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핫: 발열 시대의 이미지
히토 슈타이얼 지음, 이계성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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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만들어내는 평균적 세계의 이미지들, 

텍스트들은 어떤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는가?


책의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괴한 형상의 표지 이미지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저자가 2024년 스테빌리티 AI가 공개한 오픈소스 모델 디퓨전 3(SD3) 미디엄에 “‘풀밭 위에 누운 소녀’라는 무해한” 요청을 프롬프트에 입력하고 그에 반응해 내놓은 출력 이미지라는 말 밖에 모른다. 히토 슈타이얼이 정확하게 어떤 형용을 추가한 요구를 써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요청에 의해 생성된 사지가 뒤틀린 기괴한 이미지가 책 표지의 생물체 이미지다.

 

【표지 및 62쪽, 스테이블 디퓨전 3가 ‘풀밭위의 소녀를 생성한 이미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기계학습 재료로 수집된 대량의 데이터와 그 학습을 위한 막대한 에너지자원의 소비의 결과가 이것인가? 우린 AI, 나아가 AGI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위해 미친 듯 자원을 쏟아부으며 맹렬하게 독점적 지위를 선점하기위해 광란의 질주를 하는 기업들 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AI에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을 향한 2017년부터 2024년에 이르는 이미지 제작 현장에 대해 2025년 출간한 일종의 현장 보고서가 이 저작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이 책은 생성형 AI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창작 도구로 바라보지 않는, 즉 AI 자체에 대한 기술 비평이나 예술 비평을 넘어선다. 그것은 생성형 AI를 둘러싼 기술, 자본, 국가, 전쟁, 노동, 이미지, 정치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려는 오늘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비판적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AI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가 아니라 ‘AI는 어떤 사회,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잃고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1. 위기 자체를 성장 동력으로 하는 AI

 

우선 슈타이얼은 생성형 AI의 등장을 기술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금융위기, 팬데믹, 기후위기, 전쟁, 극우 정치의 부상이라는 다중 위기 속에서 출현한 현상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AI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라기보다, 위기 자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자본주의적 프로젝트와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즉 생성형 AI는 이러한 세계의 위기와 무관하게 등장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들을 새로운 경제적 기회로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체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한다.

 

특히 슈타이얼은 AI와 전쟁의 결합을 중요한 문제로 제기한다.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전쟁터가 아니라 AI 기반 감시 체계와 표적 생성 시스템, 자동화된 군사 기술이 실험되는 거대한 연구소가 되었다. 팔란티어와 같은 기업들이 군사 데이터를 분석하여 전장에 활용하는 사례는 AI 발전이 국가안보 논리와 군비 경쟁 속으로 깊이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를 생산하는 장치처럼 기능하기 시작한다. 범용 인공지능과 초지능 개발 경쟁은 결국 ‘승자독식’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국가와 기업은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이러한 가속주의적 담론이 실제로는 소수의 기술 기업과 초고액 자산가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이 지금 전쟁을 끝낼 의지를 보이지 않은 요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2. 통계적 산물로서 AI 생성물이 의미하는 것 - 평균성, 누구를 위한 평균인가, 그것이 수렴하는 것은?

 

그녀의 비판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생성형 AI는 흔히 창조적 도구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미술사와 인터넷 전체에 축적된 방대한 인간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수집하고 평균화하여 재가공하는 체계에 가깝다. 따라서 AI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사진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실재와의 접촉이 아니라 확률과 통계에 기초한다. 과거 사진이 현실의 흔적이었다면, AI 이미지는 데이터세트 속 관계들의 평균값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실이나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개연적인 것, 가장 그럴듯한 것, 가장 자주 등장한 것에 수렴한다.

 

【 본문 78쪽, 상단 이미지: LAION-5B 데이터 세트의 학습재료/ 하단 이미지: 스테이블 디퓨전이 생성한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

 

