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경제학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서문에서 다음으로 같이 말한다. 사람 많은 지역들에 사는 도시사람들로만, 시민들로만, 이뤄진 오래된 '근대사회'라는, 곧 자본주의적인 지배계급들에 사회에서는,
"경제적 운동에 대한 법칙들을 드러내고자, 책을 쓴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사적으로도 규정된 한 사회에서 생산관계를 발생·발전·쇠퇴로부터 연구하는 건,
마르크스 경제학설에 대한 내용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에 대한 생산들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대한 분석으로는 먼저 상품에 대해서 처음부터 나누어서 분석한다.
- 물건을 구매할 때는 성분표를 먼저 보는거와도 같다.
가치.
사용가치: 쓸값.
교환가치: 바꿀값.
잉여가치: 남긴값.
상품이란, 첫째로는 사람들에 욕구를 충족해주는 물건들이다.
둘째로는 다른 물건들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다.
팔리는거에 대한 쓸모는 쓸 수 있는 쓸값들로 만들어준다. 바꿀 수 있는 값어치들은 바꿀값들로 또는 단순하게는 그저 값어치들로 무엇보다도 한 갈래들로부터 된 쓸값들은 굳어진 값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바꿀 수도 있는 같은 관계들로 된 비율들이다.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여러 건들에 달하는 바꿔지는 모든 갈래들로 된 쓸값들은, 심지어는 매우 많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되어서 서로 전혀 견주어서 보기도 힘들다. 쓸값들까지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는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특수하게 정해서 굳어진 사람들로 모인 사회에서나 모임들로 맺어진 관계들에서는 체제라는 틀 내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어지는 이들로부터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맺어질까. 이들 사이에서 똑같은 건 일노동으로부터 생산된 물건들이다. 사람들은 만들어진 물건들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여러가지로 된 일노동으로부터도 서로를 견준다. 상품에 대해 만들어진 생산에는 하나씩 여러가지로 많게도 만들어진 물건들로 사회적 분업이라는 형태로 사람들로 따로 모여서 나누어진 생김새로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에는 바꾸어지는 과정으로부터 서로 견주어지는 사람들로 모여서 사회관계들로부터 맺어진 틀이라는 체제다. 그러므로 모든 상품이란 물건들에 두루 안에서 붙었거나 닮 건, 그저 뛰어나서 굳힌 일노동에서가 아니라 그저 추상적인 막연한 생각으로만 두루 이뤄진 곧 흔한 사람들에 일노동으로부터 이뤄지기 때문이다. 수 십억이나 수 백억 건에 교환이라는 바꾸는 행위나 짓들로부터도 증명한다. 그러므로 따로 된 물건들은 그저 사회적 필요라는 사람들로부터 모여서 조르고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한결같은 숱들을 드러내는데 그저 지나지 않는다. 한 물건에 값어치들에 대한 크기는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양이라는 값이나 또는 그에 대한 물건들, 곧 그러한 쓸값들에 대한 만들어지는 생산들을 위해서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고자 하는 일노동이란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모여져서 결정해서는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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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가운데.
"인간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교환에 의해서 가치로부터 서로 견줄 대마다, 바로 그 행위들로부터, 생산물에 투여된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을 인간에 대한 노동으로서 또한 서로 견준다. 그들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자본>에서 가치란, 전에 한 경제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두 명에 사람들 간에 관계다. 다만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였어야 했다. 그건 물질적 외피 아래에서 감추어져 있는 관계라고, 특정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유형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인 생산관계들에 체제라는 견지에서는, 또는 수 백만, 수 천만 건이나 반복되는 대량에 교환된 현상들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내는 관계라는 체제로부터 견지에서 볼 때만 가치라는 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치로서는 모든 상품들은 응결된 노동시간들에 일정한 양들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 비판>. 그러므로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에 이중적 성격을 상세하게 분석한 후에야. 마르크스는 가치 형태와 화폐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주요한 과제들은 가치에 대한 화폐 형태들에 기원을 연구하고, 즉 개별적·우연적인 교환 행위들, 한 상품에 대한 일정량에서 다른 상품에 대한 일정량으로 교환되는 '초보적이거나 또는 '우연적인 가치 형태'들로 시작해서는, 다수에 서로 다른 상품들로부터 하나에 동일한 특정한 상품이나 교환되는 일반적인 가치 형태를 거쳐서, 마지막으로는 금이라는 이 특정한 상품으로, 즉 일반적인 등가물로 되는 가치에 대한 화폐 형태들로 끝나는 교환에서 발전들에 대한 역사적인 과정들을 연구한다. 교환이나 상품들에 생산이나 발전에 최고 산물로 화폐는 모든 개별 노동들에 대한 사회적 성격들을, 시장들로부터 결합된 개개에 생산자 간에 사회적 연관을 모호하게 하고 은폐한다. 마를크스는 화폐에 각종 기능을 매우 자세하게 분석한다. 여기에서 특히나 일반적으로는 <자본>에 앞부분 여러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목해야 할 건 추상적으로, 때로는 순전하게 연역적으로 보이던 서술 형식들로부터 실제로는 교환되거나 상품에 대한 생산발전에 역사에서도 거대하게 축적된 사실자료들을 다루고 있따는 사실이다.
