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간빙기』, 「S, 카르마 씨의 범죄」에 대해서
읽어 본 적 없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중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재앙’을 기다리는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정글 속의 짐승」이라는 작품이 있는가보다. 이것은 명명(命名)이 세계를 길들인다는 관념을 설명하는 예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정체불명의 그 무엇, 인간 이해의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 분류할 수도 없어, 종(種)의 이름아래 포섭할 수 없는 개체를 우리는 흔히 뭉뚱그려 괴물이라 부른다.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것들은 이름이 부여되어 이미 인간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을 지닌 무엇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 안에 배치될 때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타자성이나 낯섦이 인간 세계의 인식구조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미지와 기지가 야기하는 인식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름을 갖기 전의 그 무엇인 개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아직 세계 속에 자리를 얻지 못한 미지의 존재일 뿐이라는 이해를 갖게 된다. 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다. 아베 고보의 대표적 작품들(대개 1950년대 발표)은 국내에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이형(異形)신체의 존재들과 SF적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아베 고보의 작품에 대해 내 관심이 환기된 것은 컴퓨터 계산으로 일어나는 종적 변신의 문제를 다룬 SF장편 『제4간빙기』와 단편소설 「S, 카르마 씨의 범죄」에서의 신체의 물화와 변형에 내재시킨 다분히 21세기 현대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괴물성의 효과에 의한 각성이란 예술의 정통성으로부터
탈피와 동시에 현실 모순의 직시를 의미한다.”
아베 고보는 대중에게 친숙한, 즉 그 기이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 당연시되는 타계(他界)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져 의문부호를 첨가하지 않는 취향(趣向)화 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깊이 도려내기 위한 가설(假說)로서의 기이한 신체, 이형의 존재들을 계보화한 작가이다. 그는 분열된 현실, 무엇보다 그에 직면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모순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 유형화된 괴기는 그저 괴기취미일 뿐, 괴물성, 낯섦에 직면했을 때 ‘순간의 망설임’ 속에서 타자로서의 괴물을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바라봄으로써 문제의식을 부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문학을 취향의 허구들인 괴기문학과 구별하여 ‘가설의 문학’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 그의 가설의 문학 작품들은 ‘괴물’에 의해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여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소설이나 희곡작품들은 현실계와 충돌이나 갈등이라곤 없는 요정 또는 이미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동물원에 갇힌 괴수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내적 균열과 안정성의 파괴로 나타나고 공포라는 시대적 고뇌를 반영하여 불안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처럼 논리화가 거부된 것들을 배제하고 외면하여 자신들의 세계를 매끈한 균질적 안정성의 영역으로 만들어 그곳에만 시선을 고정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배제한 이름 없는 그것들에 논리가 부재하는 괴물성을 부과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논리화하는 순간 괴물성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괴물성의 사태는 우리들의 욕망과 인식의 지평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낯선 무엇에 대한 공포는 그것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틈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폭력과 비논리를 통해 희생시킨다. 아베의 작품들은 바로 이렇게 희생된 목소리들에 대한 논리화를 촉구한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생각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상(異常)사태 앞에서 순간 망설이게 된다. 이 순간의 망설임을 판단유보라 한다. 이 유보상태에서 우리는 어딘가로 생각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 낯섦, 이질적 공포를 오감의 환각 또는 상상력의 산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두 갈래 선택과 마주친다. 아마 많은 대중들이 괴기물을 오싹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즐기는 것은 전자일 것이고. 후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 온 세계에 대한 인식방법을 뒤집는 전복의 선택이라는 경이로움을 통한 새로운 사유로의 행보가 될 것이다. 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 “고정된 탄탄한 질서로 간주되어 온 관념이나 개념, 정전(正典), 관습 등이 가변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에 나서게 된다. 그때 아베 고보 작품들의 이형화(異形化)된 신체들의 낯선 혐오와 공포는 현행의 규범적인 것들에 의문을 발하게 되고, 그 자체의 재인식을 촉진하는 전복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S, 카르마 씨의 범죄」의 주인공 카르마 씨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 커피숍에서 장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려 할 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윽고 자기 재킷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려하지만 그곳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것, 아니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인물이 된 것이다. 이름 상실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존재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서 흔들린다. 이 작품은 이름 없는 괴물이 주는 불안을 카르마 씨라는 인물을 통해 체현한다. 이름 없는, 즉 규정 되지 않은 존재는 새로운 규정이 가능한 공백이다. 카르마씨는 그 공허한 가슴으로 사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자기 동일성을 상실한 존재가 이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채워 넣음으로써 기존의 신체와 다른 새로운 이질적 신체성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이질화된 신체의 존재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세상은 그를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소멸=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험인물로 찍혀 도망자로 변신한다. 이제 카르마 씨의 신체를 조사하기 위해 ‘성장하는 벽 조사단’이 파견되는 데, 이때 부단장 유르반 교수는 카르마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알아본 카르마를 향해 유르반(Urban;도시)은 ‘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부성(父性)을 부정한다. 아마 이에 대한 조롱 혹은 비난의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르반은 작게 축소되어 카르마 씨의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아들의 체내로 회귀하고 다시 그곳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일종의 탄생을 겪는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권위의 위선과 경박함, 질서를 강조하지만 절서 체계는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후(戰後)시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시 권력의 주류로 복귀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철폐되어야 할 구질서 권력의 부조리를 향한 강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 한국사회에 그 비판인식을 그대로 이식해 읽게 되는데,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고 주류로 행세해 온 이 사회의 비틀린 기득권 집단의 천박한 탐욕의 끈을 끊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 분기점, 그 전환의 정점에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혹은 관료와 기업 등의 이해관계로 엮인 오랜 카르텔, 혈연과 지역이기주의의 타파를 위한 중대한 전환의 국면과 마주하고 있다는 자각이 떠올랐는데, 아마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신선한 새로움으로 읽힌다.