이 심층학습 텍스트2 이미지 생성기 중 하나인 LAION-5B데이터 세트에 그녀의 사진도 몇 장 들어있는 모양이다. 슈타이얼은 모델에게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를 생성해달라고 요청한다.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을까? 날조로 증강된, 사회적 신호들을 극단적 논리로 밀어붙인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동양인의 이미지를 내놓는다. 슈타이얼은 화가 많이 났을 테다. 얼굴인식의 편향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위선적 명분에 기대 유령같은 인종화된 표현형으로 사회관계를 고도로 이념화된 최적치로 수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슈타이얼이 말하는 ‘통계적 사실주의’에 숨어있는 권력의 편향이다. AI는 대규모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추출하여 이미지를 생성하지만, 그 과정은 현실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양적 축적에 의존한다. 충분히 많은 데이터를 모으면 세계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현실을 이해하기보다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 위험을 내포한다. 생성된 이미지는 특정 개인이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평균적 인간상과 평균적 세계를 시각화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슈타이얼이 언급하는 ‘야누스 문제’이다. 드림 퓨전이나 텍스트 투 3D와 같은 시스템은 종종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이 결합된 기이한 인물을 생성한다. 이는 기계학습이 얼굴 인식에 지나치게 편중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집단을 대표하는가? 반대로 군중은 어떻게 하나의 얼굴로 표상될 수 있는가? AI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수많은 얼굴들의 평균적 합성물이다. 이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집단적 통계가 만들어낸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이 지점에서 슈타이얼은 19세기 우생학자 프랜시스 골턴의 합성사진을 떠올린다. 골턴은 범죄자, 유대인, 결핵 환자 등의 사진을 겹쳐 특정 집단의 ‘전형적 얼굴’을 만들려 했다.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평균적 얼굴 역시 이와 유사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인종화된 표현형이나 사회적 편견이 데이터세트 속에 축적될 경우, AI는 그것을 객관적 현실인양 재생산한다. 데이터는 복잡한 사회적·역사적 과정을 삭제한 채 마치 특정 특성이 집단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매개와 해석의 과정이 사라지고 통계적 결과가 곧 진실인 것처럼 제시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조건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AI는 서로 연관된 평균치를 계산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치를 향해 수렴한다. 예컨대 아름다움, 성공, 생산성의 기준은 평균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 모델을 규범으로 제시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범이 자연스럽고 자생적인 결과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시장의 이해관계와 알고리즘적 최적화, 수많은 가중치와 매개변수가 작동하고 있다. 신경망의 은닉층은 이러한 사회적·이념적 개입을 가린 채, 결과만을 객관적 사실처럼 드러낸다.

 

3. AI의 물질적 토대가 말하는 것 -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체계

 

슈타이얼은 또한 AI의 물질적 토대를 강조한다. 생성형 AI는 막대한 전력과 자원을 소비하며, 데이터센터와 화석연료 기반 인프라에 의존한다. 따라서 AI는 비물질적 정보 기술이 아니라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 체계다. 화석연료를 태워 얻은 에너지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녀가 “이익은 사유화되고 위험은 사회화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이터를 제공한 이용자들, 콘텐츠를 만든 창작자들, 편향을 제거하기 위해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미세노동자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기술 기업들은 그 성과를 독점한다.

 

결국 슈타이얼이 비판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AI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이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확장하는 도구일 수 있지만, 동시에 전쟁을 자동화하고,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며, 편향과 차별을 재생산하고, 방대한 무급 노동을 수탈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AI가 얼마나 더 강력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며, 그 혜택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슈타이얼에게 AI는 미래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반향적 실체이며, 우리는 그 반영 속에서 기술의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와 인간 사회의 미래를 보아야 한다.

 

한편 슈타이얼은 AI가 문화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우려한다. AI는 대규모 데이터의 평균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예외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을 점차 제거하고 가장 그럴듯한 것만 반복한다. 이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현상으로 나타나며, 결국 문화는 획일화되고 상투화된다. 인터넷과 AI는 표현 비용을 낮췄지만, 그 결과 형성된 공론장은 깊은 정치적 조직화보다 단기적 관심과 인정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다. 정치 역시 점점 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며, 연대보다는 정체성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비판의 밑바탕에는 더욱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놓여 있다. 상식은 무엇인가? 인간의 직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개인과 집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AI는 인간의 사고를 모방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통해 세계를 계산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판단과 경험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4. 결어 - 생성형 AI, 범용 AGI를 향한 궁극적 각축전의 의미; 현대사회의 권력구조의 거울

 

반복하지만 슈타이얼의 핵심 주장은 생성형 AI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AI가 생산하는 것은 이미지뿐 아니라 평균성, 순응성, 군사화, 착취, 그리고 통계적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가?”, “누가 이 시스템을 소유하고 통제하는가?”, “확률이 진실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의 판단과 정치적 책임은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슈타이얼에게 AI 비판은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의 미래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인 셈이다.