<자본>: 화폐에 존재는 상품 교환에 일정한 단계를 전제로 한다. 화폐에 대한 특수한 기능들
그러니까 단순한 상품등가물이나, 또는 유통수단, 또는 지불수단, 축장화폐 및 세계화폐들은 여러가지 기능들로부터 각각에 서로 다른 범위와 상대적인 중요성에 따라서 사회적 생산들에 정의 및 각기 다른 단계들을 표시한다.
잉여가치.
상품 생산에서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한다. 상품유통에 대한 정식들은 다음으로 같다. C(상품) - M(화폐) - C(상품)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에 대한 일반적인 정식들은 다음으로 같다. M(화폐) - C(상품) - M(화폐), 즉 이윤을 덧붙여서 판매하기 위해서는 구매하는 것이다. 유통에 투입된 화폐의 최초 가치에 대한 이 증가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부르고 있다. 자본주의적 유통에서 화폐가 이와 같이 '증가'하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증가'가 바로 화폐를 자본으로, 즉 특수하며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관계로서의 자본으로 전화된다. 잉여가치는 상품유통에서는 발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품유통은 등가물의 교환만을 인식할 뿐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또한 가격인상에서도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매자와 판매자 쌍방의 손실과 이득은 상쇄되기 때문인데, 알다시피 여기서는 대량적·평균적·사회적 현상을 논하는 것이지 개별적 사례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잉여가치를 획득하려면 화폐 소유자는 "그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상품", 즉 그것의 소비과정이 동시에 가치 창조의 과정이 되는 상품을 "시장에서 발견해야만 한다." <자본>. 그러한 상품이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노동력의 소비가 노동이고, 노동은 가치를 창조한다. 화폐 소유자는 노동력을 그것의 가치대로 구매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즉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일용하는 생활재료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화폐 소유자가 노동력을 구매한 이상, 그는 그것을 소비할 권리, 즉 하루 동안, 말하자면 12시간 동안 그것을 가동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6시간 필요노동시간의 노동 속에서 자신의 생계를 보전하는 생산물을 생산하고, 나머지 6시간 잉여노동시간의 노동으로는 자본가에게서 지불을 받지 않는 잉여생산물, 즉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생산과정의 측면에서 볼 때는 자본의 두 부분, 즉 불변자본 부분과 가변자본 부분을 구분해야한다. 불변자본은 기계, 노동용구, 원료 등이라는 생산수단에 지출되는 부분으로, 그 가치가 변화 없이 그대로 한 번에 또는 일부분씩 완성된 생산물들에 이전된다. 가변자본은 노동에 대해 지출되는 부분이다. 이 가변자본의 가치는 불변 상태로 있지도 않고,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창조함에 따라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자본의 노동력 착취도를 표현하려면 먼저 잉여가치를 투하한 자본 전체와 비교해서는 안 되고, 오직 가변자본과 비교해야만 한다. 그리해서, 바로 앞에 사례를 가지고 말해본다면, 잉여가치율,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부르고 있다. 6:6, 100%로 된다.
