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에 ‘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는 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자,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量)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性)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아,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당한 목표 없는 경쟁을 물으며;


지금 벌어지는 AI 기업 간의 과열 경쟁은 단지 그들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군비경쟁(arms race) 구조가 이들 산업주체들의 전략적 경쟁논리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1960년대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더 큰 모델을 훈련하면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더 큰 GPU, 더 큰 데이터 센터(Data Center)’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보면 전혀 최적(最適)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과는 비효율적인, 즉 현재 투자 규모가 미래 전망에 의해 정당화되는 실제 수익보다 큰, 수요보다 기대가 먼저 움직이는 과다한 낭비이다.

 

<현대의 고전이 된 AI 윤리비평 >


AI의 미래 가치가 이미 현재 가격에 과도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부분의 과잉투자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우려이지만, 이 불합리성으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전가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대되는 미래가치를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대중은 그 비효율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고, 더구나 기술 편익을 누리는 사람과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지금의 AI 경쟁은 인류 자원의 측면에서 어떤 조건에서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마치 AI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무조건적 당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아가 과열 양상의 AI 산업에 그 어떤 면밀하고 세심한 도덕적, 정치적 고려도 없으며,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AI관련 연구나 저술들도 획일적으로 AI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저 효율적 사용방법에 맞춰져 있고, 더구나 AI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 제기도 대세에 낙오된 자의 푸념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AI 산업과 관련하여 예견되는 각양의 형태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고, 이러하다보니 그저 AI데이터 센터 건설이나 관련 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아예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관련 연구가 멸종하다시피한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AI 연구자들은 AI 기술의 현재가치 평가와 미래 세대 비용의 문제, 향후 50년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 경쟁적 인프라 구축의 경쟁적 투자의 문제, AI의 인류사회에 대한 편익(효용)의 문제, 기술의 가능성이 그 기술의 실행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기술적, 정치적 연구와 논의가 학계와 정책 분야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만큼의 AI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 때문에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가?"

 

AI가 필요한가? 라는 이미 떠난 기차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자원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AI 개발 목표가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술 자체보다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AI 의 숨겨진 비용을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


대중들은 AI를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기술을 역사학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하버드 역사학교수 질 레포어(Jill Lepore, 1966~)는 『인공人工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Artificial State)』(2026.8)이라는 조지오웰의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최근 저술에서 AI기술이 어떻게 “전 세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인간 공동체와 자치 능력을 파괴“했는지를 설명하면서 AI 국가의 등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서 봉건주의 파시즘,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체제들도 결국 해체되었듯 AI 체제도 해체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반(反)AI체제 논의도 있지만, 지금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AI체제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지금의 가공할 만한 자원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AI와 거대 기술기업들이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행세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당해 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국가 의지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압도하고, 나아가 잠식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 물음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미국 내 인디언 부족연합체인 체로키 네이션은 부족 소유지 내 AI 데이터 센터 건설을 금지하고, 부족 영토 내 다른 부지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 협의를 요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소비, 물(用水) 사용, 대기·소음·빛 공해, 문화유산 보호, 지역 사회가 ‘획득 가능한 실질적 이익’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전통적 숙고의 원칙인 ‘이로쿼이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란 것에 사유의 뿌리가 있다. 즉 ‘오늘의 선택이 7세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대략 정책 결정으로부터 200년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지역 사회가 감당해야하는 물, 전기, 토지에 비해 AI 데이터센터로부터 지역사회가 얻는 효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막대한 전력 소비, 대량의 냉각수 사용, 소음 및 빛 공해, 생태계 압박,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고용효과, 자원소비 대비 경제 기여가 턱없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주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공공요금 상승, 지역 물 공급 약화 등을 초래한다. 특히 막대한 전력 소비는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크며, 이는 지역 전력망 부담, 전기 요금 상승, 발전소 증설 압력으로 연결된다. 실제 이러한 요구가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 논의될 정도이다. 또한 데이터센터가 유치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경제효과가 해당 지역에 남는가? 로 바뀌어 실제 운영상태에서는 고용효과가 극히 작을 뿐 아니라 수익은 당해 기업의 본사로 집중되어 지역 경제에는 상대적 부담만 가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시적인 자원 효용과 배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데, 지역민이 감수하여야 할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어 민주주의 공동체 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보 비공개, 불투명한 협상, 사후 통보 등 절차 적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건설할 것인가가 중대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의무, 물 재활용시스템, 지역전력망 투자, 지역사회 이익공유, 환경영향 공개, 주민동의 절차 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사회는 이러한 법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적 법규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거대기업의 건설행위가 추진되고 있기에 각 지역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투자수익자가 비용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과실만 챙기려는 현재의 AI기업들의 체리피킹식 행태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나아가 데이터 주권과 AI정책의 수립에서 단지 적극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과 전기, 토지와 생태계의 비용은 나 몰라라 하고서는 지역민, 다른 공동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작금의 거대기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절대 교정(矯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50년 뒤에도 이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이 같은 정치철학적 질문 없이 행위가 앞서는 지금의 AI 국가 정책과 기술기업의 행보는 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AI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자원을 지금과 같이 소비할 만큼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증명하라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건설되는 엄청난 수의 AI데이터 센터와 이를 추진하는 거대 기술기업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AI가 인류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미국 및 유럽 대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의 투자 규모와 자원 투입이 그 목적에 비례하는지는 짙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대표저술 『책임의 원칙』에서 “현대기술의 파괴적 힘에 맞서 미래 세대와 자연환경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태학적 책임 윤리”를 주장했다.

