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고백록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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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작가일기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작가일기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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