자본이 발생하는 데는 두 가지 역사적 전제가 있다. 첫째, 상품생산에 일반에서 비교적 높은 단계에서도 각 개인의 수중에 일정량의 화폐가 축적되어야 한다. 둘째,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노동자의 존재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데 있어 일체의 제약과 제한에서 자유롭고, 토지 및 생산수단 일반에서 자유로운 노동자, 즉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생존할 길이 없는 '무산계급'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잉여가치를 늘리는 데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노동시간의 연장 '절대적 잉여가치'와 필요노동시간에 단축 '상대적 잉여가치'는 그것이다. 전자의 방법들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나, 14-15세기에 노동시간 연장 및 19세기에 공장법으로부터 그에 대한 단축으로 국가권력의 개입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그림들을 제시한다. <자본> 출간 이후에는 세계 모든 문명국들의 노동계급들에 운동에 대한 역사에도 이 그림을 더욱 완결되게 하는 무수하게 새로운 사실들을 공급한다.
마르크스는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자본주의가 노동생산성을 증대해온 역사상으로도 세 단계를 연구했다. 1. 단순협엽, 2. 분업이나 매뉴팩처, 3. 기계제 대공업.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특징으로부터 여기서 얼마나 깊숙하게 파헤쳐냈는지를, 러시아에서 이른바 시장 생산 수공에 대한 연구로부터 위에 세 단계 중에서 1,2 단계를 예증해주는 풍부한 자료들로부터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혁명적인 효과는, 1867년 마르크스로부터 서술한 바로 그 뒤로는 반세기 동안에 많은 러시아, 일본 등에서 '신규' 국가들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났다.
나아가서 마르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참신한 건 자본축적에 대한 분석이다. 즉 잉여가치 일부의 자본으로의 전화, 그리고 그 잉여가치 일부를 자본가들의 개인적 필요나 기분을 충족하고자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생산을 위해 사용한다는 걸 분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으로 전화되는 잉여가치는 모두 가변자본이 된다고 가정한 종래의 모든 고전경제학자들 애덤 스미스 이래의 오류를 밝혀냈다. 실은 그것은 자본총액에서 생산수단+가변자본으로 나누어진다. 가변자본 부분들에 비해서 불변자본 부분들은 좀 더 급속하게 증대하는 건 자본주의에서 발전 및 그것에 대한 사회주의로에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자본 축적은 기계에 의한 노동자의 구축을 촉진하게 하고, 그리고 한쪽 극단에서는 부를, 다른 극단에서는 빈곤을 생산함으로써 '노동예비군'이라고 불리는, 즉 노동자의 상대적 과잉들을 낳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과잉인구'는 극히 다종다양한 형태를 띠고, 극단적으로 빠른 속도로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자본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생산수단에 형태로도 자본축적 및 신용과도 결합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나라들에서 주기적으로 처음에는 평균 십 년 만에, 나중에는 더 길고 덜 확정적인 간격으로 일어나는 과잉생산 공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 축적과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는 즉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 강제 분리, 토지로부터 농민추방, 공유지들의 강탈이나 식민지, 국채, 보호관세 제도 등은 구별해야 한다. 이 '본원적 축적'은 한쪽 끝에서는 '자유로운' 무산계급들을, 다른 쪽 끝에서는 화폐 소유자, 즉 자본가들을 창출해낸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마르크스는 다음으로 같은 유명한 말로 묘사했다.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은 가장 무자비한 만행에 의해서, 그리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야비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격정들의 충동 속에서 수행되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 조건과의 뒤섞인 '융합'에 입각한 사적소유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다 타인 노동이라는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들어선다. 이제 수탈당한 자는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으로부터, 즉 자본의 집중에 의해서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들을 파멸한다. 