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열린 구성원들은 국외로 거주하는 지부들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재외지부 회의는

며칠 전 의사일정을 모두 끝마쳤다. 회의는 순전하게 국외적인 문제들로 이에 대해서 중앙기관지로는 다음 호에서 간단하게 논평해볼 예정이다. 이에 대한 심의 외에도, 중요하고 긴급한 전쟁 문제들에 대한 결의들을 작성했다. 우리는 여러 의견들로 뒤섞여 난무하는 요즘에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이 혼란 상태는 말로는 국제주의를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행동에서도 어떻게든 사회배외주의와 타협하고자 하는 행태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벗어나서 활기차게 사업을 수행할 길을 성실하게 찾고 있는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이 결의는 도움을 줄 거라는 그나마 기대로부터 결의를 발표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편중되었어서, 이후 출판물로부터 경제적 측면에 대한 문제로 토론으로도 이루어질 때까지는 문제에 대한 거론들은 미루기로 결정했다. 



회의들에 대한 결의.



본 회의는 <사회민주주의자> 33호에 발펴된 중앙위원회 선언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당에 선전에도 우선적인 부문들로도 부여해줄 같은 방침들을 다음으로 결정했다.



전쟁에 대한 성격으로. 



현 전쟁들은 그에 대한 성격에 있어서도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들은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최고 단계에도 도달한 시대적 조건에 대한 결과물들이다. 상품 수출뿐만 아니라 자본 수출들은 최대에 의의를 점하게 되고, 생산에 대한 카르텔화와 경제생활에 대한 국제화에 비중으로 현저하게 높아지고 있으며,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 완전하게 분할되고 있으며,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생산력들은 민족국가로 제한된 국경 범위를 뛰어넘어서도 성장함에 따라서 사회주의 실현들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으로 완전하게도 무르익은 단계는 바로 이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이다. 



'조국방위' 구호.



이 전쟁에 대한 본질로는 영국·프랑스·독일 사이에서 진행되는 식민지에 대한 분할이나 경쟁국 약탈들을 위한 싸움들일 뿐이다. 차리즘이나 러시아 지배계급들에 입장에서는 페르시아. 몽골. 아시아 영토에 터키. 콘스탄티노플. 갈리치아. 등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들이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전쟁에서 민족적 요소들은 완전하게는 곁딸린 뜻만을 지닐 뿐,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성격, 곧,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지난 이삼십 년 사이에도 경제사나 외교사 전체를 살펴보면 교전국 양 진영 모두에서는 현재와 같은 전쟁들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왔음을 알 수 있겠다. 먼저 어느 쪽은 군사 공격을 했으며 또는 어느 쪽으로부터 최초로 선전포고를 했는가 하는 문제들은 사회주의자에 전술 결정에는 어떠한 뜻도 주지는 못한다. 조국방위, 적 침략으로부터 반격, 방어전 따위와 같은 서로에 대한 문구들은 인민들을 기만하는 말들에 불과하다. 


남달리 참된 민족 전쟁이던 1789년이나 1871년에 일어난 전쟁에서는 대중적인 민족운동, 절대주의와 봉건제에 항거하는 투쟁, 민족 억압에 대한 타도, 민족적인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전제로부터 국가들을 이루는 밑바탕으로 오랜 과정으로도 깔려 있었다. 


시대로부터 만들어낸 민족적인 사상들은 중산계급 대중들이나 무산계급들에 일부에도 깊은 도장들을 새겨왔다. 지배계급 궤변론자들이나 그들에 뒤꽁무니나 뒤좇는 사회주의 배반자들은 현재에도 이 민족적인 사상들로부터 당시와는 상황마저도 완전하게 다른 시대들인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노동자들을 분리하게 하고 노동자들에 주목마저도 그들에 대한 계급적인 목표나 지배계급에 대한 혁명적인 투쟁으로부터도 다른 데로 돌리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란 없다."는 <공산당·선언>에 대한 구절들은 과거에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 참되다. 지배계급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국제적인 투쟁만큼 무산계급들은 쟁취한 성과물들을 더욱 보존할 수 있고, 억압을 당하고 있는 대중들에게도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은 충분하게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구호. 



"단 하나에 올바른 무산계급들에 구호로는 현재에 제국주의 내란으로 전화해야한다. 코뮌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1912년에 바젤 결의에서는 제시된 윤곽으로 이 구호로는 고도로 발전한 

지배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모든 조건들을 가리키는 결론이다. 


