼저, 그리고 이어서 유럽전역에서 시작됐다. 물론 전략들은 전술들을 폐기하지도 않는다. 노동조합운동, 의회활동 등에 문제들은 소멸되는 거도 아니라 권력장악들을 위한 결집된 투쟁들에서도 종속되는 하위수단으로도 새로운 뜻으로 부여받는다. 전술들은 전략에도 종속된다. 전술전환들로부터 보통에 경우에도 당내갈등들을 유발한다면 전략전환으로는 얼마나 깊고 치열한 갈등들을 낳을건가! 그리고 노동계급 정당들이 선전, 조직, 선동 등 혁명준비작업들로부터 즉각적인 권력장악 작업으로 들어갈 때 매우 급격한 전환들로 이뤄진다. 단호하지도 못하며 냉소적이고, 타협적이고, 투항적이기만 한 당내에 모든 멘셰비키 분자들은 봉기에 반대하면서 공개적으로도 자신들에 모습들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합리화할 이론적 근거들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는 과거에 기회주의 조류들로부터 이미 완성된 무기를 찾아낸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미래에서도 최소한 한 번 이상으로도 보게 될거다. 



결정적인 투쟁들에 앞서 모든 역량들을 검토학고 선택하는 당들에 대한 마지막 작업들은 1917년부터 2월부터 10월 사이에도 이뤄졌다. 작업들은 대중들에 대한 가장 넓은 선동들이나 조직작업들로부터 기초로 진행됐었다. 10월이나 그 이후로는 우리들에 역량으로는 거대한 역샂거인 행위라는 용광로 속에서도 시험들을 거쳤다. 10월혁명마저도 끝난지 7년이나 지난 현재들에 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특히 러시아 혁명들에 대해서도 제출된 상이한 견해들을 평가하면서도 유독 1917년들에 경험들을 회피한다는 건 메마른 현학들에 빠져드는 거와도 같다. 이건 마르크스주의에도 입각한 정치분석들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로 수영해야할 사람들은 수영방법들을 시험해볼 강물들에 대한 시선들을 두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면서도 여러 수영방법들에 대해서는 말싸움을 하는 거와 같다. 수영방법들을 효력들을 매우 잘 확인하는 방법들에는 직접 물에 뛰어드는 거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혁명들로부터 전개될 당시에는 드러난 온갖 견해들은 실제로도 어떻게 현실들에 시험을 거쳐왔는지를 확인하는 거보다도 혁명이론들을 검증하는 더 좋은 방법들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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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산계급들에 독재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만들어냈다. 엥겔스는 죽기 얼마 전인 1891년에 이 개념들을 단호하게 지지했다. 이 개념들은 무산계급들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무산계급들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임을 뜻한다. 



카우츠키는 10년 전에 위와 같이 썼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무산계급들이 권력을 쟁취하는 유일한 형태로는 민주적 의회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는게 아니라 무산계급들에 독재였다. 분명한 사실에는, 우리에게 과제가 단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하는 거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들을 무산계급들에 손에 온전하게 집중하고 예외적인 정권들이 지배하는 이행기를 둬야한다는 거다. 이 정권에서는 지배계급들로부터 이끄는 건 오랜 세월을 걸쳐서 도출한 일반적인 원리들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정책들에 고려이다. 


부분적인 변화들만 그저 일으키는 데 머물지도 않고 지배계급들에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면 오히려 독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합의라는 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힘만이 결정적인 요인으로만 작용한다. 물론 무산계급독재가, 특히 하위중간계급과 농민들에 대해서 별도의 합의나 상당한 양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산계급들로부터 이러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권력기구를 소유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주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양보할 부분이나 고집할 부분들을 독자적으로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들을 지녀야 한다. 


현재에 카우츠키는 무산계급들에 독재들로부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압제'라며 무조건 거부하려 든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나라의 정직한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외양을 띤 착취자들에 독재를 묘사할 때와 한결같이 제시하는 특징들을 무산계급들에 혁명 정권에서 찾아낸다. 


