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
데라야마 슈지 지음, 손정임 옮김 / 미행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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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악덕, 저항, 독립’, 네 범주의 예찬(禮讚)’을 하고 있는 이 책은 1963년 첫 출간되었지만, 인간과 인간사회에 있는 그 항상(恒常)적 내용처럼 21세기 오늘과 동시대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반감의 냄새가 범상한 글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당대에는 급진성으로 비난과 공감의 물결이 마구 뒤엉켰을 문제작이었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흥미로운 것은 현학을 흉내 내거나 진지함을 방패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위선도 날려버린 날 것의 체 하지 않는 솔직함이다.

 

가출예찬을 비롯한 네 개의 예찬은 공히 오늘날 가족 제도의 근간인 ’, 페미니스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일부일처와 그들의 아이들로 견고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깨부수고 그 질척질척한 애정으로 묶인 혈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허위의식과 기만성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날아오르자는 변()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심리적 젖떼기이고,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자신의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엄마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의 내부를 해체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아이의 독립적 인생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한편 스위트홈의 중추인 부부중심의 결혼 제도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유명한 성()혁명론자이자 성정치론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주장을 토대로 관능적 체험의 결과로서의 성적인 애착의 충족 관계가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고, 오늘날 사회의 생산수단 사유화로서 경제 기반만을 문제 삼게 되면서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 에 씌워진 권위주의로 포장된 긍정의식을 해체하고 있다.

 

스위트 홈의 일부일처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사례로써 제법 길게 인용되고 있는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원작의 만화 사자에 씨(サザエさん)의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치 가장 정당한 이데올로기인 양 오늘날 가정을 지탱하는 일부일처제 중심의 에 대한 충성심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교조성을 비판한다. 집의 힘에 의해 거세당한 사자에 씨의 남편 마스오와 에로티시즘에 무관심한, 오로지 일부일처를 지켜야 한다는 체념에서 집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는 사자에 씨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복속된 집의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 내고 있다. 이 만화가 일본인들의 최고 드라마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각색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그네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성정치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통치하려하는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가출을 말하는데 있어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인데, ()에는 없는 노라의 가출 이후에 조명을 맞추어 집을 나가 매춘부가 되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노라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인형으로 취급했던 으로부터의 단절을 감행했다는 것, 즉 노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출한 것이므로 그녀 자신의 존재 형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선택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에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집, 노라와 헤르마가 마주해 창조해서 만든 집이 아닌 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 제도와 관련한 수많은 속박과 금기가 작동한다. 바로 이 금기로서 금지된 것들은 황홀감과 불안이라는 기묘한 쾌락을 대기시키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 금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으니 절대적 윤리 덕목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데라야마 슈지는 대다수의 스위트 홈을 둘러싼 금기란 생생한 연대성을 강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성을 잃지 않은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통에 찬성하지 않는데, 그 이유 또한 의외의 희극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계약으로서 사기인 기브앤테이크의 불균형때문이란다.

 

한국사회도 형사상 범죄에서 비범죄화한 것뿐이고 여전히 민법상 불법으로 보고 있으니 간통에는 신의(信義)의 원칙, 즉 경제적, 심리적 균형에 대한 기대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깊숙이 응시하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일부일처, 집에 대한 환상이라는 뿌리와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집이라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이 경제조건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 간통에 대한 불안한 법적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악의 예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디즘과 연결 지어 그 발음의 유사성을 지닌 아베 사다(阿部定)’의 실화사건을 소설(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 영화화한(오시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 가학적 성욕을 둘러싸고 사다이즘이자 사디즘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며, 이들이 이러한 소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새로운 모럴,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사색과 행동의 제안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상에 악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 선이 있고, 습관화된 선행 속에 악이 있지 않은 지 자문해 보라고, 스스로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모럴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당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행복의 질서는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렇게 악의 예찬을 읽다 그의 악의 숭배 속에 자유에 대한 인간적 욕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일상 파괴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이 예찬의 속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악을 숭배하는 것이지, 악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조금 시선을 달리해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비프야, 지금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안 돼. 모두가 너를 좋아해야 해.”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착각이 그를 하찮은 소시민으로 죽어가게 했다. 어떤 인간에 대한 확실한 평가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한 것이고, 욕을 먹음으로써 오히려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말끔하게 청결한 인간은 데라야마의 말처럼 무능한 인간이기 십상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의 시선에 속박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먼저 욕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데라야마의 충심은 스스로 얽어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아마 이 책을 구성하는 무수한 주제를 지닌 작은 글 조각들은 그 가리키는 곳의 삶의 엄중함 탓에 거의 모두가 매혹의 색채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약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가난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극적 연민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연대의식에 대해 막연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실체적인 책임과는 관계없이 분위기적 책임의식으로 치환하여 실질적인 무책임을 가린다.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센 강가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수영도 할 줄 모른다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 후 그는 강가 길을 피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걸으며 다시는 그런 갈등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요령을 부린다. 죄책감, 위선, 기만과 심판의 문제가 뒤섞인 이 장면은 오늘의 시대가 책임의 문제, 인간 윤리의 문제를 엄중히 시험대에 올려야 할 사안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문제들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수히 건네며,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사실 이 책으로 이끈 동기는 정기현 작가의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의 짤막한 소개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제안, 데라야마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에 대한 가능성의 소망이었다. 데라야마의 말을 거는 날이라는 글은 진짜배기 소통, 대화, 사교를 잃어버린 오늘의 사회 속에서 소외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과의 친교, 아니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임의 제안을 보게 된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임,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 등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지는 작은 모임이 많이 열려도 좋을 것이라며,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듯 대화내용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카타르시스를 향한 모임은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모임이 있다면 기발한 문예의 향연이고 친교 성장의 토양이 될 법도 하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기념일처럼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날로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법하기도 하다.