오늘날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요구하고 있는 내란들은 무산계급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 맞설 수 있는 무장투쟁들로,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자본계급들에 대한 수탈들을, 러시아에서는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에 따른 민주주의 혁명들을, 일반적인 낙후된 군주제 국가들에서는 공화제 수립들을 목적으로 둔다. 전쟁에 대한 원인으로부터 대중들에 참화나 고통들은 혁명적인 감정들이나 운동들을 부르지 않을 수도 없겠다. 내란 구호들은 이 같은 감정들이나 운동들마저 일반화할 수 있는 쪽으로 부여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해야만 한다. 


노동계급들에 조직들은 매우 심각한 손상마저 입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혁명적인 위기들은 무르익고는 있겠다. 전쟁 후로는 모든 국가들에서 지배계급들은 무산계급들에 해방운동들을 수 십 년 뒤로도 돌려놓고자 갖은 각색으로 강화된 노력들을 기울일거다.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임무로는 혁명적 발전으로 급속하게 전개되든 위기로 길게 지속되든 간에 장기적·일상적인 작업들을 방기하지는 말고, 현재까지도 계급투쟁에 대한 방법들을 어느 하나도 버리지는 말자. 대중들에 혁명적인 투쟁에 대한 정신으로부터도 의회투쟁이나 경제투쟁 모두에서도 기회주의들에 맞서도록 지도하는 건, 모든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임무들이기도 하다.


다음 사항들은 현 제국주의 전쟁들을 내란으로 전화할 수 있는 방침들이다.   


1. 전쟁공채들에 대한 찬성 투표를 절대로 거부하고, 지배계급들에 정부에서도 사임한다.


2. 계급휴전이라는 국내에 평화정책들에는 완전하게 단절한다.


3. 정부와 지배계급들은 계엄령을 도입해서 헌법으로 된 자유를 폐지하는 곳에서든 어디서든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직들을 만든다. 


4. 참호에서는, 그리고 전장에서는 교전국 병사들 사이에 우애들을 두루 지지한다. 


5. 무산계급들로부터 모든 갈래에 혁명적인 대중행동들도 두루 지지한다.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파괴.



제2인터내셔널들에 붕괴로는 사회주의적 기회주의들에 와해다.

사회주의적 기회주의는 그에 따르는 노동운동 발전에 '평화적인' 시기에 산물로서도 

성장해왔다. 이 시기들은 노동계급들에게는 의회활동들을 비롯한 모든 합법적인 기회들조차도

같은 중요한 투쟁들에 수단들을 활용하고, 대중적인 경제적·정치적인 조직들이나 넓은 노동·

언론들을 창설하는 법들을 가르쳤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계급평화를 설교하고, 사회주의 혁명들을 부정하고 비합법적인 조직들로부터 원칙들 자체를 폐기하고 지배계급들에 애국주의를 인정하는 등에 기울어진 분위기들 마저 감돌았다. 노동운동 관료들이나, 세계 시장에서 자신들에 '조국'에 특권적인 지위나, 식민지에 대한 착취로부터 나온 이윤에 대한 일부로 부스러기를 받는 노동귀족들이나 노동계급들에 특정 층으로 사회주의 당 내에서도 중산층들에 동조자들은 이런 분위기들로부터 사회적인 지주들이자, 무산계급들에게는 지배계급적인 작용마저 미치게 하는 길목들이다. 기회주의들에 대한 해로운 작용들은 제2인터내셔널에 공식적인 사회민주당들 대부분에서는 전쟁으로 벌어진 때에 취하는 정책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난다. 전쟁공채에는 찬성 투표를 던지고, 정작 지배계급들에 정부들에는 참여하고, 계급휴전 정책들을 취하고, 적들로부터 합법적으로 폐지된 마당에서도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직들을 거부하는 건 모두 인터내셔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결정들을 위반하거나 모독했고, 사회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반려이다.



제3인터내셔널. 