카우츠키는 혁명적 독재라는 갠며을 포기함으로, 무산계급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를 향후 선거 캠페인에서 사회민주당이 과반수를 득표하는 문제로 둔갑한다. 의회주의라는 합법적 허구들에 따른다면, 보통선거권들은 국가 내 모든 계급들을 아우르는 시민들만을 나타내며, 그 결과로 국민 대다수를 사회주의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이론적일 수 있지만 실현되지는 않는 한, 사회주의 소수당은 지배계급들에 다수당들에게 복종해야한다. 의회 다수당이라는 이러한 물신숭배는 무산계급 독재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모조리 거부하는 짓들이다. 이론 상으로도, 사회주의 정책들을 다수당과 소수당이라는 의회주의 신화에 종속한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로부터 전파된 나라들에서는 혁명투쟁도 마찬가지로 할 수 없다. 스위스에서 보통선거권을 토대로 선출된 다수당들은 파업을 금지하는 엄격한 법률들을 통과하거나, 미국에서 형식적으로도 다수들에 의지로 선출된 행정부들이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할 경우, 스위스와 미국에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조직하여 저항할 '권리'들마저 있을까. 대답은 분명하게 '아니요'다. 정치파업들은 보통선거권들로부터 표출된 '국가의지'들에 가할 수 있는 초의회적인 형태들에 압력이다. 분명 카우츠키마저도 새로운 입장의 논리를 끝까지 고집하기는 겸연쩍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보통선거권을 행동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보기에도, 의회선거는 진정한 계급투쟁과 그로 인한 갈등, 반격, 공격, 반란의 역할을 한번도 대신한 적이 없다. 선거는 이러한 투쟁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역할은 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물론 독재 시기에는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엥겔스는 죽기 얼마전인 1891년 무산계급독재만이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카우츠키 자신도 이런 주장들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따라서 무산계급들에 독재에는 순전하게 러시아에 창작물이라는 카우츠키에 주장들은 허황된 거짓말들이다. 그러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수단을 거부할 수는 없다. 투쟁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셀지로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해야 한다. 사회주의혁명에 독재, 곧,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필요하다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독재를 실현해야만 한다. 독재를 논하는 소책자를 쓰는데는 잉크와 종이, 그리고 머릿 속에 몇가지 생각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독재를 실시하고 굳건하게 하려면 지배계급들이 무산계급들에 국가권력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한다. 카우츠키는 눈물 어린 소책자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마저 얻지 않았는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신망을 모두 잃었다고 해서 부르주아의 신망마저 얻을 수 있던가. 노동계급들에 지배를 보장하려면, 지배하는데에 익숙한 지배계급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게 있다. 음모, 태업, 폭동을 동원하거나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서 무산계급독재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배계급들에게 복종을 강요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성직자들은 사후의 형벌로만 사람들을 겁주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는 그런 수단마저 없다. 하지만 성직자들의 지옥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제나 민주국가의 처벌과 함께 종교재판소의 진짜 불이 이를 뒷받침했다. 카우츼가 자신의 후기 저작에서는 성령역할을 맡는 정언명령으로 지배계급들을 굴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과연 경도될 수는 있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데니킨과 콜차크의 영토에다 칸트의 인도주의를 전도하기로 마음먹을 경우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그곳에서라면 반혁명이 반드시 지리멸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6년 동안 전쟁을 겪으며 철저하게 단련되었을테니 말이다. 백위대 병사라면 누구나 일찌감치 깨달은 단순한 진리가 있다. 카우츠키의 책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를 전향시키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나무에다 매다는 게 더 쉽다는 것 말이다. 백위대 병사들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해서든 지옥불에 대해서든 미신적인 두려움이 전혀 없다. 성직자와 교사가 이들과 한패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들은 오로지 볼셰비키의 머리에만 벼락을 내리니 말이다. 여기에서도 러시아 백위대는 독일 등의 백위대와도 닮았다. 이들은 설득당하지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러니 겁을 주거나 짓밟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테러리즘, 곧 단호한 무장 반혁명들에 대한 억압이나 위협적인 조치를 거부한다는 건 노동자계급들의 정치적 지배와 혁명적 독재라는 개념들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거부한다는 건 사회주의혁명을 모두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무덤을 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에게는 사회혁명 이론이 하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들에 대한 자신의 비난을 일반화하려 해봐야 조레스주의와 베른슈타인주의의 편견들을 재탕할 뿐이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썼다. "1789년 일련에 혁명들은 잔인성과 폭력성을 낳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을 없앴으며, 이후의 온 혁명들을 더 온건한 형태로 수행하도록 했다." 294쪽.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물론 1848년 6월이나 코뮌이 진압될 당시 일었던 공포는 잊어야 한다. 가차 없는 테러 수단들로부터 절대왕정이나 봉건제도, 교권주의를 무너뜨린 18세기 대혁명이 실은 사회문제를 더 평화적이고 온건하게 해결할 길을 닦았다고 치자. 하지만 순전하게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를 인정하더라도, 우리를 비난하는 이들이 완전하게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절정에 이른 러시아혁명이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벌어진 바로 그 사건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우리의 선배가 혁명적 테러리즘을 동원한 이유는 우리가 혁명을 온건하게 수행하도록 민주적인 방식들을 제시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도덕주의자 카우츠키는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가 비난해야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선배들이다. 하지만 카우츠키는 이 방향으로는 다소 양보를 하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군국주의를 폭력적인 방법들만으로도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을 도대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염두에 둔 것은 피비린내나는 무장투쟁보다는 프롤레타리아만이 쓸 수 있는 노동자계급들의 무기, 즉 대중파업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차지한 후에 이중 상당수가 또 다시, 18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피 비린내 나는 분노와 복수를 자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는 그때까지도 이룩한 모든 진보들을 송두리째로 부정하는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320쪽) 우리의 가장 훌륭한 이론가들 머릿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전쟁과 일련의 혁명들을 겪고 나서였다. 카우츠키는 로마노프나 호엔촐레른 왕조를 대화로 물리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군국주의는 총파업으로, 즉 팔짱을 낀 평화적 시위로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전 세계마저 이를 논의했지만, 카우츠키는 분명 총파업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를 고집했다. 20년 전 카우츠키 자신의 잡지인 <노이에차이트>에 실린 구절들을 그에게 다시금 들려주고는 싶다. 총파업은 프롤레타리아들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의 적인 국가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파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조차 없다. 적들보다도 프롤레타리아의 역량이 더 빨리 소진되는 탓에 노동자들이 조만간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총파업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순간은 프롤레타리아와 적의 무장세력 간에 충돌, 곧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혁명적 봉기를 준비할 때뿐이다. 혁명계급은 자신을 향한 적의 의지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권력의 문제, 곧 모든 혁명의 근본문제마저 해결할 수조차 없다. 총파업은 양측을 다 동원하며, 반혁명 저항세력의 힘을 가늠해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이다. 하지만 혁명계급이 권력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피의 대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려면 무장폭동을 거쳐서 투쟁 단계에 반드시 들어서야만 한다. 물론 그 대가로는 피로 치러야 하지만. 권력을 쟁취하고 다지기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손에 피를 묻히기도 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에 생사를 건 치열한 투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들이 "그때까지 이룩한 모든 진보를 송두리째 부정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위대한 이론가들의 머리를 바늘구멍 사진기들로 치부하는 꼴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에는 물체가 거꾸로 비치니 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전통이 확립된 선진 문명국에서도 카우츠키의 역사논증이 정당하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의 논증에는 전혀 새로울 것도 없었다. 예전에 수정주의자들이 그보다 더 이론적으로 제시한 바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민주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이 성장하면서 총파업과 봉기, 프롤레타리아독재 없이도 눈에 띄지도 않게 조금씩 사회주의로의 개량주의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이행들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만 애썼다. 카우츠키가 자신들의 활동에서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밝힌 바에 따른다면, 민주주의체제에서도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계급모순들은 접점 더 깊어지고 이 과정은 반드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들의 권력장악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 물론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적 봉기와 프롤레타리아들의 독재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또 생길지를 가늠해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유산계급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는가에 따라서도 희생자 수가 달라지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카우츠키가 자신의 책에서 민주적 교육이 부르주아의 계급 이기주의를 약화시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4년 동안이나 지속된 제국주의전쟁들이 도덕마저 타락하고, 사람들을 폭력 수단과 행위에만 익숙하게 했으며, 부르주아계급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인류를 대량살상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면 이 또한 옳다. 얼핏 보기에는 모두가 옳은 듯하다. 하지만 투쟁은 현실의 실제 상황에서도 벌어진다. 투쟁하는 두 세력은 바그너와 카우츠키의 논쟁에서 생겨난 모조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아니다. 실제 프롤레타리아가 실제 부르주아계급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들 세력은 최후의 제국주의 학살들로부터 탄생했다. 전 세계에도 퍼지는 무자비한 내전들을 바라보면서도 카우츠키는 이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숙련된 전술'들에서 벗어나 생긴 치명적인 결과라고만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운동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도 사회주의운동들은 한번도 크나큰 패배를 겪지는 않았다. 테러를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보장하려는 생각에는 사회주의진영에서도 완전하게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의 지배적인 교의가 되면서부터는 민주주의가 서유럽에도 굳게 뿌리내렸으며, 여기에는 투쟁의 목표이던 민주주의가 정치생활의 든든한 토대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큰 영향들을 미쳤다." (318쪽) 이 '진보의 공식'에서는 마르크스주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조차 없다. 민주적 조건 덕에 새롭고 '더 현명한' 질서로부터 고통 없이도 이행할 수 있다고도 떠들어대는 마르크스주의 선전에는 계급투쟁과 물질적 충돌의 실제 과정들도 빠졌다. 이것은 가장 천박한 자유주의이며 때 아닌 18세기 합리주의다. 다른 점이라고는 콩도르세의 사상 대신 통속화된 <공산당 선언>이 들어앉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무수한 인쇄물로도 남는다. 이 '인문학적인' 과정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카우츠키의 닳아빠진 책상이다. 제2인터내셔널 기간의 노동계급운동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깃발을 든 저항들이 한번도 큰 패배를 겪지 않은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운동,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전체 인류문명이 1914년 8월에 엄청난 패배를 겪지 않았던가. 역사는 그 당시 사회주의 정당의 모든 힘과 가능성들을 기록해두었다. 우리가 듣기로 여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에 선" 마르크스주의였다. 하지만 이들 정당들은 파산하고 말았다. 이들의 업적 중에서는 카우츠키가 영원한 생명마저 불어넣고 싶어하던 특징, 곧 자기적응, '불법적인' 활동 거부, 공개적인 투쟁 거부, 민주주의로부터 고통 없는 혁명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제2인터새녀널의 정당들은 패배를 두려워하고, 대중들이 정면대결을 벌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는 총파업의 논의를 무력화함으로써, 절망적인 패배를 자초했다. 이들은 내전의 폭력적인 속성을 잘 보여주는 전조이자 세계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던 4년 간에 제국주의 학살마저 피하는 일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는 못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불명예스럽게 무너지고, 이를 이끌던 독일사회민주당이 수치스럽게 파산하고, 전 세계적인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광기와 내전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지금, 우리와 반대로 제2인터내셔널의 심오함, 충실함, 평화주의, 엄숙함을 확립하겠다면 눈뿐만 아니라 코와 귀까지도 다 막아야만 할 거다.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들은 아직도 철저하게 청산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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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서문에서 다음으로 같이 말한다. 사람 많은 지역들에 사는 도시사람들로만, 시민들로만, 이뤄진 오래된 '근대사회'라는, 곧 자본주의적인 지배계급들에 사회에서는, 

"경제적 운동에 대한 법칙들을 드러내고자, 책을 쓴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사적으로도 규정된 한 사회에서 생산관계를 발생·발전·쇠퇴로부터 연구하는 건, 

마르크스 경제학설에 대한 내용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에 대한 생산들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대한 분석으로는 먼저 상품에 대해서 처음부터 나누어서 분석한다.



- 물건을 구매할 때는 성분표를 먼저 보는거와도 같다.



가치. 



사용가치: 쓸값.

교환가치: 바꿀값.

잉여가치: 남긴값.