 

반짝거리는 생의 걸음 길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빛나는 이 책은 그것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맥락을 주의깊은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 그 부정과 저항의 몸짓들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삶의 생동력임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몰라 옮기는 것으로 맺으련다. 삶의 미묘함이란...

 

모두가 착한 사람이고, 날씨도 좋고, 작은 새들도 지저귀는 데 일어나는 비극...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사랑이나 증오는 사악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미묘함과 닿아 있어서 세 배로 눈물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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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올-타임 1
전경린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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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균형추가 어느 사이엔가 점차 죽음에 무게가 실리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이를테면 무기물이 되어 가는 과정의 시작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 이후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을 형상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들에는 기쁨과 행복의 웃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프고 아쉬운 것들과 때론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도 있지만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조차 소중한 감정으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자신의 어린 시절 어느 때의 시간을 그리는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의 화자도 따뜻하고 충만한 기쁨의 기억들뿐만 아니라 원망의 그늘을 드리웠던 슬픔과 흐느낌들을 더 없이 미소를 짓게 하는 자기 생의 원천으로 보듬는다. 그래서 화자는 누구나 자기 생의 밑바닥에 휘황한 보석이 깔려 있을까?” 라는 물음에 바로 긍정하며, 어린 시절에 묻어 두었던 보석의 황금빛 광휘라고 말한다. 화자는 나라고 하기엔 너무 먼 그 아이를 새별이라고 부르고싶어 한다. 그리고 기억 속 어린 자신은 새별이 되어 무한 생명성을 품고 환하게 살아난다.

 

슬픈 건 연못 같은 거야. 마음에 틈이 있는 것처럼 저절로 물이 새어 들었다.” -16

 

작은 틈새로 물이 새어 들어 연못이 되듯, 기억의 못에 자기 삶을 밝혀주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시간들이 마음에 가득 들어찬다. 딸아이에 대한 소홀과 방치를 그것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새별이의 슬픔은 마을 친구들, 언니들과 키득거리며 웃음 짓던 장면들과 엄마, 아버지로부터 거부의 손짓으로 내쳐지는 봉연 할매의 따뜻한 등의 온기, 웃음이 옆구리에서 자꾸만 터져 나오던 달구지 타고 장터로 가던 길의 추억들이 감싸며 삶의 자양분으로 포용된다. 수많은 웃음과 눈물을 지닌 낙원(樂園)으로서.

 

소설은 이처럼 어린 새별이의 낙원의 기억들이지만, 그것은 틈새로 스며든 간절한 흐느낌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새로운 동력으로서의 생명을 얻은 귀중한 감정들로 수용하게 되었을 테다. 왜 그 시절 엄마들, 사람들은 그토록 질긴 편견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항상 오빠, 남자아이가 우선되고 남은 찌꺼기만을 겨우 눈치 보며 긁어야만 하는 지독한 차별의 시선은 모진 세월 다 겪어 세상에 그 어떤 업보도 남기지 않게 된 봉연 할매의 세대를 건너 뛴 천륜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사랑으로 감싸진다.

 