 

<오늘 맞이하고 있는 기술은 현재의 도덕만을 말하는 전통 윤리로는 대응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문법을 지닌 AI는 새로운 윤리로서 '책임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AI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지구(생태)자원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없이 자본과 개발기술의 사용 논리에 압도된 자본헤게모니 쟁탈이 진행되다보니 윤리와 인류 복지와 정치적 문제를 건너뛰고 진행되는 기이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은 누구의 자원인가? AI가 창출하는 생산성 증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환경 비용은 어느 지역과 세대가 부담하는가? 기술 경쟁은 실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경쟁 자체를 위해 계속 확장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술공학보다는 정치철학, 환경윤리, 경제사에 가까운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기술기업이나 기술공학자들로부터 빼앗아 지금이라도 경제학자, 정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사회의 AI체제에 대해 그 근원부터 다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AI는 구름(cloud)이 아니라 광산(mine)에서 시작된다"

- Kate Crawford, 『The Atlas of AI(AI 지도책)』

 

AI의 숨겨진 비용부터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학계와 관련 연구자들은 이 중대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 학계는 'AI의 생애 주기에 대한 연구'가 중대하게 수행되고 있다. 사용 자원이 AI 잠재적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무수히 들려온다. 또한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정당한 목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목적인지, 테크노크라트의 사회를 통한 권력의 쟁취인지, 자본이라는 재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인지, 이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 국가(Artificial State) 부상의 성급함과 무모함에 대한 독보적 비판서>


이러한 연구 결과물중 AI 윤리비용을 추적하는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 1974~)의 『The Atlas of AI(AI 지도책)』 는 단연 돋보인다. AI 관련 윤리의 많은 연구들이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에 한정되어 AI 체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출신의 이 호주인 AI 연구가는 AI를 단순 기술로서가 아니라 자원, 노동, 데이터, 권력이 얽힌 거대 산업체계로 분석한다. 그래서 AI 윤리는 단순한 기업의 자율규제나 ‘착한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정의·노동권·데이터 권리·민주적 통제를 함께 고려하는 정치적 과제가 된다. 특히 크로포드는 AI를 자동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분류와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수집된 이미지와 개인정보, 무수한 데이터 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AI는 혁신 기술이라기보다는 자원 추출과 노동 통제, 데이터 수집, 권력 집중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총아일 뿐이라고 해부하고 있다.

 

오늘날 AI 기업들이 사용하는 '클라우드', '가상공간', '지능' 같은 표현은 마치 AI가 비물질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지만, 크로포드는 그 뒤에 있는 광산, 발전소, 데이터센터, 공급망, 그리고 인간 노동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 점에서 『Atlas of AI』는 앞서 언급한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즉, 문제는 ‘AI가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유용성을 위해 어느 정도의 토지·전력·물·희귀광물·인간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크로포드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술윤리서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정치경제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크로포드의 이 연구 결과물은 기술 비평서이며, 21세기 디지털 산업의 ‘환경사(環境史)’이자 ‘자원사(資源史)’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AI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라는 이 원색적 질문을 회피해서는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사회는 장기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린 듯하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계와 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편리에 어마어마한 인간의 삶을 그저 내버릴 가능성은 없는지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다시 사유해야 한다.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정치, 윤리, 인류경제를 모른 체하고 질주하고 있는 형세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자라는 이 무식한 도전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런 저급한 사회가 아니다.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반(反)AI, 반(反)기술주의가 아니다. AI산업이 한국 사회의 국민경제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기실적과 주가 중심의 경제시스템만으로 체제를 이해하는 정책은 정말 우려스러운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이로쿼이 7세대 원칙은 시간의 척도를 현재에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축,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수익자와 비용 부담자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물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차, 즉 이 사회 구성원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을 고려하는 윤리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AI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더욱 아름다운 구상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현대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책임의 범위도 그 만큼 길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제에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제 남의 뒤 만을 따라가는 과거의 후진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도스토옙스키 고백록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작가일기』는 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년 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 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작가일기』 중 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이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反)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 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살 ㅣ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가 2007년 10월 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한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한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성(城)』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흐린 날씨, 겨울, 비,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

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

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

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

젊음은 나를 떠나고

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 이창익 著,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쪽, 인간사랑 刊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자,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며,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 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  -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나’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P17, 열린책들 刊


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