상품이란, 첫째로는 사람들에 욕구를 충족해주는 물건들이다. 

둘째로는 다른 물건들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다. 


팔리는거에 대한 쓸모는 쓸 수 있는 쓸값들로 만들어준다. 바꿀 수 있는 값어치들은 바꿀값들로 또는 단순하게는 그저 값어치들로 무엇보다도 한 갈래들로부터 된 쓸값들은 굳어진 값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바꿀 수도 있는 같은 관계들로 된 비율들이다.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여러 건들에 달하는 바꿔지는 모든 갈래들로 된 쓸값들은, 심지어는 매우 많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되어서 서로 전혀 견주어서 보기도 힘들다. 쓸값들까지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는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특수하게 정해서 굳어진 사람들로 모인 사회에서나 모임들로 맺어진 관계들에서는 체제라는 틀 내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어지는 이들로부터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맺어질까. 이들 사이에서 똑같은 건 일노동으로부터 생산된 물건들이다. 사람들은 만들어진 물건들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여러가지로 된 일노동으로부터도 서로를 견준다. 상품에 대해 만들어진 생산에는 하나씩 여러가지로 많게도 만들어진 물건들로 사회적 분업이라는 형태로 사람들로 따로 모여서 나누어진 생김새로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에는 바꾸어지는 과정으로부터 서로 견주어지는 사람들로 모여서 사회관계들로부터 맺어진 틀이라는 체제다. 그러므로 모든 상품이란 물건들에 두루 안에서 붙었거나 닮 건, 그저 뛰어나서 굳힌 일노동에서가 아니라 그저 추상적인 막연한 생각으로만 두루 이뤄진 곧 흔한 사람들에 일노동으로부터 이뤄지기 때문이다. 수 십억이나 수 백억 건에 교환이라는 바꾸는 행위나 짓들로부터도 증명한다. 그러므로 따로 된 물건들은 그저 사회적 필요라는 사람들로부터 모여서 조르고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한결같은 숱들을 드러내는데 그저 지나지 않는다. 한 물건에 값어치들에 대한 크기는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양이라는 값이나 또는 그에 대한 물건들, 곧 그러한 쓸값들에 대한 만들어지는 생산들을 위해서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고자 하는 일노동이란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모여져서 결정해서는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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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가운데.



"인간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교환에 의해서 가치로부터 서로 견줄 대마다, 바로 그 행위들로부터, 생산물에 투여된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을 인간에 대한 노동으로서 또한 서로 견준다. 그들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자본>에서 가치란, 전에 한 경제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두 명에 사람들 간에 관계다. 다만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였어야 했다. 그건 물질적 외피 아래에서 감추어져 있는 관계라고, 특정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유형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인 생산관계들에 체제라는 견지에서는, 또는 수 백만, 수 천만 건이나 반복되는 대량에 교환된 현상들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내는 관계라는 체제로부터 견지에서 볼 때만 가치라는 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치로서는 모든 상품들은 응결된 노동시간들에 일정한 양들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 비판>. 그러므로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에 이중적 성격을 상세하게 분석한 후에야. 마르크스는 가치 형태와 화폐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주요한 과제들은 가치에 대한 화폐 형태들에 기원을 연구하고, 즉 개별적·우연적인 교환 행위들, 한 상품에 대한 일정량에서 다른 상품에 대한 일정량으로 교환되는 '초보적이거나 또는 '우연적인 가치 형태'들로 시작해서는, 다수에 서로 다른 상품들로부터 하나에 동일한 특정한 상품이나 교환되는 일반적인 가치 형태를 거쳐서, 마지막으로는 금이라는 이 특정한 상품으로, 즉 일반적인 등가물로 되는 가치에 대한 화폐 형태들로 끝나는 교환에서 발전들에 대한 역사적인 과정들을 연구한다. 교환이나 상품들에 생산이나 발전에 최고 산물로 화폐는 모든 개별 노동들에 대한 사회적 성격들을, 시장들로부터 결합된 개개에 생산자 간에 사회적 연관을 모호하게 하고 은폐한다. 마를크스는 화폐에 각종 기능을 매우 자세하게 분석한다. 여기에서 특히나 일반적으로는 <자본>에 앞부분 여러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목해야 할 건 추상적으로, 때로는 순전하게 연역적으로 보이던 서술 형식들로부터 실제로는 교환되거나 상품에 대한 생산발전에 역사에서도 거대하게 축적된 사실자료들을 다루고 있따는 사실이다. 


<자본>: 화폐에 존재는 상품 교환에 일정한 단계를 전제로 한다. 화폐에 대한 특수한 기능들

그러니까 단순한 상품등가물이나, 또는 유통수단, 또는 지불수단, 축장화폐 및 세계화폐들은 여러가지 기능들로부터 각각에 서로 다른 범위와 상대적인 중요성에 따라서 사회적 생산들에 정의 및 각기 다른 단계들을 표시한다. 


잉여가치.


상품 생산에서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한다. 상품유통에 대한 정식들은 다음으로 같다. C(상품) - M(화폐) - C(상품)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에 대한 일반적인 정식들은 다음으로 같다. M(화폐) - C(상품) - M(화폐), 즉 이윤을 덧붙여서 판매하기 위해서는 구매하는 것이다. 유통에 투입된 화폐의 최초 가치에 대한 이 증가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부르고 있다. 자본주의적 유통에서 화폐가 이와 같이 '증가'하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증가'가 바로 화폐를 자본으로, 즉 특수하며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관계로서의 자본으로 전화된다. 잉여가치는 상품유통에서는 발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품유통은 등가물의 교환만을 인식할 뿐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또한 가격인상에서도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매자와 판매자 쌍방의 손실과 이득은 상쇄되기 때문인데, 알다시피 여기서는 대량적·평균적·사회적 현상을 논하는 것이지 개별적 사례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잉여가치를 획득하려면 화폐 소유자는 "그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상품", 즉 그것의 소비과정이 동시에 가치 창조의 과정이 되는 상품을 "시장에서 발견해야만 한다." <자본>. 그러한 상품이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노동력의 소비가 노동이고, 노동은 가치를 창조한다. 화폐 소유자는 노동력을 그것의 가치대로 구매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즉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일용하는 생활재료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화폐 소유자가 노동력을 구매한 이상, 그는 그것을 소비할 권리, 즉 하루 동안, 말하자면 12시간 동안 그것을 가동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6시간 필요노동시간의 노동 속에서 자신의 생계를 보전하는 생산물을 생산하고, 나머지 6시간 잉여노동시간의 노동으로는 자본가에게서 지불을 받지 않는 잉여생산물, 즉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생산과정의 측면에서 볼 때는 자본의 두 부분, 즉 불변자본 부분과 가변자본 부분을 구분해야한다. 불변자본은 기계, 노동용구, 원료 등이라는 생산수단에 지출되는 부분으로, 그 가치가 변화 없이 그대로 한 번에 또는 일부분씩 완성된 생산물들에 이전된다. 가변자본은 노동에 대해 지출되는 부분이다. 이 가변자본의 가치는 불변 상태로 있지도 않고,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창조함에 따라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자본의 노동력 착취도를 표현하려면 먼저 잉여가치를 투하한 자본 전체와 비교해서는 안 되고, 오직 가변자본과 비교해야만 한다. 그리해서, 바로 앞에 사례를 가지고 말해본다면, 잉여가치율,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부르고 있다. 6:6, 100%로 된다. 


자본이 발생하는 데는 두 가지 역사적 전제가 있다. 첫째, 상품생산에 일반에서 비교적 높은 단계에서도 각 개인의 수중에 일정량의 화폐가 축적되어야 한다. 둘째,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노동자의 존재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데 있어 일체의 제약과 제한에서 자유롭고, 토지 및 생산수단 일반에서 자유로운 노동자, 즉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생존할 길이 없는 '무산계급'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잉여가치를 늘리는 데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노동시간의 연장 '절대적 잉여가치'와 필요노동시간에 단축 '상대적 잉여가치'는 그것이다. 전자의 방법들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나, 14-15세기에 노동시간 연장 및 19세기에 공장법으로부터 그에 대한 단축으로 국가권력의 개입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그림들을 제시한다. <자본> 출간 이후에는 세계 모든 문명국들의 노동계급들에 운동에 대한 역사에도 이 그림을 더욱 완결되게 하는 무수하게 새로운 사실들을 공급한다. 