이러한 집중, 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도 병행해서 여타의 발전도 더욱 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즉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고동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형태로 전화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적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 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그로 인한 자본주의적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이 더욱 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 과정의 모든 이익들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끊임없이도 줄어들지만, 빈곤과 억압과 예속과 타락과 착취의 정도는 더욱 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동자계급 그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서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되는 계급인의 반항도 또한 증대해간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서 이 독점밑에서 번창해온 그 생산방식의 질곡이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자본>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또 한 가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참석한 것은 <자본> 2권에서는 제시된 사회 전체의 자본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에서도 마르크스는 개별 현상이 아니라 대량적인 현상을, 경제의 단편이 아니라 그 경제를 총체로서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는 상술한 바와 같은 고전학파의 오류를 정정함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생산을 2대 부문으로, 즉 1) 생산수단의 생산과 2) 소비재료의 생산으로 구분하고, 수학상의 용례를 통해 사회 전체의 자본의 유통을 상세하게 종래의 규모의 단순재생산이라는 재생산의 경우와 확대재생산이라는 축적의 경우 모두 검토하고 있다. <자본> 3권에서는 평균이윤율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가치법칙을 기초로 해서 해결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분석을 하면서, 속류 경제학과 현대의 '한계호용학설'이 빈번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개별적 사례 또는 경쟁이라는 외적·피상적 측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대량적 경제 현상으로부터, 전체 경제로부터 출발했는 것은 경제학 상의 일대 전진이었다. 마르크스는 먼저 잉여가치의 기원을 분석하고, 이어서 잉여가치의 이윤, 이자, 지대로의 분할 문제를 고찰한다. 이윤이란 기업에 투하된 자본 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유기적 구성이 높은' 곧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우위 정도가 사회적 평균보다 높은 자본은 평균보다 낮은 이윤율을 가져온다. '유기적 구성이 낮은' 자본은 평균보다 높은 이윤율을 가져온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과, 한 생산부문으로부터 다른 생산부문으로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그 두 경우 모두에게 이윤율을 평균이윤율 수준으로 낮춰놓을 것이다. 주어진 사회의 모든 상품가치의 총액은 상품가격의 총액과 일치한다. 그러나 개별 기업 및 개별 생산부문에서 상품은 경쟁의 영향을 받아, 그 가치대로 판매되지 않고, 지출된 자본+평균이윤의 합과 동일한 액수의 생산가격에 판매된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가치들로부터 가격의 괴리, 이윤의 평균화라는, 널리 알려져 있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가치법칙의 기초 위에서 완전하게 설명했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 총액이 가격 총액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회적인 가치가 다양한 개별적인 가격으로 표시되는 것은 단순한 직접적 과정이 아니라 대단하게 복잡한 과정들이다. 시장에 의해서만 상호결합되는 분산된 상품생산자들에 사회에서는 합법칙성들이, 어떤 때는 이 방향으로, 또 어떤 때는 저 방향으로 개개의 편차를 서로 상쇄한 평균적·사회적·대량적 합법칙성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 건 지극하게 당연하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가변자본들에 비해 불변자본에서 더 급속하게 증대하는 걸 의미한다. 잉여가치는 가변자본만의 기능이라고 할 때, 이윤율, 곧 잉여가치의 비율로서, 이 잉여가치율은 가변자본 부분에 대해서만의 비율이 아니라 전체 자본에 대한 비율이다. 이 저하하는 경향을 띠는 건 명백해진다. 마르크스는 이 경향과, 이걸 은폐하거나 이것에 반작용하는 많은 사정들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우리는 고리대자본과 상업자본과 화폐자본에 할애된 <자본> 3권에 극히 흥미로운 장들을 건너뛰어서, 매우 중요한 장인 지대론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토지의 면적에 제한이 있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그 토지가 모두 개개의 사적소유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으므로 농업 생산물의 생산가격은 중위 수준의 토지에서의 생산비가 아니라 가장 열등한 토지의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하는 조건은 중위 수준의 조건이 아닌 최악의 조건 아래서 농산물 생산가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가격과 양질의 토지 또는 보다 나은 조건들에서의 생산가격 간의 차액에서 차액지대가 생겨난다. 