그 모든 차별과 무관심의 슬픔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관류하는 댓잎과 구름을 흔들만큼의 새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들은 작은 종이배처럼 접혀 새별이의 마음에만 닻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시선도 한동안 머물게 했다. 그 일화적 장면들을 꺼내 올리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가에서 마을의 가장 친한 친구 재남이와 발가락으로 다리를 간질이고 달아나며 깔깔거리고, 함께하던 마을 언니들과 웃음을 터뜨리며, 뱃속이 간지러워 자신도 웃음을 터뜨리는 새별이의 천진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찍어 회피하는 사람들, 상이용사인 다리 하나가 없어 절룩거리며 걷는 희조 아재, 넋이 빠졌다는 복덕이, 뻘다니, 욕쟁이, 여장부로 불리는 봉연 할매도 새별이게는 무람없는 친교의 대상이다. 희조 아재의 절룩거림을 놀리고 달아나는 아이들의 무리와 달리다 누런 보리가 넘실넘실 춤을 추는 보리밭 한 곳을 깔고 누운 새별이와 풀꾹새, 여치, 신나게 웃으며 아이들을 좇다 어딘가에 자빠져 누워있을 희재 아재, 한나절의 이 장면은 차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마을 언니들을 따라 놀러갔던 재실에 깜박 잠든 새 언니들은 모두 사라지고 금지된 장소에 혼자가 되었음을 자각했을 때 새별이는 두려움으로 운다. 그때 엄마와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내쳤던 봉연 할매가 새별이를 업어 집에 데려다 준다. 이 장면은 오래된 어떤 그리움 때문에 내게 하나의 깊은 인상이 되었다. 허엉허엉 울자, 할매가 어이구 내 강생이, 어이구 내 강생이하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느꼈을 보호받음의 포근한 안락감은 그야말로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 언니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새별이는 자신이 아끼는 늘 업고 다니는 납작한 베개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주지 않는 결핍된 사랑의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이처럼 새별이의 흐느낌과 슬픔이 작게 새어들지만 그것들에 웃음의 밝은 빛이 비추어지면서 충만한 삶의 재료들이었음을, 지금의 나 자신의 빛나는 시간들이었음을 설득한다. 새별이는 엄마와 아버지, 형제로부터 살가운 보살핌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어린 새별이를 홀로 남겨두고 가족 모두가 서울로 가버린 날의 그 헛헛함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여섯 살짜리를 집에 홀로 두고 가버릴 수 있는 엄마. 장터에 봉연 할매와 함께 간 국밥집에서 듣게 되는 눈도 크고 입매가 야무진 기, 참 이뿌게 생깄네예.”하는 국밥집 여주인의 말은 더욱 버려진 상황과 대비되어 화자의 슬픔이 강조되어 떠오르는 듯하다.

 

천지간에 혼자 된 아 속이 만신창이가 됐을낀데...” 하는 봉연 할매가 막이 할매에게 하는 천륜의 이야기는 새별이의 상황과 겹치며 아마도 이 소설의 중심 정서(情緖)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나는 고마 갸만 잘 살면 된다하는 그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내리 사랑, 천륜이 부모 자식 사이를 말한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새별이가 놀라 입을 벌리는 장면은 이 의미를 엄마로부터 듣게 됨으로써 더욱 기막힌 장면으로 다가온다. 와 그라는데? 아니야, 아니야.” 새별이 마음이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는 말은 깊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엄마로부터 돌아 온 말은 속에 뭣이 들어앉았는지, 참말로 맹랑하기는.”이다. 이틀간 새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가족모두가 서울을 다녀 온 뒤 서울에서 찍은 사진에 새별이만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와 내만 서울에 없노. 나도 여기 있고 싶다.”라는 아이의 서러운 푸념, 친구 재남이에게 자신의 치마를 벗어주었을 때 새별이를 다그치는 엄마에게 내 거는 없나? 내 거는 아무것도 없나?”를 외치는 새별이의 분노가 내 마음을 휘젓는다. 여기에 그만한 일에 천륜을 입에 올리고, 아이고 여시 매구 같은 기.”라고 내뱉는 엄마의 말은 그녀의 딸아이에 대한 무신경의 수준일 것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산속 마을 집에 홀로 두고 이틀을 비운다는 것이 그만한 일일까? 그것에 천륜의 의미를 따져 묻는 것이 여우같은 짓인 걸까?


 엄마 천륜이 뭐꼬? 아가 맹랑하거로, 그런 걸 와 묻노?

부모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고 한다. 새별이는 놀라 입을 벌렸다.“ - 110


고운 천조각을 붙여 알록달록한 베갯잇을 한 작고 납작한 베개가 새별이에게 다시 안길 때 어린 새별이는 다시 사랑의 대체물을 돌려받은 것일 게다. 사랑의 상징성을 지닌 이 베개가 화려하게 돌아 온 것은 아마 새별이가 그 어리석은 차별의 슬픔에도 사랑을 잃지 않는 매개였을 것만 같다. 소설은 빛나는 어린 시절 낙원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그것은 온통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것의 작은 틈새로 스며드는 슬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황혼의 삶에 이른 누군가에겐 자신의 삶을 이룬 귀중한 기록일 것이다. 남은 생을 이어갈 삶 의지의 원천으로서 말이다. 산 속 깊은 마을의 감나무와 길바닥에 깔린 감꽃, 너울거리는 보리밭 물결, 새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들, 깊은 숲 속 보슬비 내리는 소리 같은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술처럼 펼쳐지는 세계에 모처럼 잠겼던 시간이다. 그 포근한 추억의 시간들, 자기애도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찬란한 빛이 가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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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간빙기, S, 카르마 씨의 범죄에 대해서