마르크스는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자본주의가 노동생산성을 증대해온 역사상으로도 세 단계를 연구했다. 1. 단순협엽, 2. 분업이나 매뉴팩처, 3. 기계제 대공업.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특징으로부터 여기서 얼마나 깊숙하게 파헤쳐냈는지를, 러시아에서 이른바 시장 생산 수공에 대한 연구로부터 위에 세 단계 중에서 1,2 단계를 예증해주는 풍부한 자료들로부터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혁명적인 효과는, 1867년 마르크스로부터 서술한 바로 그 뒤로는 반세기 동안에 많은 러시아, 일본 등에서 '신규' 국가들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났다. 



나아가서 마르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참신한 건 자본축적에 대한 분석이다. 즉 잉여가치 일부의 자본으로의 전화, 그리고 그 잉여가치 일부를 자본가들의 개인적 필요나 기분을 충족하고자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생산을 위해 사용한다는 걸 분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으로 전화되는 잉여가치는 모두 가변자본이 된다고 가정한 종래의 모든 고전경제학자들 애덤 스미스 이래의 오류를 밝혀냈다. 실은 그것은 자본총액에서 생산수단+가변자본으로 나누어진다. 가변자본 부분들에 비해서 불변자본 부분들은 좀 더 급속하게 증대하는 건 자본주의에서 발전 및 그것에 대한 사회주의로에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자본 축적은 기계에 의한 노동자의 구축을 촉진하게 하고, 그리고 한쪽 극단에서는 부를, 다른 극단에서는 빈곤을 생산함으로써 '노동예비군'이라고 불리는, 즉 노동자의 상대적 과잉들을 낳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과잉인구'는 극히 다종다양한 형태를 띠고, 극단적으로 빠른 속도로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자본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생산수단에 형태로도 자본축적 및 신용과도 결합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나라들에서 주기적으로 처음에는 평균 십 년 만에, 나중에는 더 길고 덜 확정적인 간격으로 일어나는 과잉생산 공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 축적과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는 즉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 강제 분리, 토지로부터 농민추방, 공유지들의 강탈이나 식민지, 국채, 보호관세 제도 등은 구별해야 한다. 이 '본원적 축적'은 한쪽 끝에서는 '자유로운' 무산계급들을, 다른 쪽 끝에서는 화폐 소유자, 즉 자본가들을 창출해낸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마르크스는 다음으로 같은 유명한 말로 묘사했다.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은 가장 무자비한 만행에 의해서, 그리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야비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격정들의 충동 속에서 수행되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 조건과의 뒤섞인 '융합'에 입각한 사적소유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다 타인 노동이라는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들어선다. 이제 수탈당한 자는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으로부터, 즉 자본의 집중에 의해서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들을 파멸한다. 이러한 집중, 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도 병행해서 여타의 발전도 더욱 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즉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고동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형태로 전화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적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 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그로 인한 자본주의적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이 더욱 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 과정의 모든 이익들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끊임없이도 줄어들지만, 빈곤과 억압과 예속과 타락과 착취의 정도는 더욱 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동자계급 그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서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되는 계급인의 반항도 또한 증대해간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서 이 독점밑에서 번창해온 그 생산방식의 질곡이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자본>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또 한 가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참석한 것은 <자본> 2권에서는 제시된 사회 전체의 자본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에서도 마르크스는 개별 현상이 아니라 대량적인 현상을, 경제의 단편이 아니라 그 경제를 총체로서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는 상술한 바와 같은 고전학파의 오류를 정정함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생산을 2대 부문으로, 즉 1) 생산수단의 생산과 2) 소비재료의 생산으로 구분하고, 수학상의 용례를 통해 사회 전체의 자본의 유통을 상세하게 종래의 규모의 단순재생산이라는 재생산의 경우와 확대재생산이라는 축적의 경우 모두 검토하고 있다. <자본> 3권에서는 평균이윤율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가치법칙을 기초로 해서 해결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분석을 하면서, 속류 경제학과 현대의 '한계호용학설'이 빈번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개별적 사례 또는 경쟁이라는 외적·피상적 측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대량적 경제 현상으로부터, 전체 경제로부터 출발했는 것은 경제학 상의 일대 전진이었다. 마르크스는 먼저 잉여가치의 기원을 분석하고, 이어서 잉여가치의 이윤, 이자, 지대로의 분할 문제를 고찰한다. 이윤이란 기업에 투하된 자본 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유기적 구성이 높은' 곧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우위 정도가 사회적 평균보다 높은 자본은 평균보다 낮은 이윤율을 가져온다. '유기적 구성이 낮은' 자본은 평균보다 높은 이윤율을 가져온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과, 한 생산부문으로부터 다른 생산부문으로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그 두 경우 모두에게 이윤율을 평균이윤율 수준으로 낮춰놓을 것이다. 주어진 사회의 모든 상품가치의 총액은 상품가격의 총액과 일치한다. 그러나 개별 기업 및 개별 생산부문에서 상품은 경쟁의 영향을 받아, 그 가치대로 판매되지 않고, 지출된 자본+평균이윤의 합과 동일한 액수의 생산가격에 판매된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가치들로부터 가격의 괴리, 이윤의 평균화라는, 널리 알려져 있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가치법칙의 기초 위에서 완전하게 설명했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 총액이 가격 총액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회적인 가치가 다양한  개별적인 가격으로 표시되는 것은 단순한 직접적 과정이 아니라 대단하게 복잡한 과정들이다. 시장에 의해서만 상호결합되는 분산된 상품생산자들에 사회에서는 합법칙성들이, 어떤 때는 이 방향으로, 또 어떤 때는 저 방향으로 개개의 편차를 서로 상쇄한 평균적·사회적·대량적 합법칙성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 건 지극하게 당연하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가변자본들에 비해 불변자본에서 더 급속하게 증대하는 걸 의미한다. 잉여가치는 가변자본만의 기능이라고 할 때, 이윤율, 곧 잉여가치의 비율로서, 이 잉여가치율은 가변자본 부분에 대해서만의 비율이 아니라 전체 자본에 대한 비율이다. 이 저하하는 경향을 띠는 건 명백해진다. 마르크스는 이 경향과, 이걸 은폐하거나 이것에 반작용하는 많은 사정들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우리는 고리대자본과 상업자본과 화폐자본에 할애된 <자본> 3권에 극히 흥미로운 장들을 건너뛰어서, 매우 중요한 장인 지대론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토지의 면적에 제한이 있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그 토지가 모두 개개의 사적소유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으므로 농업 생산물의 생산가격은 중위 수준의 토지에서의 생산비가 아니라 가장 열등한 토지의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하는 조건은 중위 수준의 조건이 아닌 최악의 조건 아래서 농산물 생산가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가격과 양질의 토지 또는 보다 나은 조건들에서의 생산가격 간의 차액에서 차액지대가 생겨난다. 마르크스는 이 차액지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어떻게 그것이 개개인들에 토지의 비옥도 차이에서도, 또 토지에 투하된 자본 양의 차이에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줌으로 해서, 차액지대가 보다 양질의 토지로부터 계속해서 보다 열등한 토지로 옮겨가는 경우에만 생긴다고 본 리카도의 오류를 완전하게 폭로했다 <잉여가치학설사>도 보라. 여기에서는 로트베르투스에 대한 비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는 반대로 역의 이행이 있을 수 있는데, 즉 어떤 한 등급의 토지가 다른 등급의 토지로 바뀌는 농업 기술의 진보, 도시의 성장 등에 일들도 있을 수 있다. 그리해서 저 악명 높은 '수확 체감의 법칙'들은 자본주의의 결함과 한계와 모순을 자연에 전가해서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더 나아가서, 공업 및 일반으로는 국민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이윤이 균등해지기 위해서는 경쟁의 완전한 자유와 한 생산부문으로부터 다른 생산부문으로의 자본 이동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토지의 사적소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이동에 장애가 되는 독점을 낳는다. 이 독점의 결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비교적 낮고, 그로 인해서 개별적으로는 비굑적 높은 이윤율을 특징으로 하는 농업 생산물은 이윤율 평균화라는 아주 자유로운 과정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토지 소유자는, 독점자로서 가격을 평균 이상으로 유지하기를 얻는다. 그리해서 이 독점가격들은 절대지대를 낳는다. 차액지대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폐지할 수 없지만, 절대지대는 이를티면 토지 국유화에 의해서만, 즉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함으로만 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토지를 국가로 이전하는 건 사적소유자에 독점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농업에서 경쟁에 대한 자유로부터 일관되고 완전하게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될 거다. 바로 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지배계급 급진파들에게 마르크스로부터 지적한 바와 같이 토지 국유화라는 이 진보적인 지배계급들에 요구들을 거듭해서 제기해온 거다. 그러나 토지 국유화는 오늘날에도 특히나 중요하고 민감한 독점, 곧 생산수단 일반에 대해서만 독점에 미치는 영향들과 너무나 근접해 있기 때문에 대다수에 지배계급을 겁먹게 하는 요구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평균이윤율 및 절대지대에 대한 자신에 이론들을 극히 평이하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해설한 내용들은 1862년 8월 2일자로 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에 있다. <왕복서한집> 3권, 77-78쪽을 보라. 또 1862년 8월 9일자 편지, 같은 책 86-87쪽도 보라. 