마르크스는 이 차액지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어떻게 그것이 개개인들에 토지의 비옥도 차이에서도, 또 토지에 투하된 자본 양의 차이에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줌으로 해서, 차액지대가 보다 양질의 토지로부터 계속해서 보다 열등한 토지로 옮겨가는 경우에만 생긴다고 본 리카도의 오류를 완전하게 폭로했다 <잉여가치학설사>도 보라. 여기에서는 로트베르투스에 대한 비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는 반대로 역의 이행이 있을 수 있는데, 즉 어떤 한 등급의 토지가 다른 등급의 토지로 바뀌는 농업 기술의 진보, 도시의 성장 등에 일들도 있을 수 있다. 그리해서 저 악명 높은 '수확 체감의 법칙'들은 자본주의의 결함과 한계와 모순을 자연에 전가해서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더 나아가서, 공업 및 일반으로는 국민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이윤이 균등해지기 위해서는 경쟁의 완전한 자유와 한 생산부문으로부터 다른 생산부문으로의 자본 이동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토지의 사적소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이동에 장애가 되는 독점을 낳는다. 이 독점의 결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비교적 낮고, 그로 인해서 개별적으로는 비굑적 높은 이윤율을 특징으로 하는 농업 생산물은 이윤율 평균화라는 아주 자유로운 과정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토지 소유자는, 독점자로서 가격을 평균 이상으로 유지하기를 얻는다. 그리해서 이 독점가격들은 절대지대를 낳는다. 차액지대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폐지할 수 없지만, 절대지대는 이를티면 토지 국유화에 의해서만, 즉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함으로만 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토지를 국가로 이전하는 건 사적소유자에 독점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농업에서 경쟁에 대한 자유로부터 일관되고 완전하게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될 거다. 바로 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지배계급 급진파들에게 마르크스로부터 지적한 바와 같이 토지 국유화라는 이 진보적인 지배계급들에 요구들을 거듭해서 제기해온 거다. 그러나 토지 국유화는 오늘날에도 특히나 중요하고 민감한 독점, 곧 생산수단 일반에 대해서만 독점에 미치는 영향들과 너무나 근접해 있기 때문에 대다수에 지배계급을 겁먹게 하는 요구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평균이윤율 및 절대지대에 대한 자신에 이론들을 극히 평이하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해설한 내용들은 1862년 8월 2일자로 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에 있다. <왕복서한집> 3권, 77-78쪽을 보라. 또 1862년 8월 9일자 편지, 같은 책 86-87쪽도 보라.
지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지대 변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분석은 노동지대 농민이 영주의 토지에서 노동해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우
가 어떻게 생산물지대 또는 현물지대라는 농민이 자신의 토지에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경제 외적 강제' 때문에 지주에게 넘겨주는 경우로 전화되고, 그 다음에는 화폐지대 앞 선 현물지대가 상품생산의 발전의 결과로 화폐 납부로 전환된 것. 구 러시아의 '면역지대'로, 그리고 끝으로는 자본주의적 지대 농민 대신에 농업 기업가가 나타나 임노동을 사용하여 토지 경작을 하는 경우로 전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발생'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진화에 관해 마르크스가 표현한 일련의 시오한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 특히 중요한 사상이다. 현물지대의 화폐지대로의 전화는 나아가, 화폐를 받고 고용되는 무산 일용노동자 계급의 형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급의 형성이 화폐지대로의 전화에 선행하기까지 한다. 이 새로운 계급이 아직은 산발적으로밖에 등장하지는 않는 그 발생기의 경우, 지대 지불 의무를 지는 농민 내에서도 비교적 번영하는 층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신들의 농사를 위해 농업 임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습이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이는 봉건시대에도 비교적 부유한 예농이 그들 자신에 더해서 다시 예농을 고용하고 있던 것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일정 정도의 부를 축적해서 스스로 미래의 자본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점차 얻게 된다. 구래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토지 소유자 자신들이 바로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양성소를 탄생시키는 주역인데, 이러한 차지농의 발전들은 농촌 밖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들의 일반적 발전들에 의해서 제약된다. 자본 3권.