 

읽어 본 적 없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중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재앙을 기다리는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정글 속의 짐승이라는 작품이 있는가보다. 이것은 명명(命名)이 세계를 길들인다는 관념을 설명하는 예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정체불명의 그 무엇, 인간 이해의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 분류할 수도 없어, ()의 이름아래 포섭할 수 없는 개체를 우리는 흔히 뭉뚱그려 괴물이라 부른다.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것들은 이름이 부여되어 이미 인간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을 지닌 무엇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 안에 배치될 때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타자성이나 낯섦이 인간 세계의 인식구조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미지와 기지가 야기하는 인식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름을 갖기 전의 그 무엇인 개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아직 세계 속에 자리를 얻지 못한 미지의 존재일 뿐이라는 이해를 갖게 된다. 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다. 아베 고보의 대표적 작품들(대개 1950년대 발표)은 국내에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이형(異形)신체의 존재들과 SF적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아베 고보의 작품에 대해 내 관심이 환기된 것은 컴퓨터 계산으로 일어나는 종적 변신의 문제를 다룬 SF장편 4간빙기와 단편소설 S, 카르마 씨의 범죄에서의 신체의 물화와 변형에 내재시킨 다분히 21세기 현대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괴물성의 효과에 의한 각성이란 예술의 정통성으로부터

탈피와 동시에 현실 모순의 직시를 의미한다.”

 

아베 고보는 대중에게 친숙한, 즉 그 기이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 당연시되는 타계(他界)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져 의문부호를 첨가하지 않는 취향(趣向)화 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깊이 도려내기 위한 가설(假說)로서의 기이한 신체, 이형의 존재들을 계보화한 작가이다. 그는 분열된 현실, 무엇보다 그에 직면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모순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 유형화된 괴기는 그저 괴기취미일 뿐, 괴물성, 낯섦에 직면했을 때 순간의 망설임속에서 타자로서의 괴물을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바라봄으로써 문제의식을 부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문학을 취향의 허구들인 괴기문학과 구별하여 가설의 문학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 그의 가설의 문학 작품들은 괴물에 의해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여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소설이나 희곡작품들은 현실계와 충돌이나 갈등이라곤 없는 요정 또는 이미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동물원에 갇힌 괴수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내적 균열과 안정성의 파괴로 나타나고 공포라는 시대적 고뇌를 반영하여 불안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처럼 논리화가 거부된 것들을 배제하고 외면하여 자신들의 세계를 매끈한 균질적 안정성의 영역으로 만들어 그곳에만 시선을 고정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배제한 이름 없는 그것들에 논리가 부재하는 괴물성을 부과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논리화하는 순간 괴물성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괴물성의 사태는 우리들의 욕망과 인식의 지평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낯선 무엇에 대한 공포는 그것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틈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폭력과 비논리를 통해 희생시킨다. 아베의 작품들은 바로 이렇게 희생된 목소리들에 대한 논리화를 촉구한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생각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상(異常)사태 앞에서 순간 망설이게 된다. 이 순간의 망설임을 판단유보라 한다. 이 유보상태에서 우리는 어딘가로 생각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 낯섦, 이질적 공포를 오감의 환각 또는 상상력의 산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두 갈래 선택과 마주친다. 아마 많은 대중들이 괴기물을 오싹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즐기는 것은 전자일 것이고. 후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 온 세계에 대한 인식방법을 뒤집는 전복의 선택이라는 경이로움을 통한 새로운 사유로의 행보가 될 것이다. 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 고정된 탄탄한 질서로 간주되어 온 관념이나 개념, 정전(正典), 관습 등이 가변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에 나서게 된다. 그때 아베 고보 작품들의 이형화(異形化)된 신체들의 낯선 혐오와 공포는 현행의 규범적인 것들에 의문을 발하게 되고, 그 자체의 재인식을 촉진하는 전복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S, 카르마 씨의 범죄의 주인공 카르마 씨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 커피숍에서 장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려 할 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윽고 자기 재킷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려하지만 그곳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것, 아니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인물이 된 것이다. 이름 상실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존재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서 흔들린다. 이 작품은 이름 없는 괴물이 주는 불안을 카르마 씨라는 인물을 통해 체현한다. 이름 없는, 즉 규정 되지 않은 존재는 새로운 규정이 가능한 공백이다. 카르마씨는 그 공허한 가슴으로 사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자기 동일성을 상실한 존재가 이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채워 넣음으로써 기존의 신체와 다른 새로운 이질적 신체성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이질화된 신체의 존재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세상은 그를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소멸=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험인물로 찍혀 도망자로 변신한다. 이제 카르마 씨의 신체를 조사하기 위해 성장하는 벽 조사단이 파견되는 데, 이때 부단장 유르반 교수는 카르마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알아본 카르마를 향해 유르반(Urban;도시)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부성(父性)을 부정한다. 아마 이에 대한 조롱 혹은 비난의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르반은 작게 축소되어 카르마 씨의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아들의 체내로 회귀하고 다시 그곳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일종의 탄생을 겪는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권위의 위선과 경박함, 질서를 강조하지만 절서 체계는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후(戰後)시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시 권력의 주류로 복귀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철폐되어야 할 구질서 권력의 부조리를 향한 강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 한국사회에 그 비판인식을 그대로 이식해 읽게 되는데,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고 주류로 행세해 온 이 사회의 비틀린 기득권 집단의 천박한 탐욕의 끈을 끊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 분기점, 그 전환의 정점에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혹은 관료와 기업 등의 이해관계로 엮인 오랜 카르텔, 혈연과 지역이기주의의 타파를 위한 중대한 전환의 국면과 마주하고 있다는 자각이 떠올랐는데, 아마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신선한 새로움으로 읽힌다.