“자본은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소모와 죽음에 의해 시장에서
철수하는 노동력을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해야 한다.”
한편 SF장편 『제4간빙기』 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과학기술주의자들과 자본이 결합한 컴퓨터 시스템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배경에서 70년 전의 작품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선견이 빛나는 매우 현대적 발상을 품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베 고보 텍스트들의 중요 모티브인 신체, 기계, 폭력이라는 문제가 정치와 합체된 과학테크놀로지와 신체 변형의 양상에 주목하며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특히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궁극적 목표는 일체의 외부가 없는 내적 논리에 근거한 자동운동”임을, 외부 없는 완전 자동을 목표로 하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자본의 폭력성을 통찰하고 있는 점이다.
예언기계 KEIGI-1은 지구온난화와 지각변동으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육상 생활공간의 격감으로 지구 문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이때 테크노크라트들과 자본가들은 해저목장과 연구소를 은밀히 설립하고 인간 신체와 지구상 동물의 신체를 수서동물로 변형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종(種) 유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인간 태아를 사들여 유전자를 변형, 배양 사육한다. 과학기술자와 경제권력 연합은 환경변화에도 견뎌낼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출산, 보육 기계라는 더 효율적인 신체수탈 방법을 고안해 운용한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의지를 묵살하는 형태로 진화를 이루어가는 양상이고, 테크놀로지를 자본의 존속을 위한 인간 신체지배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오늘날의 인공지능까지 상상해 내지는 못했지만 과학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어선 금지된 실험을 실행했을 때의 인류에 대한 후과(後果)가 만들어 낼 통제력 잃은 과학에 대한 윤리적 사유를 제안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빌리에 드 릴아당 『미래의 이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등의 통제력을 잃은 과학자들이 야기한 극한적 형태의 공포의 한 계보를 잇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이 화면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이 드러난 후보다 더 무섭다.” 그 이유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과 직면해 그 낯섦을 그저 즐기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유, 논리 부재에서 논리의 부여를 통한 인간 인식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 낯섦의 외면과 배제를 넘어 이 세계에 자리를 부여하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미지는 항시 우리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들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름 모를 숲속의 야수에게 사자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실체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통제할 인식과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이 사회가 배제한 타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고 괴물처럼 보여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나,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지능기계를 프랑켄슈타인, 에디슨, 스트레인지와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에 맡겨둔 채 환상에 갇혀 있는 어리석음에서 우리 자신들의 인식을 해방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다.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 언어의 현혹이 이 세계를 혼돈으로 잠식시키고 있다. 정작 요구되는 이름의 부여를 회피하면서 차별과 분리와 배제의 낙인을 찍어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인식의 편협성을 아베 고보는 집요하게 촉구하는 듯하다. 아베 고보는 오늘날 우리네 정치, 경제 현실 속 첨예한 문제들을 다각도에서 통찰한 작가이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 할 식민지 부역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은 오늘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강자에 대한 르상티망(resentment), 강자 동일시(모방)라는 노예의 도덕이 활개 치는 이 땅의 현실은 존 W. 다워의 미국과 일본의 구질서와 공범관계임을 지적한 『패배를 안고서(Embracing Defeat)』(1999)의 다섯 가지 핵심 정책들에서 그 실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한일 간의 외교현실에 놓인 그 고착된 혐오의 배경을 안긴다. 부패한 권력 시스템을 묵인하거나 동조해 온 70여 년의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뿌리 깊게 타자상(他者像)의 양산과 르상티망이라는 역겨운 노예의식(미국과 일본의 의존적 찬양)에 집착하면서 국민을 분리해 왔는지를, 우리 내면에 심어진 심리적 의존성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진부한 얘기이지만 괴물, 이름 없는 것들, 낯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가끔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괴물이 출현하도록 만드는 비판정신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성의 눈을 크게 뜨고 그 괴물, 이형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아베 고보의 작품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비판의 경고 메시지들을 보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