"농촌에 인구 일부의 수탈과 추방들은 산업자본들을 위해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생활수단 및 노동재료들을 분리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들을 창조한다." 자본 1권. 한편 농촌 인구들의 빈곤화와 파산은 자본들을 위한 노동예비군 창출에도 일익을 담당한다. 다라서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농촌인구의 일부는 도시 무산게급들 또는 매뉴팩처 곧 비농업 무산계급들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중에 있다. 그리해서 상대적 과잉인구들의 이 원천들은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다. 따라서 농업노동자는 임금이 최저한까지 억눌리며, 항상 한 발은 이미 궁민 상태의 늪에 담그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 1권.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사적소유는 소생산의 기초이며, 소생산의 번영, 소생산의 고전적 형태로의 발전들을 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생산들은 생산 및 사회의 협소하고 원시적인 틀 안에서만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농민들의 착취로는
공업 무산계급들에 대한 착취와 단지 형태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그러나 착취자는 같다. 곧 자본이다. 개개의 자본가는 저당과 고리대로부터 개개의 농민들을 착취한다. 자본가계급들은 국가조세로부터 농민계급들을 착취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이재 농민들의 분할지는, 자본가가 경지에서 이윤과 이자와 지대를 끌어내면서, 토지 경작자의 임금을 어떻게 염출해낼 것인가 궁리해야 하는 일들을 경작자 자신에게 떠넘겨버릴 수 있게 해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브뤼메르 18일>. 대개 농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임금의 일부분들까지도 내다 바치고, "아일랜드 소작인들에 수준"으로 영락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적소유자라는 구실 아래로 일어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그렇다면 "소농 분할지 소유가 지배적인 나라들에서는 곡물가격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나라들에서보다 더 낮은 원인들 중 하나"는 무엇인가. <자본> 3권. 이건 농민들이 사회에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자신의 잉여생산물들에 일부분들을 무상으로 넘겨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곡물 및 기타 농업 생산물들에 낮은 가격들은 생산자들의 빈궁의 결과이지, 결코 그들에 노동생산성에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3권. 소생산이라는 정상적 형태인 소토지 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퇴하하고 파산하며 멸망한다.
분할지 소유는 그 본성상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나 노동의 사회적 형태들과 자본의 사회적 집적과 대규모의 목축과 과학의 누진적 응용들을 배제한다. 고리대와 조세제도는 어디서나 분할지 소유를 빈곤화하게 마련이다. 토지 구입들에 들어간 자본 지출들은 그만큼 자본들을 경작으로부터 회수한다. 생산수단의 끝없는 파편화와 생산자 자신의 고립화로.
협동조합, 곧 소농민의 연합은 극히 진보적인 지배계급적 역할을 하면서도, 이러한 경향들을 약화할 뿐, 없애지는 못한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건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부농에게는 커다락 이익들을 주지만 빈농대중들에게느 매우 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익밖에는 주지 않는다. 결국 협동조합 자신들에게 임노동에 대한 착취자가 된다.
"인간 에너지의 막대한 낭비, 생산조건의 누진적인 악화,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격등귀는 분할지 소유라는 필연적 법칙이다. <자본> 3권. 공업에서처럼 농업에서도 자본주의가 생산과정을 개조하는 것은 오직 "생산자의 순교"라는 대가를 치른 다음이다.
집적으로 인해 저항력이 커지는 도시노동자와는 달리, 농업노동자는 비교적 광범위한 지역들에 퍼져 있어서 그들의 저항력은 약화된다. 도시 공업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 농업에서는 노동의 생산성의 증대와 그 유동화의 증진들이 노동력 자체가 황폐해지고 쇠약해지는 대가로 얻어진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농업에서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 약탈 기술만이 아니라, 토지 약탈 기술에서의 진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하게하고 비로소 기술을 발전하고, 다양한 생산과정들을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까지도 결합한다. <자본> 3권.
<포어베르츠>와 빈에 <노동자신문>으로 보내는 편지.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며칠 전에 <포에베르츠>는 전쟁과 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짧은 기사를 한 편 게재했습니다. 기사에서 나는 취리히에서 읽었던 신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대한 전적으로 그릇된 인상들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차르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만 분명 글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들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국만이 아니라 자국에 배외주의나 애국주의에도 반대해서 가차 없는 투쟁들을 수행한다는 건 모든 나라에서도 사회주의자들에 의무임을 확신하는 사람으로서도 나는 차르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해왔고, 맥락으로부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도 발언합니다. 그러나 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취한 입장에는 반대해서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붕괴를 말한 건 아무런 언급마저 하지도 않는다면, 내 논지에 의미는 완전하게 왜곡될 소지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내 보고에서 10분에 9만으로 비판으로 다룹니다. 내게 밝힌 누락 부분들로부터 <포어베르츠>에 또는 게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민주주의적 인사를 보내며.
여기서 말하는 레닌에 대한 보고에 기사로는 1914년 11월 10일자로 <포어베르츠>라는 <전진> 308호와 11월 7일자로 된 빈에 <노동자신문> 309호에도 게재됐었다. 1914년 11월 22일, <포어베르츠> 편집국에서는 레닌에 대한 편지에 답하는 짧은 글들을 게재해서, 레닌에 보고들로부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취한 입장들을 비판했고,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된 일련에 붕괴들에 대한 평가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 원서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