지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지대 변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분석은 노동지대 농민이 영주의 토지에서 노동해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우

가 어떻게 생산물지대 또는 현물지대라는 농민이 자신의 토지에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경제 외적 강제' 때문에 지주에게 넘겨주는 경우로 전화되고, 그 다음에는 화폐지대 앞 선 현물지대가 상품생산의 발전의 결과로 화폐 납부로 전환된 것. 구 러시아의 '면역지대'로, 그리고 끝으로는 자본주의적 지대 농민 대신에 농업 기업가가 나타나 임노동을 사용하여 토지 경작을 하는 경우로 전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발생'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진화에 관해 마르크스가 표현한 일련의 시오한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 특히 중요한 사상이다. 현물지대의 화폐지대로의 전화는 나아가, 화폐를 받고 고용되는 무산 일용노동자 계급의 형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급의 형성이 화폐지대로의 전화에 선행하기까지 한다. 이 새로운 계급이 아직은 산발적으로밖에 등장하지는 않는 그 발생기의 경우, 지대 지불 의무를 지는 농민 내에서도 비교적 번영하는 층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신들의 농사를 위해 농업 임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습이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이는 봉건시대에도 비교적 부유한 예농이 그들 자신에 더해서 다시 예농을 고용하고 있던 것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일정 정도의 부를 축적해서 스스로 미래의 자본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점차 얻게 된다. 구래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토지 소유자 자신들이 바로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양성소를 탄생시키는 주역인데, 이러한 차지농의 발전들은 농촌 밖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들의 일반적 발전들에 의해서 제약된다. 자본 3권. 


"농촌에 인구 일부의 수탈과 추방들은 산업자본들을 위해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생활수단 및 노동재료들을 분리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들을 창조한다." 자본 1권. 한편 농촌 인구들의 빈곤화와 파산은 자본들을 위한 노동예비군 창출에도 일익을 담당한다. 다라서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농촌인구의 일부는 도시 무산게급들 또는 매뉴팩처 곧 비농업 무산계급들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중에 있다. 그리해서 상대적 과잉인구들의 이 원천들은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다. 따라서 농업노동자는 임금이 최저한까지 억눌리며, 항상 한 발은 이미 궁민 상태의 늪에 담그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 1권.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사적소유는 소생산의 기초이며, 소생산의 번영, 소생산의 고전적 형태로의 발전들을 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생산들은 생산 및 사회의 협소하고 원시적인 틀 안에서만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농민들의 착취로는 


공업 무산계급들에 대한 착취와 단지 형태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그러나 착취자는 같다. 곧 자본이다. 개개의 자본가는 저당과 고리대로부터 개개의 농민들을 착취한다. 자본가계급들은 국가조세로부터 농민계급들을 착취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이재 농민들의 분할지는, 자본가가 경지에서 이윤과 이자와 지대를 끌어내면서, 토지 경작자의 임금을 어떻게 염출해낼 것인가 궁리해야 하는 일들을 경작자 자신에게 떠넘겨버릴 수 있게 해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브뤼메르 18일>. 대개 농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임금의 일부분들까지도 내다 바치고, "아일랜드 소작인들에 수준"으로 영락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적소유자라는 구실 아래로 일어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그렇다면 "소농 분할지 소유가 지배적인 나라들에서는 곡물가격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나라들에서보다 더 낮은 원인들 중 하나"는 무엇인가. <자본> 3권. 이건 농민들이 사회에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자신의 잉여생산물들에 일부분들을 무상으로 넘겨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곡물 및 기타 농업 생산물들에 낮은 가격들은 생산자들의 빈궁의 결과이지, 결코 그들에 노동생산성에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3권. 소생산이라는 정상적 형태인 소토지 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퇴하하고 파산하며 멸망한다. 



분할지 소유는 그 본성상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나 노동의 사회적 형태들과 자본의 사회적 집적과 대규모의 목축과 과학의 누진적 응용들을 배제한다. 고리대와 조세제도는 어디서나 분할지 소유를 빈곤화하게 마련이다. 토지 구입들에 들어간 자본 지출들은 그만큼 자본들을 경작으로부터 회수한다. 생산수단의 끝없는 파편화와 생산자 자신의 고립화로. 



협동조합, 곧 소농민의 연합은 극히 진보적인 지배계급적 역할을 하면서도, 이러한 경향들을 약화할 뿐, 없애지는 못한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건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부농에게는 커다락 이익들을 주지만 빈농대중들에게느 매우 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익밖에는 주지 않는다. 결국 협동조합 자신들에게 임노동에 대한 착취자가 된다. 



"인간 에너지의 막대한 낭비, 생산조건의 누진적인 악화,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격등귀는 분할지 소유라는 필연적 법칙이다. <자본> 3권. 공업에서처럼 농업에서도 자본주의가 생산과정을 개조하는 것은 오직 "생산자의 순교"라는 대가를 치른 다음이다. 



집적으로 인해 저항력이 커지는 도시노동자와는 달리, 농업노동자는 비교적 광범위한 지역들에 퍼져 있어서 그들의 저항력은 약화된다. 도시 공업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 농업에서는 노동의 생산성의 증대와 그 유동화의 증진들이 노동력 자체가 황폐해지고 쇠약해지는 대가로 얻어진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농업에서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 약탈 기술만이 아니라, 토지 약탈 기술에서의 진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하게하고 비로소 기술을 발전하고, 다양한 생산과정들을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까지도 결합한다. <자본> 3권.



<포어베르츠>와 빈에 <노동자신문>으로 보내는 편지.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며칠 전에 <포에베르츠>는 전쟁과 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짧은 기사를 한 편 게재했습니다. 기사에서 나는 취리히에서 읽었던 신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대한 전적으로 그릇된 인상들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차르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만 분명 글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들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국만이 아니라 자국에 배외주의나 애국주의에도 반대해서 가차 없는 투쟁들을 수행한다는 건 모든 나라에서도 사회주의자들에 의무임을 확신하는 사람으로서도 나는 차르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해왔고, 맥락으로부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도 발언합니다. 그러나 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취한 입장에는 반대해서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붕괴를 말한 건 아무런 언급마저 하지도 않는다면, 내 논지에 의미는 완전하게 왜곡될 소지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내 보고에서 10분에 9만으로 비판으로 다룹니다. 내게 밝힌 누락 부분들로부터 <포어베르츠>에 또는 게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민주주의적 인사를 보내며.