 

자본은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소모와 죽음에 의해 시장에서

철수하는 노동력을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해야 한다.”

 


한편 SF장편 4간빙기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과학기술주의자들과 자본이 결합한 컴퓨터 시스템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배경에서 70년 전의 작품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선견이 빛나는 매우 현대적 발상을 품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베 고보 텍스트들의 중요 모티브인 신체, 기계, 폭력이라는 문제가 정치와 합체된 과학테크놀로지와 신체 변형의 양상에 주목하며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특히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궁극적 목표는 일체의 외부가 없는 내적 논리에 근거한 자동운동임을, 외부 없는 완전 자동을 목표로 하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자본의 폭력성을 통찰하고 있는 점이다.

 

예언기계 KEIGI-1은 지구온난화와 지각변동으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육상 생활공간의 격감으로 지구 문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이때 테크노크라트들과 자본가들은 해저목장과 연구소를 은밀히 설립하고 인간 신체와 지구상 동물의 신체를 수서동물로 변형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종() 유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인간 태아를 사들여 유전자를 변형, 배양 사육한다. 과학기술자와 경제권력 연합은 환경변화에도 견뎌낼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출산, 보육 기계라는 더 효율적인 신체수탈 방법을 고안해 운용한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의지를 묵살하는 형태로 진화를 이루어가는 양상이고, 테크놀로지를 자본의 존속을 위한 인간 신체지배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오늘날의 인공지능까지 상상해 내지는 못했지만 과학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어선 금지된 실험을 실행했을 때의 인류에 대한 후과(後果)가 만들어 낼 통제력 잃은 과학에 대한 윤리적 사유를 제안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빌리에 드 릴아당 미래의 이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등의 통제력을 잃은 과학자들이 야기한 극한적 형태의 공포의 한 계보를 잇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이 화면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이 드러난 후보다 더 무섭다.” 그 이유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과 직면해 그 낯섦을 그저 즐기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유, 논리 부재에서 논리의 부여를 통한 인간 인식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 낯섦의 외면과 배제를 넘어 이 세계에 자리를 부여하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미지는 항시 우리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들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름 모를 숲속의 야수에게 사자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실체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통제할 인식과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이 사회가 배제한 타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고 괴물처럼 보여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나,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지능기계를 프랑켄슈타인, 에디슨, 스트레인지와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에 맡겨둔 채 환상에 갇혀 있는 어리석음에서 우리 자신들의 인식을 해방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다.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 언어의 현혹이 이 세계를 혼돈으로 잠식시키고 있다. 정작 요구되는 이름의 부여를 회피하면서 차별과 분리와 배제의 낙인을 찍어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인식의 편협성을 아베 고보는 집요하게 촉구하는 듯하다. 아베 고보는 오늘날 우리네 정치, 경제 현실 속 첨예한 문제들을 다각도에서 통찰한 작가이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 할 식민지 부역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은 오늘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강자에 대한 르상티망(resentment), 강자 동일시(모방)라는 노예의 도덕이 활개 치는 이 땅의 현실은 존 W. 다워의 미국과 일본의 구질서와 공범관계임을 지적한 패배를 안고서(Embracing Defeat)(1999)의 다섯 가지 핵심 정책들에서 그 실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한일 간의 외교현실에 놓인 그 고착된 혐오의 배경을 안긴다. 부패한 권력 시스템을 묵인하거나 동조해 온 70여 년의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뿌리 깊게 타자상(他者像)의 양산과 르상티망이라는 역겨운 노예의식(미국과 일본의 의존적 찬양)에 집착하면서 국민을 분리해 왔는지를, 우리 내면에 심어진 심리적 의존성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진부한 얘기이지만 괴물, 이름 없는 것들, 낯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가끔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괴물이 출현하도록 만드는 비판정신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성의 눈을 크게 뜨고 그 괴물, 이형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아베 고보의 작품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비판의 경고 메시지들을 보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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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의 탐스러움 픽셔너리 2
정기현 지음 / 북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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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은과 준영과 나, 우리는 이웃이다. 그리고 나는 이웃 그다음이 있다고 자꾸만 믿게 되는 것이다. (...) 내게도 세상에도 미지일 그다음 영역을 기꺼이 탐사해 보고 싶다.” -149