 

슈타이얼은 AI 자체를 본질적으로 악한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점이다. 오히려 그녀는 반복해서 ‘왜 현재의 AI가 이런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비판 대상은 기술 자체라기보다 기술을 둘러싼 자본주의적·군사적·국가주의적 권력장치(dispositif;배치)에 가깝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란 바로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생성형 AI는 단순한 이미지 생산 기술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이 세계를 평균화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거대한 통계적 장치이며, 따라서 AI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슈타이얼의 통찰로 마무리하련다. “기계 학습 이미지는 정체된 시각적 *슬롭을 만들어내는 최적화 시스템”이라는 지적이다. 이것은 평균을 향해 수렴하여 중간이라는 통계적 조합, 그 주변을 공전하면서 협소한 주류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장성 발현이다. 관습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상의 정규분포곡선에 몰려들며 고만고만한 이미지와 텍스트로 귀결되는, 그러함으로써 문화의 교착과 획일화를 조성한다. 결국 과거를 끝없이 변주하는 수구성과 획일성이라는 전체주의는 오늘 AI의 본질에 내재된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사실 슈타이얼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압축적이고, 철학·미디어이론·정치경제학·기술비평이 뒤섞여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논점이 흩어져 보이기 쉽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축은 의외로 단순하다. "AI가 만들어낸 평균적 세계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가?", "지금 AI가 학습하고 있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플랫폼 사회가 이미 왜곡해 놓은 세계상은 아닌가?" 로 압축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AI 기술철학+ AI 정치경제학’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사회가 가진 규범과 편견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아마 이 글의 소임은 다한 것일 테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1966.1,1~), 독일 뮌헨 출생의 일본계 독일인,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중】


*AI 슬롭(AI Slop):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단어다. 이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량 생산된 ‘저품질의 디지털 콘텐츠‘라는 뜻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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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6 ㅣ 소설 보다
구소현.남궁지혜.박민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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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문지문학상〉 후보작들을 ‘이 계절의 소설’로 세 편씩 선정해 소설선집을 꾸려 펴내는 《소설보다》를 매 계절 읽으며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문득, 아니 새삼스레 알아차렸다고 해야 할까? 이 선집에는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들이 해당 단편작품에 이어 실려 있다. 그 글들을 읽으며, 평론가들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또한 다정하지만 엄격한 시선들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작품을 떠나 작가의 다른 장소와 지면에서의 지나가듯 언급한 말(문장)들 조차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려는 노고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 선집은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젊은 소설가들과 그네들의 작품 뿐 아니라 문학평론가들의 독해 관점을 엿보는 작은 통로로서 독자 대중과 평론가를 이어주는, 그래서 그들과 독자들이 연결되는 가교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은 말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았다.

 

소설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즐거운 나라」를 쓴 박민경 작가의 예전 인터뷰 내용 “코끼리를 좋아합니다. 눈은 온순한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를 상기하며 이소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을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예술가 소설로도 읽을 수 있었음을 말할 때, 작가의 조심스러움만큼이나 독자의 읽기에도 다정한 주의 깊음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신나라’가 소설 첫 문장에 타율적으로 등장할 때, 그녀의 “나 좀 살자!”라는 절규의 강렬함은 여느 코믹한 온라인 숏컷의 한 장면처럼 가벼운 흥미로 다가왔다. “짐승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저항하는 거구의 여성이 담겨있는 충격적 영상”은 이미 그 후의 소설 속 설명 없이도 이미 독자의 상상 속에서는 빠른 인터넷 유포와 확산을 이어가며 희화화되는 과정을 그릴 수 있다.

 

‘살자녀’로 불리는 밈으로 폭발적으로 소비되는 이 사회 저변의 욕망, 인간들의 변하지 않는 본성들이 배경처럼 빠르게 흐른다. 사실 나는 거의 눈이 지면(紙面)위를 날아다닐 정도로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에 빠져 읽었다는 것은 내게도 오직 큰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거부하는 부당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제로,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정상성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암묵적이고도 끈질긴 배제”의 몸짓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소설들에서 나는 가벼운 경쾌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이 소외나 배제의 고통이나 고뇌라는 바다에 푹 절어 있는, 그 찰랑거리는 수면의 가벼움에 올라 타는 즐거움에 빠지면서도 바로 그 물 속에 깃든 이 세계의 무거운 속살을 직면케 하는 웃음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경박함의 역설이랄까? 마치 소설 속 살자녀 밈이 “반복될수록 가벼워져 멀리 흩어짐”으로써 마침내 누구든 읽을 수 있는 것이 되는 역설처럼 말이다. 신나라의 절규가 왜 터져 나왔는지, 그 절규는 우리들 사회의 어떤 모습이 만들어냈는지를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해내는 여정이 될 것 같다,

