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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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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