전쟁으로 조성한 위기들은 기회주의에 대한 참된 실체로부터 지배계급으로부터 공조해서 무산계급들에 맞서는 지배계급들에 하수인이라는 걸 명확하게 드러냈다. 카우츠키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사회민주당에 '중앙'들은 실질적으로는 완전하게 기회주읠로 넘어간다. 지극하게 유해하고 위선적인 문구들 뒤에 숨기만 해서는, 제국주의와 비슷한 내용들로 그저 베낀 '마르크스주의' 뒤에 숨어서 슬그머니 기회주의로 달아난다. 현재까지에 경험으로는, 이를테면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입장들에 대한 옹호들로부터 오직 당 지도부 다수파들에 결정들에 대한 단호한 반대로부터만 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실정이다. 기회주의자들로부터 완전하게 조직적인 단절을 하지 않고서도 참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재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그건 해로운 환상들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는 무산계급들로부터 모든 국제적인 혁명적 대중행동들을 지지하고, 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배외주의조차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모아야된다.



평화주의와 평화구호.



평화주의, 그러니까 평화를 추상적으로만 설교하는 건 노동계급들을 잘 속일 수 있는 수단 중에는 일부들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특히나 그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전쟁으로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는 제국주의 전쟁도 아닌, 혁명적인 전쟁들은 존재한다. 이를테면 1789년에서 1871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들, 민족 억압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나, 분산된 봉건적인 소규모에 국가들로부터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을 창설하고자 벌인 목적으로 수행된 전쟁들이나, 또는 무산계급들로부터 지배계급들에 맞서서 승리한 쟁취물들을 빼앗기지는 못하게 막고자 수행된 전쟁들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런 혁명적인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속뜻들을 놓칠 수는 없겠다. 현 시기에는 혁명적인 대중행동들에 대한 요구들은 동반되지는 않고 그저 평화선전만으로 단지 환상들을 퍼뜨리고 다니고 무산계급들을 혼란하게 하거나 기세저하로까지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에 평화선전으로는 무산계급들로부터 지배계급들은 그저 인간적이라고 하거나 믿게 만들기도 하고, 교전국들에 비밀외교들에도 그저 놀아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익히나 나란한 혁명들 없이도 이른바 민주주의에 대한 보강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고 뚜렷한 오류들이다.                




차르군주제에 패배.



저마다 나라들에서는 혁명적인 선전들에 결과로부터도 저마다 나라들마저도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정부들에 대한 투쟁들은 더욱 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정부군들에 패배는 정부를 약하게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부들로부터도 억압된 민족들에 해방들로부터 장려하게 할 수 있고, 지배계급들에 대한 내란들도 쓸모있게 한다. 이 명제들은 러시아에서도 매우 참이다. 러시아에서 승리는 반동에 대한 강화로부터도 전 세계에서나 러시아 내에서나 전부를 가져올거고, 이미 점령된 지역들에 살고 있는 인민들에 완전한 예속들을 대동할거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러시아는 패배하는 쪽으로 모든 조건에서 위해들은 

매우 작다고 생각한다. 



다른 당들로부터 주어진 모임들에 대한 태도.



넘치는 배외주의들을 가져온 이 전쟁들은 나로드니키에 민주주의나 지식인들이나 <미슬>을 중심으로 모인 혼미한 사회주의혁명가당, 플레하노프에 지지를 받는 <나샤 자리야> 같은 청산파에 다수파 등들은 모두 배외주의에 사로잡힌 적들인 포로임을 드러내준다. 위장한 채로 숨기고 은밀하게 배외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라린이나 마르토프를 비롯해서 애국주의를 원칙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악셀로드에 이르기까지도 실질적으로는 조직위원회들도 배외주의 쪽으로 가담했다. 독일에 친화적인 배외주의로 우세를 점한 분트파도 마찬가지로 배외주의로 넘어갔다. 1914년 7월 3일 자로 브뤼셀 시가지에서도 붕괴된 한편으로, <나셰슬로보> 주위로 결집해 있던 사람들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저 순수하고 관념적인 가담이나,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나샤자리야> 및 조직위원회들로부터 대동단결로 뭉치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도 그저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같은 동요들은 치헤이제라는 사회민주주의 모임에서도 일고 있다. 치헤이제 모임들은 한편으로는 플레하노프 쪽이면서 배외주의자인 만코프를 빼어서 제외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어떻게든, 플레하노프, <나샤자리야>, 악셀로드, 분트파 등에 배외주의를 감싸주고자 갖은 수를 다 쓰고 있다. 이같은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노동당에 임무는 1912년에서 1914년에 주로 <프라우다>로부터달성된 무산계급들에 단결들로부터 더욱 다질 수 있고 사회배외주의자들로부터는 더욱 단호하게 조직적으로 단절한 기반 위에서만 오직 사회민주주의 노동계급들에 조직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일시적인 협정으로는 오직 조직위원회, <나샤자리야>, 분트파와는 단호한 조직적인 결별마저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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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인민 대중들은 더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러시아에서는, 과연 자본주의는 싹을 틔우고