 


「측은지심」의 남궁지혜 작가는 홍성희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능청스러움이 제 안에서 좀 더 커졌으면 해요.”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유쾌한 능글맞음이 차고 넘쳐흐른다. 소설은 코인으로 인생 말아먹고 “사람다운 채팅봇 노릇”으로 로맨스 스캠 알바를 하는 ‘나’라는 인물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심리적 육체적인 권력관계의 자리 변동을 관찰케 하는, 그로부터 인간성, 혹은 윤리성의 생각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소설의 소재인 스캠(scam)사기는 캄보디아에서의 한국인 피살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큰 관심을 유발했던 악랄한 신종 범죄이다.

 

주인공의 대사나 행위가 하도 유쾌하게 그려져서 마치 징글맞은 범죄 현장이 희극같이 느껴졌는데, 이 작품의 묘미 중 하나는 남의 불행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을 뜻하는 제목 측은지심처럼 주인공 ‘나’라는 인물이 거짓과 기만의 행위를 하며 이러한 자신의 얄팍한 마음을 정당화하는 인간성을 표현하는 이 말을 중심으로 관찰토록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캠 범죄에 가담한 인간들의 모순된 위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양상과 이들에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 이 범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통속적으로 그 구체적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 “사랑한다면서 고추 안 보여주는 심리는 뭘까”라는 이 발칙한 물음은 피해자가 될 표적에게 젊은 여성인 채하는 채팅봇을 연기하여 기만한 뒤에 표적으로부터 받은 고추 사진과 채팅 글들로 위협하여 재산을 갈취하는 ‘나’가 수입원으로 낚아채지 못해 아쉬워하며 표적의 심리를 고민하는 구절이다. 측은지심을 곱씹으며 이 인물을 따라가는 내내 그 어리숙함에 내재된 윤리적 불모성과 정당화의 임기웅변 등 오늘 우리들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소위 AI시대의 미세노동의 기만적 실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남궁지혜 작가의 「측은지심」이 스캠 범죄의 현장 속에 있는 인물을 통해 진짜와 가짜, 진심과 위선, 신뢰와 기만의 경계를 오가며 물음을 던졌다면, 구소현 작가의 「화이트 데이」는 진짜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부족한 오늘의 사회에서 가짜를 진짜라고 믿기를 스스로 요구하는 현실을 깊숙이 찌른다. “하늘의 날개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이비 종교 약속천익사원이 신도 착취와 사기, 살인교사, 불법 의료행위로 고발되며 세상에 알려지자 교주가 죽음으로써 해체됨에 따라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의 이후 삶의 양태를 다룬다.

 

소설은 성장한 세 인물의 삶의 현실을 쫓는데,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 빠져들거나 중독된 삶을 살아가며, 일군의 사람들이 이미 해체되었던 약속천익사원에 다시금 몰려드는 상황들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의 실종을 이루는 원인들을 생각하려는 듯하다. 아주 최근에 나는 이 맹목적 믿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이 최초의 무조건적, 타율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자율도 성립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란 것도 모두 이 맹목적 믿음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처럼 말이다. 거기에 무슨 이성,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겠는가. 어쩌면 소설 속 재원, 승현, 연주가 자신들이 어린시절 믿었던 새(鳥)인간의 종교가 비록 가짜임을 깨달았더라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으려하는, 그 이유에 대한 탐문은 “확신에 가득 찬 눈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는 구소현 작가의 말처럼, 그저 믿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음을 포용하게 된다.