여기서 말하는 레닌에 대한 보고에 기사로는 1914년 11월 10일자로 <포어베르츠>라는 <전진> 308호와 11월 7일자로 된 빈에 <노동자신문> 309호에도 게재됐었다. 1914년 11월 22일, <포어베르츠> 편집국에서는 레닌에 대한 편지에 답하는 짧은 글들을 게재해서, 레닌에 보고들로부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취한 입장들을 비판했고,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된 일련에 붕괴들에 대한 평가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 원서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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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Left Wing Communism - As Infantie Disorder."

부제: 좌익공산주의 초보적인 단계.



6. 과연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해야만 할 건가.



독일에서도 "좌익들"은 자신들에게 관계하는 한에서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으로 대답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배외주의적, 타협적, 반혁명적, 칼 레긴 같은 분류에 황색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하는 건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용서할 수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선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노동조합들에 대한 아주 "확고하면서도", 아주 어리석게도 내뱉은 칼 호르너에 열변들이나 분노에 대한 외침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좌익들'도 얼마나 굳건하게 그런 전술들에 대한 혁명주의들에 대해 확신하고 있든지, 그들에 전술에는 사실로도 근본적으로도 오류일 뿐이고 공허한 문구들 외에는 무엇도 든 게 없다. 이 사실들을 더 분명하게 하고자 나는 이 작은 책자에서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역사나 오늘날에 전술에서도 일반적으로도 흔하게 적용해볼 수 있도록 서유럽에 대한 목적으로부터 유효하고 전반적인 구도에 따라서도 우리 자신들에 경험으로부터 먼저 말해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에서 지도자들·당·계급·대중들에 관계나 노동조합들에 대한 무산계급이나 무산계급들에 당 독재에 대한 태도는 다음으로 같다. 곧, 독재는 소비에트들로부터 조직된 무산계급들로부터 수행할 수 있고 무산계급들은 볼셰비키 공산당에 지도를 받는다. 1920년 4월에 당 대회 자료에 따르면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당원들은 총 61,001,000명이다. 당원 수는 1917년에 10월 혁명 이전이나 이후로나 변화는 아주 많았다. 심지어는 1918년이나 1919년조차도 현재보다 훨씬 적었음에도 우리는 당마저 무척이나 커지는 걸 오히려 우려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땅하게도 총살해야 할 출세주의자들이나 협잡꾼들은 집권당에 대열에도 합류하고자 했고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건 마찬가지지만 피할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에게만 당에 문을 활짝 열었고 마지막 시기 당시에 제국군 사령관이던 유데니치는 가까운 베르스타 내에서 페트로그라드 앞에 있었고 1919년 겨울에 지휘관이던 데니킨은 350베르스타로 떨어진 오룔에 있었다. 곧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풍전등화라는 위험에 빠졌고, 투기꾼들, 출세주의자들, 협잡꾼들이나 대체로는 믿을 수 없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합류하면서부터 출세에 길을 달리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교수대와 고문을 더 기대해야 할 때였다. 오히려 당원들은 천 명당 한 명 꼴로 된 대의원들을 기반으로만 열렸다. 일년마다 개최되는 당대회에서는 선출된 19명으로 이뤄진 중앙위원회들에 지도를 받고서, 모스크바에 있던 일상적인 업무들은 바로 "조직국"이나 "정치국"이라는 훨씬 작은 기구들에서 수행했는데 이 기구들에서는 중앙위원회로부터 위원 5명씩으로 이루어졌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쳐서 마침내 선출됐다. 따라서 이를 두고서 사람들도 그저 보기에는 "과두제" 자체로만 보일거다. 우리들에 공화국에서는 무슨 기구든지 당 중앙위원회에 지도 없이는 무엇도 정치적인 문제들이나 조직적인 문제들 마저도 절대로 쉽사리 결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 활동에 있어서도 당은 직접적으로도 노동조합들에만 의존했는데 1920년 4월 대회들에 지난 자료들에 따른다면, 이전에 노동조합들은 현재보다도 400만 이상으로 조합원들을 확보해왔고, 형식적으로는 당파적이지도 아니했다. 실제로는, 기본적으로도 전국적인 총 노동조합중앙회나 전국노동조합중앙평의회와 같은 총노동조합국들에 모든 지도기구들까지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뤄졌었고 당들에 모든 지시들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형식적으로는 공산주의적이지도 아니할 수 있어서 보다 더 침착했고 비교적 넓으면서도 매우 강력한 무산계급 기구들도 갖고 있었다. 이 기구들로부터 당에서는 계급 및 대중들로부터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었고 이 기구들로부터 당 지도 아래로부터 계급독재들마저도 수행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건설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건설에서도 노동조합들로부터 유연한 접촉마저 없이는, 노동조합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들마저 없이는, 노동조합들에 헌신적인 노력이라도 없이는, 우리는 당연하게도 2년 반도 안 됐거나 2달 반마저도 나라나 지역들을 직접 한 번이라도 다스려보거나 독재를 해볼 수는 없었을거다. 물론 이런 매우 긴밀한 접촉들에는 실제로 선전이나 선동들로 된 형태들에서도 그리고 지도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작용들을 이끌 수 있는 전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들에 입김들로부터 시의적절하게 매번 토의로 이뤄진 형태들로부터 매우 복잡하고 많은 작업들을 요구했다. 또한 이 접촉들로부터 멘셰비키들에 맞선 단호한 투쟁들도 뜻했는데, 이들 멘셰비키들은 여태껏 거느리고 있던 자신들에 얼마 안되는 추종자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를 사상적으로도 수호하기를 노동조합들은 그저 "독립적"이라 불리는 무산계급들에 국가권력으로부터 꼭 "독립!"이라고 부르면서 무산계급들에 뿌리 깊던 본보기들 마저도 거부하려 들거나 설교하는 등등에 이르는 온갖 갈래들로부터 반혁명적인 음모들이라는 잔꾀들마저도 역시나 가르치고는 말았다.


우리는 노동조합들로부터 "대중들"에 대한 접촉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혁명과정에서도 실천하는 활동들로부터 당파적이지 아니하고 같은 때에는 노동자·농민·협의회들 같은 제도들도 만들어냈으며, 우리는 대중들에 분위기마저도 잘 살펴보고, 그들에게는 최대한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으며, 그들에 요구들도 충족해줬고,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국가에 대한 직책들에도 발탁해주거나 맡기는 등등으로부터 갖은 수단들을 다해서도 이 제도들을 지원하고자, 발전하고자 했고, 확대하고자 애썼다. 국가에 대한 제한들을 담당하는 인민위원회에서는 "노동자·농민·감찰원"으로 바꾸는 근래에 법령들 중에서는 하나로 이런 갈래로는 당파적이지 아니한 협의회들로부터 여러가지에 갈래들에 법에 대한 개정 등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가감독위원회들을 선출하는 권한들도 부여했었다.


물론 게다가 모든 당 활동들은 작업에 관계없이도 노동대중들을 포괄하고 있는 소비에트들로부터 수행하고 있다. 소비에트군대회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로부터도 지배계급들에 세계에서도 어느 매우 훌륭한 민주주의에 대한 공화국조차도 이와 비슷한 건 전혀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농촌지역들에서 갖가지 직책들에 끊임없이 파견되어보면서 이들 대회들로부터는 당들도 할 수 있는 한 주의깊게 지켜보고자 애썼지만 농민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지도적인 역할들도 수행해왔고, 도시·무산계급들에 독재로부터, 곧 지배계급들에 착취적인 무리들인 수입도 많기만 하던 부농들에게도 체계적인 투쟁들마저도 수행할 수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위로부터", 곧 독재들에 대한 실질적인 수행으로부터 본 무산계급들에 국권들로는 그저 일반적인 기구들 가운데에는 일부분일뿐이다. 바라지만, 독자들은 이 기구들을 25년 동안이나 이해해왔고,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그만 지하조직들로부터 발전해오던 걸 보아온 러시아에 볼셰비키들로부터 "위로부터"인가 아니면 "밑으로부터"인가, 지도자들에 독재들인가 아니면 대중들에 독재들인가 하는 따위에 이 모든 우스운 지껄임들은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기 짝도 없는 허튼 소리로서, 곧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 중 어느 쪽으로 그에게 더 쓸모 있겠느냐"하고서 의논하기만 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이제서야 이해해야만한다.    