 

흥미로운 관점을 안긴 작품이다. 그것은 화자인 서른세 살 기현이 충주의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손이 닿았던 짐들을 가득 싣고 서울의 46제곱미터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여 그 공간을 넘어서 부려놓은 가구와 각종 기기들인 잔여(殘餘)물이다. 잔여의 소재가 소설 여러 플롯으로 가지를 뻗으며 그 인식론적, 존재론적 의미로 연결되는 구조의 경이로움이다.

 

이웃인 기은과 준영과의 친교의 일상으로, 동네 축제 임시계약직으로 타인에 대한 미소와 배려의 행동으로, 축제 연극 무대로, 살인 사건과 이 세계에 범람하는 실제 호러의 영상으로, 그리고 새로운 가족 형태의 제안으로, 시간과 분산된 위치로서 잔여가 얽혀들며 그 여러 이야기들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접착하듯 705호 기현이 이웃인 706호 기은과 준영 부부에게 드리는 책으로서 써진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의 메시지인 진짜 이웃관계를 당신들과 맺고 싶기 때문임이라는 주제에 이르게 한다.

 

짐으로 가득해 자기 집 현관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려 기현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길을 내기 위해 가구들을 하나씩 재활용폐기장에 내려놓기 시작한다. 문화비평가 리베카 슈나이더의 오래된 것을 소거(掃去)하는 모더니티(자본주의)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물간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이 구절처럼 기현이 버린 가구와 각종의 기기들은 내려놓기 무섭게 사라져 이웃집의 공간을 채운다. 누군가에 버려진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웃집 706호에는 내가 버린 가구들이 새 주인 아래 새로운 질서를 얻어 갑자기 들이닥친 옛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물꼬가 터진 705호 기현과 706호 기은과 준영 부부는 밥을 함께 먹고 소소한 일상의 화제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즉 기현과 기은,준영은 잔여로 맺어진 관계다. 이로써 잔여의 부정적 의미의 폐기성과 같은 진부한 타령인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분별을 초월해 그 자체로 세 사람의 시간과 공간적 삶에 얽혀든다. 그러던 어느 날 706호에 기현의 것이 아닌 손잡이가 달린 4단 새파란 나무 서랍장(또 하나의 잔여)’에 질투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평소 버려진 것들에 눈썰미를 거두지 않았던 기은, 준영이 주워온 것이다. 그러던 차에 TV뉴스에서 2년 전 벌어진 동장 납치 및 살해 사건의 중요한 단서인 새파란 나무 서랍장에 대한 소유자의 신고안내 방송을 보게 되고, 방송국에 동행하기도 한다. 슈나이더는 다층의 시간성과 분산된 위치성이 얽혀있는 것으로 잔여의 특성을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이제 새파란 나무 서랍장은 세 사람 이웃의 얽힘은 물론 과거 어떤 존재와 공간의 역사까지 얽혀든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기현 작가의 이 소설을 계속 읽도록 추동한 것이 바로 최초의 잔여인 기현의 짐 버리기와 그것의 위치 이동이고, 그 이동은 귀환하여 기현과 이웃의 관계 맺기로 얽혀들며, 또 다른 잔여인 파란 서랍장은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기억을 더한다.

 


잔여에 대해 얄팍하게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겐 잔여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옮겨져 채움이 된다. 그 잔여는 낯선 존재들의 관계를 매개하고, 옛 시간과 공간들의 기억이 얽혀든다. 그렇게 얽혀들어 새로운 현실적 질서로 재배치되어 어떤 미지의 형태로서 새로운 세계를 구현해 낼 가능성의 무엇을 품게 된다. 기현이 이웃집 706호의 공간과 사람들과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누고 교류하려는 것은 이 잔여의 매개로서의 성질이고, 이 잔여는 또한 기원(基源)의 문제에 가닿는다. 그래서 기현은 자신의 기원을 풀어놓는다. ‘가문이야기에서 기현은 이야기 수집가인 부모에 관해 말하던 중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말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자면 그곳에는 늘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기현은 타인의 말과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의 시선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타자와 자기가 분리되지 않은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은 존재의 감각을 지닌 사람이 보인다. 잔여에 얽혀있는 시간과 공간적 다층성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발하는데 단지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되기(becoming) 상태에 있는 기억에 대한 질문으로서 새로운 관계들과 잠재성들을 소환하는 사건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은 소설에서 기현과 기은, 준영이 함께 공연하는 축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연극을 하는 것인데, 이 연극의 내용이 2년 전 동장 살해와 사체 유기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고, 파란 서랍장은 그 사체 유기공간의 소품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공연이 완료되지 못한다. 이 연극 무대는 살아있는 것과 지나간 것이라는 정식 사이 미결의 공간으로서 잔여의 또 다른 측면인 교차 시간적 참여의 사유를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은 세 사람에게 분명 슬픔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당혹이었을 것이고, 706호에 모인 세 사람의 침묵의 대화 속에 기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때 개척교회 부목사인 준영은 기현의 마음을 토닥이듯 그녀의 손을 따뜻한 온기로 감싼 채 기도를 올린다. 기현의 마음의 목소리는 부부가 되면 이렇게 매일같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거야? 부부란 좋은 것이구나.”로 나지막이 울린다. 이로써 소설 제목 이웃집의 탐스러움이 기현의 관점임이 분명해진다.