 

현실의 안과 밖 어디에도 편히 머물 수 없는 오늘의 우리들이 겪는 무력감이 바로 이러한 맹목성의 믿음이 우리들의 자리, 숨 쉴 자리를 마련해주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안간힘”을 쓰려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이들 거짓된 믿음의 진짜를 이해하려 든다면 바로 그 행위가 삶의 평온, 제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각 작품들을 통해 이 세계를 읽는 관심사와 지향 가치까지 드러내 보여준 하혁진, 홍성희, 이소 세 분의 평론가들과 신선하고 유쾌한 가운데 진지함까지 아울러 지펴 낸 세 작가에게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고 조용한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아직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의 여섯 작품이 남았지만 이번 여름 호에서 문지문학상 수상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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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경제 지배 시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인터넷 기반의 오늘, 유비쿼터스(ubiquitous)기술이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논쟁은 제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도출은 매우 중차대한 바로 지금의 인간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다. 이 결정이 곧 인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국제도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인간선언, Homo duduri』이라는 국내 문학인들의 글모음집도 눈에 띈다. 그들이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과연 이 세계의 추세에 어떤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는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의 “이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성을 만든다.”라는, 즉 법의 교리적 기능, 하나의 믿음 체계로서 법의 교조적 역할을 역설한 『법률적 인간의 출현(Homo Juridicus)』의 2부 〔법적 기술〕 제 4장 〈과학 기술의 제어: 금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로서의 법”을 읽으며 제기된 법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생각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숙의 과제로 또 하나의 층위인 법과 기술의 문제를 덧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시간과 장소라는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인간 서로가 연결되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오늘의 유비쿼터스 세계에서 법(法)은 어떠한 변화된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논의가 내 정신을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 기반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사회가 믿어 온 믿음의 문턱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이 세계가 믿어 온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인격 전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균열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끔찍한 인간을 향한 물음이 된다. 만약 이러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진다거나, 기술경제 주도 자본가들을 비롯한 그 집단이 이 영역을 부정하여 사라지게 된다면, 소위 ‘인간의 사물화’는 단순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법적 구조 자체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기능은 그 대상을 상실하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도 인간은 기술진보 보다 상위의 원리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이처럼 철학적이고, 헌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도그마(dogma)로서의 法

 

문제가 되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온 불가침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짧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알랭 쉬피오 교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노동연구원 박제상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구조로서의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을 도그마로 정의하며, 모든 인간 사회는 나름의 믿음 체계인 이 도그마에 기초해야하며, 이러한 보편적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인간 사회는 어떤 확립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렇게 믿을 뿐인 도그마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의 예로서 우리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거슬러 유추해보면 그곳에는 무턱대고 믿어야 하는 교조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세계라는 체계에 다가가려면 어린아이는 우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언어의 입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제약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최초에는 완전한 타율성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 이 근원적 타율성 없이는 그 어떤 자율성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 최초의 타율성, 맹목적 믿음이 주체 형성의 첫 번째 교리이자 인간 삶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한국어를 쓰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맹목적 믿음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이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 말(언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 기초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그마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스스로 정한 나아갈 방향이며,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상적 모습이 곧 법이다. 법은 거울에 비친 사회의 표상이다. 즉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 체계가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의 이성은 법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법의 교리적 기능을 파괴할 때, 즉 법을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해석하게 될 때, 과학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환원물로 취급한 끔찍한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은 인간에게 금기나 터부처럼 인류학적 기능을 지닌 교리이자 교조이며 교의인 것이다.

 

법은 시대, 장소를 달리하며 그 환경에서 인간과 세계의 중재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한계를 설정하는 도그마인 것이다. “법질서에 터 잡고 있는 원리들은 천명되고 찬양되는 것이지 계산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은 그 어떤 과학적 토론이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 발 딛고 서야하는 토대로서 법 원리이며, 과학이 이 법질서를 정초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최초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어떠한 이성도 세워지지 않는다. 수학의 무수한 공리들을 생각해보라, 그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증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으며, 수학(기하학)이라는 골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의 도그마로서의 정의는 오늘날 생물학주의나 기술경제주의를 주장하는 집단들로 인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간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이다. 법의 도그마성이 부정되는 순간이 곧 인간과 인간 사회의 파국일 것이다.


 