우리는 독일 좌익들에 거만하고 매우 박식하고 겁나게 혁명적인 지껄임들로부터, 곧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들에서도 활동할 수도 없고, 활동해서도 안되고, 그러한 활동들을 거부해도 좋고, 노동조합들로부터 탈퇴해서, 썩 밝게는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은 매우 젊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발명한 참신하고 순수한 "노동자동맹"을 만드는 일도 필요하다는 따위에 지껄임들도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고 허튼 소리들로 밖에는 들리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수 세기에 걸쳐서 이뤄져서 내려 온 노동자들 사이에서 낡은 직업들이나, 수공업들에서 구분할 수 있는 유산들을 사회주의에게 필수적으로도 물려준다. 다른 쪽으로는 자본주의는 노동조합들도 물려줬는데 이러한 노동조합들은 직업에 대한 이기적인 성격을 좀 더 벗어나서, 동업조합, 수공업, 직업들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 대한 전반들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폭 넓은 산업연합들로부터 해를 거듭할수록 아주 느리게 발전할 수 있고 또 발전하고, 나아가선 이들에 산업연합들로부터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동에 대한 세분화들을 제거하고, 모든 쪽에서 발전하고 모든 쪽에서 훈련된 사람들, 곧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게하고, 또 하게할거다. 공산주의는 이 목적으로부터 전진하고 있고 또 전진할 수밖에는 없고, 그리고 목적들에도 도달하겠지만, 기나긴 세월로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하게 발달할 수 있고 완전하게 확립할 수 있고 안정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전개할 수도 있는 성숙한 공산주의에 대한 미래에 결과들은 현재들로부터 실제로 내다보려고 하는 건 고등수학들을 그저 네살짜리 먹은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짓일 뿐이다.  


우리는 추상적이거나 그저 남다르게 마련한 인간재료로써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들에게 물려준 인간재료로써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말할 거도 없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과제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토론해 볼 만큼 가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초기단계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을 분리하거나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도 계급적으로 단결할 수 있었던 건 노동계급들에게는 큰 전진이었다. 무산계급들에 계급적 단결들에 대한 최고형태로는 혁명적 무산계급 당이라는 이 당은 지도자들을 계급 및 대중들에게 하나로는 더 이상으로 나누지 못하도록 전체로도 결합할 줄 알 때까지는 아직은 혁명적 무산계급 당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혁명적 무산계급 당에서 막 성장하고 있을 때는 노동조합들에게 알맞은 반동적인 모습들, 알맞게 치우친 관념, 알맞게 그저 머무는 상태로만 피할 수 없도록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무산계급들에게는 노동조합들로부터 맺어지지 않고서는, 노동계급에 당이나 노동조합에 상호작용들로부터 관계하지 않고서는 세계에 어느 곳에서도 발전하지는 못했고 발전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무산계급들에 정치권력에 쟁취는 계급으로서도 무산계급들에게 있어서도 거대한 전진이다. 그러므로 당은 전통적인 옛 방식뿐만 아니라 더욱 더 새로운 방식으로도, 노동조합들을 교육하고 지도해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당에서는 잊지 말아야 노동조합들은 매우 중요한 "공산주의·교육"이자 무산계급 독재 수행들을 위한 예비적인 학교로서도 한 나라에 개인적인 직종들 말고도 전 경제생활에 대한 운영을 노동계급들에게, 다음에는 모든 노동인민들에게 점진적으로도 넘겨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조직들이고,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렇게 남으리라는 사실이다.    


곧바로 말한 뜻에서는 노동조합들에 알맞은 "반동성격"에는 무산계급들에 독재 아래에서는 피하지도 못한다. 이걸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건 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지를 이행하는 기본조건들마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뜻한다. 이러한 "반동적인 성격"들을 두려워한다거나, 그 마저도 회피하려들거나 뛰어넘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도 없을 뿐이고 어리석은 짓들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나 농민들에게는 매우 뒤떨어진 계층들이나 대중들을 끝까지 훈련하고, 교육하고, 계몽해서라도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무산계급들에게 앞장 선 전위들에 대한 작용들마저도 두려워한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쪽으로는 편협하게 치우친 직업들에 대한 이기주의적인 관념을 가졌거나 동업·조합적이거나 노동조합적인 편견들을 지닌 활동가들은 한 사람도 없을 때까지는 무산게급들에 독재에 대한 성취를 미룬다는 건 더욱 더 중대한 오류이다. 정치가들에 기술이나 스스로에 대한 과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올바른 이해는 무산계급들에 전위로부터, 충분하게 성취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전위로부터, 권력을 충분하게 장악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다음날에도 노동계급이나 아직은 무산계급들은 아닌 노동대중들에 충분하고도 넓은 계층들로부터도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이후에도 훨씬 더 넓게 노동인민대중들을 교육할 수 있고, 훈련할 수 있고, 이끌어들이면서도 자신들에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게 된 조건들이나 계기들로부터 올바르게 헤아리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어디 계속해보자. 러시아보다 선진적인 국가들에서는 노동조합들에 알맞은 반동성격들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크게 나타났고 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멘셰비키들은 바로 한 쪽으로 치우친 동업조합이거나, 직업들에 대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 덕분에 노동조합들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극히 일부로 노동조합들에서는 아직도 지지를 얻는다. 서유럽에서 멘셰비키들은 노동조합들에서 훨씬 견고한 "발판들을 획득해왔다." 서유럽에서는 노동조합적이고, 편협하게 치우치고, 이기적이고, 심지어는 철면피에다, 탐욕스럽고, 속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분위기들마저 가진,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수되고 타락한 "노동귀족" 층위들은 러시아에서 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한 논쟁에 여지마저도 없는 사실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사무엘 곰퍼스, 레옹 주오, 아서 핸더슨, 메르하임스, 칼 레긴 일당들 같은 회사·주주들에 맞서는 투쟁들은 완전하게 같은 성격으로 사회적, 정치적 유형에서도 우리 멘셰비키들에 대한 투쟁들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우리에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투쟁에서는 바로잡을 수도 없는 모든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해서 노동조합들로부터 쫓아낼 수 있을 때까지도 가차없어야 하고 또 필수적으로도 이뤄져야만 한다. 