완전한 발전에도 도달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발전하기 위해선 우선 광범위한 국내 시장은 있어야 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농민층의 붕괴는 이러한 시장을 약화하게 하고 모조리 문을 닫게하고, 위협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질서에서 구성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직접 생산자들에 자연경제를 상품경제로 의도적으로 전환하게 하고 스스로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건 사실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궁핍한 러시아 농민들에 자연경제 가운데서 고작 남아 있는 보잘 거도 없는 자투리들은 이 나라에선 서구처럼 강력한 자본주의 생산 발전에 토대를 이룰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까. 대중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이 나라 자본주의는 무력하고, 토대는 형성되어 있지도 못하고, 나라 전체에 생산을 아우르고 사회적 경제에 근간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무능력하다는 건 확실해 보이지는 않는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국내에 여러 문헌에서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제기되고 있다. 시장에 대한 부재는,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 이론을 접목 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제기하는 논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곧 논의하게 될 <시장문제>라는 문건에 목적도 바로 마르크스 이론을 접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반박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시장문제>를 쓴 마르크스에 주된 전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보편적이고 배타적인 지배"라는 가정이다. 그러한 전제로부터 마르크스는 <자본>에 2권, 3편에 있는 21장에서 사회적 총자본에 재생산이나 유통에 내용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은 어떻게 노동자와 자본가에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게해주는 생산에 일부를 대체하고, 그 생산에 일부들은 어떻게 생산자본에 요소들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다. 그러므로 1권에서는 개별 자본에 생산이나 재생산에 대한 검토들은 자본에 구성 요소들이나 그 가치에 따른 생산물에 따른 분석으로 <자본> 1권에서는 생산물에 가치들은 C: 불변자본(ConstantCapital)+ V: 가변자본(VariableCapital)+ S: 잉여가치(SurplusValue)로 구성되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제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산물들은 우선 그 물질적 구성 요소들로 분할되어야만 하는데, 자본에 성분들로 구성되는 생산물들에 일부들은 개인적 소비를 위해서는 사용될 순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총생산들을 따라서 총생산물들은 


1. 오로지 생산적 소비를 위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상품들인 생산수단들에 생산, 즉 

   생산적 자본에 요소. 


2. 노동계급이나 자본가계급에 개인적 소비들을 위해 기능하는 상품인 소비수단들에 생산. 


이렇게 두 부문으로 나뉜다. 이를테면 아라비아 숫자들은 수백만 루블이나 같은 가치에 대한 단위들로 설명한다. 다음에 오는 로마 숫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생산에 부문들을 설명해준다. 잉여가치율은 100퍼센트라고 상정했다. 이 연구로 기초로 삼는 공식은 다음으로 같다.


. 4,000C+1,000V+1,000S=6,000.

. 2,000C+500V+500S=3,000.

자본=7,250. 생산물=9.000.



먼저 단순재생산, 즉 생산으로 확대되지는 않고 예전에 규모로 영구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에 전부를 생산적이지도 않게 소비하고 있고, 축적도 아닌 그저 개인적인 요구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걸 뜻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선 Ⅱ500V와 Ⅱ500S는 동일하다는Ⅱ.에 제기한 부문 내에서만 자본가와 노동자로부터 소비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해진다. 

그 생산품들은 개인적 욕구에 충족을 위한 소비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선, 동일한.부문 내에서만 자연적 형태에 4,000C는 자본가들에 의해서도 소비된다. 생산규모들은 불변하는 상황에서는 앞으로도 생산수단에 생산을 위해서는 똑같은 자본으로 유지하고자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이 부문을 대체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들은 없다. 석탄, 철, 기계 등이나 같이 자연적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들에 해당 부문들은 생산수단들을 생산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분명 교환될테고, 종전에 같이 불변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Ⅰ. (V+S)와 Ⅱ. C는 여전하게 남는다.      


