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 이창익 ,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 인간사랑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  -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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