 

동장의 살해 사건은 2년 전의 사건과 연관이 없음에도 두 번째 동장 살인사건이라 명명되어 거듭 재생 확산된다. 기현과 기은, 준영은 매주 금요일마다 세상의 탄식소리를 묵묵히 듣는 일로서 동급생 열 손톱 밑에 바늘을 꽂아 넣은 열다섯 아이, 잘 벼린 장검으로 애인 목숨을 반만 베곤 참된 대화를 나누었다는 어느 중년 이야기, 관리인을 때려 죽인 노숙인 이야기, 희생자 수를 경신해나가는 연쇄 살인마인 일명 첨단의 살인마에 대한 영상들을 시청한다. 이들은 왜 현실세계는 언제나 허구의 호러를 능가한다는 실체를 보았을까? 기현은 그 호러같은 현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그럼으로써 그 두려움으로부터 적어도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호러 장르의 순기능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기현은 기은과 준영을 위해 쓰고 있는 이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남김없이 박박 긁어 보여드리는 것으로서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웃 간의 다정한 교류를 넘어 맞잡은 손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죠. 너무 따뜻했고 왜 내게는 그동안 이런 감각을 선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걸까 슬프기도 했고요. 나도 배우자라는 게 되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격식 차리는 친밀함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친밀함이 이웃사이에 허락된다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안의 꿈에 이른다.


기현, 기은, 준영은 물론 그네들의 집에 ()배치된 사물들은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 형성되는 , 즉 그들 모두는 관계의 결과에 의해 어떤 존재가 비로소 된다. 페미니스트 물리학자 캐런 바라드(Karen Barad)가 제안하고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가 수용 발전시킨,  ‘관계가 존재보다 먼저이며, 개체는 관계의 결과라며 함께 만들기(sympoiesis)’라고 명명한 친족 맺기(making kin)’의 실천 형상 같기도 하.

 

또한 잔여라는 이동과 얽힘으로 비워진 것에 기현은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잔여로 이미 채워지고 얽혀있는데 다시 그것에 새로운 무엇을 채운다는 생각에 조금 거북한 반감을 느꼈다. 그것은 비워져 텅 빈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배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현은 잔여를 잘 못 생각한 것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 데라야마 슈지의 소설 가출 예찬과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최인훈, 손턴 와일더의 작품이 기현의 독서 경험 몇 가지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세상에 있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기현이 소망하는 이웃 그 다음이 있다고 자꾸 믿게 하는 그 미지의 영역은 무엇일까?

 

서로의 기원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기원으로부터 존재들의 서로 얽힘의 관계를 길어 올리고 싶어서일까? 점점 타인에 대해 냉랭하고 잔인한 시선이 고착화되고, 새로운 물질 생산이 마치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비자본주의 세상에서 잔여의 의미를, 그 얽힘의 사유를 제안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가능할지 회의를 떨치기가 쉽지 않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현실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는 현실에서의 용기 있는 실천의 제안이 정말 이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들릴 수 있기를 바란다.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말을 걸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날을 하루 만들어 

전국에서 단체 미팅하는 날처럼 지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 데라야마 슈지, 가출 예찬, 말을 거는 날161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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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듀나의 책공포의 문법》과는 그 이론적, 경험적 지평을 달리하며,  