여기서 Ⅰ.1,000V+에서Ⅰ.1,000S는 생산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이고, 

Ⅱ. 2,000C들은 소비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들이다. Ⅰ. 부문에서는 단순재생산, 

즉 전체에 대한 잉여가치들에 소비에서 노동자들이나 자본가들은 2,000에 대한 가치(1,000V+1,000S)를 소비수단으로 소비해야만 한다. 예전에 규모대로 생산을 계속할 수 있게하려면, Ⅱ. 부문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에 불변자본인 Ⅱ.2,000C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2,000 정도까지에 생산수단들을 획득해야만 한다. 여기서 볼 때는 Ⅰ.V+Ⅰ.S=Ⅱ.C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건 명확해진다. 그렇지도 않다면, 예전에 규모대로는 생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단순재생산에 대한 조건들은Ⅰ.부문에서 가변자본이나 영이가치에 대한 총합들은 Ⅱ.부문에서도 불변자본으로는 똑같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Ⅰ.(V+S)=Ⅱ.(C). 달리 말해서, 두 부문에서도 일년 동안이나 생산된 모든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총합들은 소비수단에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생산물들에 총가치와는 동일해야 한다는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Ⅰ. (V+S) + Ⅱ. (V+S) = Ⅱ. (C+V+S).


물론 실제로는 단순재생산이란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 사회에서 생산들은 매년 예전에 규모에만 머물를 수는 없고, 축적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생산들은 어떻게 규모 면에서는 확대되거나 축적은 이뤄지는지를 과연 검토해보도록 해보자. 축적은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잉여가치에 일부로만 자본가들에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서만 소비되고, 나머지 부분들은 생산적으로만 소비된다. 즉 생산에 확대를 위한 생산적 자본에 일부로만 전환된다. 따라서 축적은 이뤄지는 한에서는 Ⅰ. (V+S)와 Ⅱ. C는 동일할 수도 없다. 분명 Ⅰ. 부문에서 잉여가치에 일부는 소비수단으로 교환되지도 않았고 생산에 확대를 위해서 적어도 사용되기 위해선Ⅰ. (V+S)는 좀 전에 Ⅱ. C 보다도 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도 얻게 된다.         



A. 단순재생산 공식. 


Ⅰ. 4,000C+1,000V+1,000S=6,000.

Ⅱ. 2,000C+500V+500S=3,000.

Ⅰ. (V+S)=Ⅱ. 2,000C.


B. 초기 축적 공식.


Ⅰ. 4,000C+1,000V+1,000S=6,000.

Ⅱ. 1,500C+750V+750S=3,000

Ⅰ. (V+S) > Ⅱ. 1,500C.


이제 축적이라도 이뤄진다면 사회적 생산들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첫해에는.


Ⅰ. 4,000C+1,000V+1,000S=6,000.

Ⅱ. 1,500C+750V+750S=3,000.

자본=7,250.  생산물=9,000.


여기서Ⅰ.(1,000V+500S)는 단순재생산에서와 마찬가지이므로 Ⅱ. 1,500C와 교환된다.

Ⅰ.500S는 축적, 그러니까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서 투입된 자본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방금 분활된 부분들을 불변자본이나 가변자본으로 나눌 수 있다.



Ⅰ. 500S=400C+100V 이다.



추가로 400C라는 불변자본들에서 자연적 형태는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생산물 Ⅰ. 에서도 포함되지만, 추가로는 100V라는 가변자본들은 두 부문에서 자본가들로부터 확보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축적을 할 수밖에는 없다. 그들은 Ⅱ. 100S라는 잉여가치에 일부로 Ⅰ. 100V라는 생산수단으로 교환해서 이 생산수단을 추가된 불변자본으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불변자본은 1,500C에서 1,600C로 분명하게도 증가한다.



그걸 처리하기 위해서는 추가 노동력이던 -50V- 마저 필요해지는데, 

이거마저도 역시 두 부문에서 자본가들에 잉여가치들로부터 가져온거다.

최초로 자본에다는 Ⅰ. 부문들이나 Ⅱ. 부문들로부터 가져온 추가 자본까지도 보탬으로써

우리는 다음에 생산물 분배 공식을 얻을 수 있다. 



Ⅰ. 4,400C+1,100V+500S=6,000.

Ⅱ. 1,600C+800V+600S=3,000.