투쟁들은 알맞은 단계에도 도달할 때까지는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고 또한 함부로 정치권력을 잡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알맞은 단계"에서는 나라마다도 주어진 상황마다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각 개별국가들에 사려깊고, 경험있고, 구분할 수 있는 무산계급들에 정치지도자들만이 올바르게 측정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25일에 무산계급 혁명이 일어난 며칠 후로 1917년 11월에 제헌의회 선거들로부터 이러한 투쟁들에 성공을 가늠할 수 있던 기준들에 일부였다. 이 선거에서는 멘셰비키들은 완전하게 패배했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부터 얻은 9,000,000표에 대해서 700,000표에다 자카프카지예에 표까지 더하면 1,400,000표를 더 얻었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제7·8호에 실린 내 논설인 <제헌의회 선거와 무산계급 독재>를 살펴보라. 우리는 노동자 대중들에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동귀족"들에 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계급들을 최대한으로 많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외주의적 지도자들에 대한 투쟁마저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매우 쉬우면서도, 또 매우 자명한 진리마저도 망각한다는 건 어리석을 짓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상층부에 지도부에서는 '반동적인 성격', '반혁명적인 성격'들을 빌미로, "노동조합에서 탈퇴하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한다." "새롭게 고안해놓은 형태로 노동자 조직들을 만들자."고 결론짓는 독일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바로 이런 어리석은 짓들마저도 저지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게 바칠 수 있는 매우 큰 봉사와 마찬가지로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회주의적, 사회배외주의적, 카우츠키파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맨셰비키들은 늘 맨셰비키들에 대해서 말해 온 바 대로 "노동운동에서 지배계급들에 앞잡이."들이거나 미국에 다니엘 드 레온 추종자들로부터 그저 멋만 들어지고 아주 참된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가 계급들에 노동 관리인", 곧 하수인들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한다는 건 충분하게 발전하지도 못했거나 뒤떨어진 노동자 대중들을 반동적인 지도자들, 지배계급들에 앞잡이들, 노동귀족들, 또는 "지배계급으로 된 노동자들"에게 1858년에 엥겔스마저도 영국노동자들에 대해서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봐도 이런 작용들로부터 아래로 그저 내버려뒀음을 뜻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바로 이 우스꽝스런 "이론"들은 이 "좌익"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대중들"에 영향력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경솔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대중들", 자신들에 주장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지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당신들은 "대중"들에게 도움을 주고 "대중"들에 동조와 공감이나 지지를 얻는다면 "지도자"들은 기회주의자들이나 사회배외주의자들이므로 대부분에 경우 그들로부터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지배계급이나 경찰로부터 반드시 걸쳐져 있다. 이로부터 오는 어려움들, 곧 고통, 속임수, 모욕, 박해, 등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며, 반드시 대중들도 있는 곳에서 넓게 작업해야만 한다.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무산계급이나 무산계급들에 반대하는 대중들에게만 있는 기구들이나 협회 및 결사체들에서도 체계적으로도, 견딜 줄 알고, 끈덕지고, 꾸준하고, 끈기있게, 선전이나 선동을 하기 위해서는 무슨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어야 하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난관들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노동조합들이나 노동자협동조합들은 때때로는 적어도 협동조합들로부터는 바로 이런 대중들만 있는 조직들일 뿐이다. 스웨덴에 신문이던 <인민일보정책 3월호>에서는 1920년 3월 10일 자에 인용된 자료에 따른다면 영국에 노동조합원 수는 1917년 말에 5,500,000명에서 1918년 말에는 6,600,000명으로 19%로 증가했다. 1919년이 끝날 무렵에는 7,500,000명으로 추산했다. 나는 프랑스와 독일에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로부터 대응하는 자료들마져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원들 수로는 크게 늘고 있다는 걸 입증한다는 사실에는 전혀 반박에 대한 여지도 없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들만으로도 이미 수 천 가지에 다른 낌새들도 보인다. 곧 무산계급들에 대중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서민들" 사이에서도, 뒤떨어진 사람들에 의식이나 조직들에 대한 노력마저도 증가하고 있다는 건 명백하게 보여준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 수 백만에 노동자들은 전혀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주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준이고, 아주 저급하고, 아주 단순하고,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적으로 치우친 편견들로부터도 현재까지도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들로서도 아주 다가가기 쉬운 조직형태로만, 곧 노동조합들로부터도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혁명적이기는 하나 분별력이나 눈치도 없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그저 "대중", "대중". 하고 외치면서 개지랄이나 떨고 발광하고 방관한다. 노동조합들마저도 활동하기를 거부한다. 노동조합들에 반동적인 성격을 핑계로 거부한다. 아주 새롭고, 아주 순수하고,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적 치우친 편견들에도 물들지도 않은, 그리고 주어진 업무들을 수행할 수 있거나 치우치고 편협한 주어진 업무들로부터 노동조합들에도 죄를 짓지는 않는 "노동자동맹"들을 충분하게 고안해볼 수 도 있었다. 이 동맹들도 매우 넓었고, 이 동맹에 참여하는 데에는 오직 "소비에트 체제와 독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됐다. 


혁명에 대해서는 이러한 "좌익" 혁명가들도 저지른 더 큰 어리석음들이나 해악들을 생각하기는 쉽지도 않고, 더욱 어려우리라. 러시아에 지배계급들이나 연합국에 대해서는 전례도 없던 승리를 거둔 지는 2년 반도 지난 오늘날에 러시아에서도 우리들은 "독재를 인정한다는 건" 노동조합에 가입조건으로만 삼는다면 우리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거고, 대중들에 대한 우리들에 힘에 대한 작용들마저도 손상하고 있고, 멘셰비키들을 도와주는 꼴만 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에 참된 과제는 뒤떨어진 성격들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뒤떨어진 성격에 사람들 사이에서 작업할 줄 안다는거지, 억지로 고안해 내서는 유치하거나 미숙한 "좌익" 구호들로 그들을 둘러막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무엘 곰퍼스, 아서 핸더슨, 레옹 주오, 칼 레긴 등에 여러 일당들에 독일에서는 "원칙에 대한 측면"들에 대한 반대파들. "하나님, 우리를 그러한 '원칙들'로부터 보호하소서."나 미국에서는 세계산업노동자조합에 일부 혁명가들도,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을 포기하거나 그러한 조합들 속에서도 활동하기를 거부할 걸 설교하는 이들 "좌익" 혁명가들에게 오히려 매우 감사하고 있음은 의심할 바도 없는 일이다. 기회주의 "지도자" 양반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노동조합들로부터 배제하고 갖은 수단을 다해서도 그들을 내쫓고 노동조합들에서도 활동하기를 할 수 있는 한에서도 꺼리도록 만들고 그들을 모욕하고, 괴롭히고, 박해하고자, 모든 지배계급들에 외교들에 대한 술책들에서도 그리고 지배계급들에 정부들, 성직자, 경찰 및 법원들에 도움에 호소하리라는 건 의문을 품을 수도 없던 일이었다. 우리에게 노동조합들에 들어가서 그들 속에 머물러야만 무슨 일이라도 있더라도 공산주의 활동들을 수행하려는 한에서도, 우리는 이 모두에 맞설 수 있어야만 하고, 무슨 희생들이든지 기꺼이 치를 수 있어야만 하고, 심지어는 부득이 한 경우에도, 갖가지에 채략이나, 교묘한 꾀나, 합법적이지 아니한 방법이나, 진실에 대한 침묵이나 은폐에 대해서도 호소할 수 있어야만 한다, 차르주의 아래에서도 1905년까지는 "합법적 기회"들마저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비밀경찰이던 주바토프는 오히려 혁명가들을 체포하고 그들로부터 싸우고자 1905년에 만들어진 극우 반동적 폭력단체인 검은 백병대나, 러시아 국민동맹, 대천사 미하엘 동맹 등에 총칭으로도 이후에도 일반적으로도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성격들에 사람들은 "검은 백병대" 라 불린 성격에서도 드러났지만 노동자회들이나 노동자협회들을 조직했을 때 우리는 우리 당원들을 이들 회의와 협회에도 보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들에 한 사람이던 바부슈킨 동지를 떠올렸는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체르에서 지도적인 공장노동자로 차르장군들로부터 1906년에 총살됐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자신들에 선동 활동들을 교묘하게 수행했었고 노동자들을 주바토프에 앞잡이들로부터 그에 힘으로부터 떼어냈다. 물론 아주 깊숙하게 뿌리박은 준법주의적, 입헌주의적, 지배계급적, 민주주의적으로 치우친 편견들에 물들어 있는 서유럽에서는 이런 일들을 더욱 성취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건 마찬가지로 성취될 수 있고 또한 성취되어야만 한다. 보다 체계적으로도 짜임새 있게 성취할 수 있고 성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의견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에 집행위원회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비난하면서 왜 그런 거부들은 정작 슬기롭지도 못하게 해결하고, 무산계급들에 혁명들에 대한 대의에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해악으로 폐해마저 끼칠 수 있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특수하게는 이런 잘못된 정책들을 지지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공공연하든 암암리에든,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문제시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네덜란드 공산당에 당원들에 지도노선들을 적극적으로 비난해야만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차기대회를 더 소집해야만 한다. 제3인터내셔널에서는 이러한 골치아픈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감춰두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적나라하게 제기해야만 한다. 우리는 '독립파' 독일에 독립사회민주당들에게도 온 진실들을 공개해서도, 터놓고 말해왔으며, 또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온 진실들을 터놓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무엘 곰퍼스파, 아서 핸더슨파, 레옹 주오파, 칼 레긴파는 실제로는 주바토프파와 다름 없는 자들이다. 주바토프로부터 우리와 구분할 수 있는 건이들은 단지 유럽적 외관이나 품위를 지니고 있고 자신들에 야비한 술책들을 치사하게 수행하는데 있어서 세련되고, 고상하고, 민주주의적으로도, 

다듬어진 방법들을 취했을 뿐이다.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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