다만 참고 도서의 하나임을 밝힙니다.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무더위의 계절이면 독서나 영화 시장은 슬그머니 호러(horror)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대체 인간의 원시적 감정인 공포를 자극하려는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곁에 머물러 마치 더위와 결합한 계절상품처럼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습관적 계절 행위에 편승하듯 30년 가까이 익명을 고수하는 작가 듀나의 공포의 문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호러 작품들을 열거하며 독자,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섭게 하려는 작품들의 테크닉에서부터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나 진실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서의 호러 장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결론에 가까운 장들에 이르러 실제 현실의 사악함은 언제나 허구를 뛰어넘는다고, 호러는 이처럼 사회의 억압된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의 괴물성을 들추어내어 인간과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호러의 사회적 가치는 사람들을 단순히 무서움에 떨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자극과 쾌감만을 소비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극만을 소비하는 디지털 환경 세계 속에서 마비된 지각과 편협성으로 인해 호러 작품들의 사회적 가치의 의도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호러 작품들이 왜 오늘에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의 독자적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 많은 질문을 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답변이 있다. 사람을 오싹함과 무서움으로 놀라게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평소 외면하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에 살아남았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공포를 이용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인간은 죽음, 질병, 타인의 적의, 신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근원적 불안을 살아가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기에 이 억압된 불안을 형상화함으로써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그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사천리의 답변들은 그리 명료하지도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여겨지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그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호러 작품들은 이러한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독자나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락산업으로서 폭력의 잔학성, 괴이한 공포를 안전한 장소에서 즐기는 쾌락의 소비를 판매하는 상품이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호러는 노골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판매하는 상품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고어(Gore)부류나 슬래셔(slasher film)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보다 신체훼손의 충격 자체를 상품화하는 감각소비 중심의 상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창작, 제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장르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과연 그것은 진정 공포를 이용해 무언가를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유를 명분으로 공포를 소비하는 자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장벽이다.

 


호러가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건드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변신, 샤이닝과 같은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기를 즐긴다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에 오래전부터 이같은 모순이 존재해 왔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호러를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진실을 탐구하는 장르라고 평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산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호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감각을 이용하는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사회비판까지 하나의 소비상품이 되는 오늘이기에 호러의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장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조차 상품의 포장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남는다. 왜 굳이 공포를 재현하는가? 수많은 비극, 전쟁영화, 범죄실화물, 심지어 뉴스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전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 재현은 진정 성찰인가, 아니면 소비인가?

 


공포의 문법에서 저자는 호러 작품들에 표현되는 공격성과 잔혹성이 이미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호러 작품이 새로운 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내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좀 더 냉철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호러 작가들이 그려내는 그 소름끼치는 표현들, 장면들의 충격적 이미지가 과연 사회를 구현하고 인간을 개선하는 도구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혹은 인간의 얇은 표면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진단 장치인 것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 책의 14남은 것들에 대하여에는 아버지 앞에서 이스라엘군이 22개월 어린아이를 고문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우리들은 아마 그 영상의 댓글에는 아이를 괴롭혀서 안 된다라는 보편적 윤리 준칙에 해당하는 글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거기엔 그러한 글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을 즐기며, 나아가 잔악한 글들로 도배되는 의외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보다. , 이미 현실 세계는 허구로서의 호러가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잔인한 곳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사례를 저자가 쓴 까닭은 이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호러 문학, 영화 따위가 무슨 순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의 배경으로 인용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미 실제 이러한 공포의 세계가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호러의 세계를 작품화하는 것에 더욱 현실적 의혹을 강화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 억압 문제를 드러내 성찰을 요구한다는 명분의 그 어떤 기만성 아닌가라는 의심 말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온라인 사회관계망이 보편화되기 전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이러한 정당성의 변론 가능성이 잔존했지만 이제 그런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허구적 호러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물의 장르 무용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다. 사회적 불안을 가시화한 언어로서, 타자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세상에 우리는 도달해 있다.

 


이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려는 오래되고 강력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장르에 대해 그것이 과연 소비하는 장치인지, 성찰의 장치인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더욱 민감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각성의 변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문화산업은 비판마저 상품으로 소비시킨다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낙관론에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력과 잔혹성을 재료로 공포를 효과로 이용하는 장르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감수성의 둔화로 더 큰, 상상 초월의 잔혹성으로 무감각한 비도덕의 지대를 일상화 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감각의 작동이 멈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안전한 거리에서 공포를 경험하는 것, 마치 비극을 보며 슬픔을 경험하듯, 실제 위험은 없지만 위험을 체험함으로써 긴장과 해방의 감정을 얻는 것은 분명 일상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어떤 순기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자극에 머문, 하나의 쾌락으로서 감정의 소비에 머무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을 괴물화하는 하나의 무감각의 양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게 된다. 어쨌거나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드거 앨런 포, H.P러브크래프트, 스티븐 킹, 아니 그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그리고 발 루튼, 조지 로메로, 스탠리 큐브릭, 리들리 스콧, 마틴 스코세이지 등 지난 호러 걸작들을 살펴 볼 일이다. 특히 스티븐 킹이 원한을 삼켰던 자신의 소설 샤이닝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던 큐브릭의 작품과 비교하며 그 맹렬한 거부감을 들끓게 했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주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사이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지 흥미로운 과제를 풀어보아야 할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 이야기>는  심스의 구멍Horror)(Symmes Holes)’이라 불리었던 '지구공동설'과 관련한 SF상상의 한 자락을 발견하는 새로운 독서가 되어줄 듯하다. 19세기 남극이 상징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아는 세계 밖의 공간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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