괄호 안에서 묶여있는 잉여가치들은 자본가들에 소비 자금, 그러니까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자본가들에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서 들어가는 잉여가치들에 일부로 나타낸다. 

그렇다면 생산들은 예전에 규모대로 진행하고자 한다면 연말에 이르러서는



Ⅰ. 4,400C+1,100V+1,100S=6,600.

Ⅱ. 1,600C+800V+800S=3,200.

자본=7,900.  생산물=9,800.

이다. 



Ⅰ. 1,100V+550S들은 Ⅱ. 1,650와도 교환된다. 추가된 50C는 Ⅱ. 800S로부터도 얻어지고,

C가 50만큼 증가함으로써 V도 25만큼도 증가한다. 

더 나아가서 Ⅰ. 550S는 예전처럼 그대로 축적된다. 



Ⅰ. 550S=400C+110V.

Ⅱ. 165S=110C+55V.

Ⅰ.110V=Ⅱ. 110C.



그리고 Ⅰ. 4,400C에다 440, Ⅰ. 1,100V에다 100V, Ⅱ. 1,600C에다 50C와 100C, Ⅱ. 800V에다 25V와 55V, 또한 초기 자본에다가 추가 자본까지도 더해본다면 따라서 우리들은



Ⅰ. 4,840C+1,210V+550S=6,600.

Ⅱ. 1,760C+880V+560S=3,200.



을 얻게된다. 

그리고 생산들을 더 진전해보면 우리들은



Ⅰ. 4,840C+1,210V+1,210S=7,260.

Ⅱ. 1,760C+880V+880S=3,520.

자본=8,690.  생산물=10,780.



으로 얻는다.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총자본에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에 연구 결과들은 다음에도 같다. 이런 연구들은 반드시 의문을 품어봐야만 한다. 저자에 글에서도 아주 간결한 형태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토에 대한 상대로도 질문으로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마저도 없기 때문에, 

이를테면 부속으로 대체하던 화페에 대한 유통이나 서서히 닳아 없어지는 고정적인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마저도 마르크스는 생략했기 때문이다.



P.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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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농업 국가입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나라에 속합니다. 사회주의는 그곳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농민에 성격이나 귀족에 수중에 광대한 토지는 집적되어 있는 현실은 1905년에 경험으로 판단하기에는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강력한 추동력을 줄 수 있으며 우리 혁명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서막으로, 향하게 하는 일보 전진으로 만들 순 있습니다.


우리 당은 1905년이나 1917년 봄에 경험에서도 완전하게 확인된 이러한 사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다른 모든 당들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 속에 만들어졌고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위해 계속 투쟁해나갈 겁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는 승리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농민 대중은 피할 수 없이도 절박한 농업 개혁을 귀족들이 지닌 모든 대소유지를 몰수하는 데까지는 밀고 갈 순 있습니다. 이건 늘 우리에 구호였고, 현재까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 당에 중앙위원회와 당에 신문인 <프라우다>로부터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구호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으며, 농업 노동자들이나 그들에게 긴밀하게도 동맹한 가장 가난한 농민들을 한편으로 하고, 1907년에서 1914년에, 스톨리핀에 농업 '개혁'으로 입지는 강화된 부농들을 또 한편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는 없던 무자비한 계급투쟁에 눈을 감지는 않을 겁니다. 

1906년에 1차 두마와 1907년 2차 두마에선 104명에 농민 대표들은, 모든 토지에 국유화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선출된 지방위원회는 그걸 분배하기를 요구하던 혁명적인 농업법안을 제출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런 혁명들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는 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계 노동운동에는 커다란 추진력을 제공해줄 겁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입지를 넓힐 수 있고 ㄱ그들은 농업 노동자나 극빈 농민들에게까지도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엄청나게 강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영향력에 대한 힘 위로부터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같은 혁명적인 조직을 발전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조직들은 군대, 경찰, 관료제를 사용하는 낡은 억압 기구인 부르주아 국가들을 대체할 수 있고,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운 제국주의 전쟁이나 그 결과로 인한 압박 아래서도 상품에 생산이나 분배들을 통제하기 위한 일련에 혁명적인 방책들을 수행해나갈 겁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혼자만에 힘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에 대한 결말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출발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추동력을 러시아 혁명에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정세를 북돋아서 고양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으뜸가는, 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확실한 협력자인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정적인 전투에도 참전할 수 있을 겁니다. 


P.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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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철폐 찬성론에 대한 기본 전제 중에 하나는 이 전제는 언제나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지는 않지만은 전말은 이렇다. 


'우리는 전쟁, 즉 모든 전쟁 일반에 반대해서도, 

우리에 이 견해를 가장 분명하고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건 당연하게도 군비철폐 요구다.'


이게 왜 그릇된 생각인지는 나는 유니우스 소책자에 대해서도 논평한 글에서 충분하게 

밝힌 바 있다. 독자들은 논평을 참조해보자.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임을 그만두지 않는 

한, 모든 전쟁에 다 반대할 수는 없다. 물론 현재에 제국주의 전쟁은 눈감아주면 안 된다.

이 대국들 사이에 전쟁에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대에 전쟁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피억압

민족은 억압자에 대항해서도 스스로를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민주주의적이던 전쟁이나 봉기를 일으키는 건 충분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사회주의를 위해서 내란 또한 피할 수도 없다. 

한 나라에서 승리를 거둔 사회주의는 다른 부르주아 나라나 또는 반동적인 나라에서도 

전쟁을 하는 건 일어날 수 있다. 


군비철폐는 사회주의에서 이상일 뿐이다. 정작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전쟁은 없을거다. 그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군비철폐는 실현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사회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트에 독재 없이는 실현된다고 기대하는 자는 누구도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독재는 직접적으로 폭력에 기반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폭력은 문명 시대 일반에서 그렇듯이 주먹도, 곤봉도 아닌, 군대를 뜻한다. '군비철폐'를 강령에 넣는 건 '우리는 무기 사용에 반대한다'고 전면으로 공표하기에 다름 없으며 이 또한 '우리는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만큼이나 같다. 

여기에는 일말에 마르크스주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토론은 주로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독일어로 진행되고 있다는 건 유의하시길 바란다. 현재까지 우리도 이야기해 온 '군비철폐'에 대해서는 독일어로는 두 개에 단어로 쓰이고 있다. 둘 사이를 직접 구분해서 러시아어로 옮기는 건 쉽지는 않다. 'Abrüstung'이란 말은 본래 '군비축소'를 뜻한다. 이를테면 카우츠키와 그에 일파들은 군축에 뜻으로 쓰고 있다. 다른 건 

'Entwaffnung'이란 말도 있다. 본래 '군비철폐'를 뜻하는 걸로, 주로 좌파들은 군국주의에 대한 폐지나, 모든 군국주의적 제도에 대한 폐지에 뜻으로 쓰인다. 이 글에선 우리들은 후자에 요구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일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현재 통용되서, 두루 쓰이고 있는 이 후자에 대한 '군비철폐'에 대한 요구다. 제국주의 대국에선 현 정부를 향해서도 카우츠키 파에 '군축'에 대한 설교는 비속하기 짝도 없는 기회주의다. 그건 실제로는 감상적이기만 한 카우츠키 파들에 '선하기만 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평화주의는 노동자들을 혁명적인 투쟁을부터도 방기하고 심지어는 따로 떨어진,

유리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열강들에 현부르주아 정부들은 금융자본에 대한 수천 타래에 실들이나 그들 정부 사이에서 수 천아니라면 수 백에도 이에 즉각으로 상응하는 약탈적이고강도적이고,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는 비밀조약으로 얽어매여 있지 않다는 생각에는, 

그러한 설교로부터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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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으로 들어가, 십중팔구 여러 명의 독자가 이미 품어보았음직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게 어쩌면 뜻 깊을 거다. 왜 저런 신사양반들과 이토록 긴 지면을 할애해 논쟁했단 말인가. 그들은 기꺼이 반론이라 부르는 저 자유주의적인, 검열을 통과한 추잡한 주장들의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또는 '교양 있는'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맹공격으로부터도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러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격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에 전체를 이뤄 하나로 녹아들어갔던 예를 들면 체르니솁스키에 시대에도 그랬듯이 러시아 사회 발전에 시기로 아직은 되살아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지고 확실한 증거로 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는 사상적으로도 심오한 질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오늘날 일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는 여전히 고수되고 그들의에이론과 실천에는 가장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그런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는 넓은 간극은 존재하고, 그래서 현재에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때, 민주주의자들에 사상만으로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은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상으로 태동했던 시절에는 실제로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겠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그런 비교를 위한 충분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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