2.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으로서의 法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도구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 여부에 따라 특정한 금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도구의 용도를 제한하는 일을. (...)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 알랭 쉬피오 著,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이 같은 법의 도그마로서의 존재 위치를 기반으로 해서 기술경제중심주의의 시대인 오늘에 있어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법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인간들을 이성의 왕국에 복종시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지금처럼 사람들 일상의 행위를 점령하기 전, 산업사회에서는 법이 사무실이나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같은 개념도 모두 물리적 공간의 출입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의 환경에서는 그 출입 담장이 사라지고 집, 카페, 지하철, 심지어 침실에서도 업무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노동법은 더 이상 공간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접속(연결)을 규제하는 법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제부터 연결을 끊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서 법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법기술적 문제를 넘어서는 물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비쿼터스 기술이 노동시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 최적의 도구이기에 자본의 시간 점유에 맞서 개인 삶의 시간을 방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리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낳고 그 결과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현대 법은 연결을 차단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 라는 매우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통적 법률들은 노동자에게 노동력만을 거래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의 인격 자체는 계약밖에 남겨 둔다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허구의 전제 위에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팔수는 없다는 믿음에 서서 노동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에두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비근하게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권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가능해왔다. 사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원격 근무, 스마트기기 기반 업무, 플랫폼 노동 등에서는 노동 그 자체보다도 노동자의 주의력, 감정, 반응속도, 생활패턴, 심지어 수면과 이동 데이터까지 생산성의 일부로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과 인격 사이의 경계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기술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노동의 상품화라는 말은 지나간 옛 표현이다. ‘삶의 상품화’, ‘주체성의 상품화’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금은 남은 표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오늘의 기술경제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사물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본이 고의적으로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사물화 하고자 한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생산성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법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에 지시점이기 때문이다.

 

3. 기술경제 자본 지배시대의 법의 향방, 의미 부재의 시대가 뜻하는 것

 

인류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포드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각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신체, 시간으로부터, 지식에 대해, 인간의 주목과 관심에 대해 법은 그것들에 의해 침해될 인간존엄을 보호해왔다. 그것은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데이터 소유권과 같은 권리가 인공지능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과거의 법이 인간의 몸을 보호했다면 지금의 법은 인간의 정신적, 정보적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이것은 법이 기존의 노동법 확장의 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격권 체계’로 발전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에서 그 중재를 통해 인간 존엄의 훼손을 방어하는 데 그 기능을 존속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기술경제 자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는 거래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오랜 인간의 법률에서 방어해 온 인간의 인격과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는 인간존엄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가는 하는 것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생명주의나 경제중심주의 법학자들은 인간을 세포들의 화학적 물리적 조성물, 계산 될 수 있는 수량적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법은 언제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제도화해 온 인간의 기술적 산물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반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법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 관리 가능한 생산성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체계로 재편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측정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유지된다면 법은 그 영역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기술한다면 법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발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술자본은 더 이상 그 보호대상의 위치에서 인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숫자이고 물질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유전학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독일 민족의 삶과 법을 만들어간다. (...) 국가는 인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히틀러 『유겐트 입문서』에서

 

인간의 세계를 사물의 세계로 깎아내리는 소위 ‘인적 물자’라는 개념 사용을 통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법 주체를 없애버린 히틀러의 제3제국 언어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부정”함으로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말살했는가라는 인간 사물화가 초래하는 법과 세계 파국의 적절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나치의 생물학적 법의식은 바로 지금의 기술경제주의 법의식과 빼닮아있다. 소위 과학적 법칙을 정치적, 법적 기준으로 삼을 때, 거기에는 일체의 책임감이나 죄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법이라는 도그마는 그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인간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있던 법이 그 기초가 부재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에 인간의 이 맹목적 믿음인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믿음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편리함과 효율성의 증가라는 진보에 매몰되어 기술경제 자본이 인간의 삶에서 인간 존엄을 서서히 박탈해 가 궁극에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막연하게 인공지능이 몰고 온 시대를 자신들의 편리를 비롯한 유무형의 이익 관점으로, 즉 효율성 높은 긍정의 낭만적 기술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발견되지 못한 드러나지 않은 층위의 과제들을 망라해 숙의되어 할 현 인류의 시급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법이 관리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자본과 협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금 한국의 정치권력은 실용주의에 매달려 그 기술자본의 압도적 부와 권력에 매료된 듯하다.

 

우리는 허구, 맹목적 믿음에 기대 이 세계를 구축해 온 존재이다. 이제 인간 존엄이라는 최후의 허구를 포기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 영역을 버텨낼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인간들 인식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나? 기술경제 자본주의자들의 특이점의 시대, 인간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더 이상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과연 인간사회를 존립해온 믿음이라는 허구의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국이 아닐까?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 존재의 의미실현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 작동했던 법이라는 의미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의미체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큰 울림을 주는 이 문장으로 맺는다. 인간 존엄이라는 이 교조적 믿음을 우리들이 잃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는 물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법의 붕괴를 초래한다. 법이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엄중한 교리를 버텨낼 수 있도록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성은 약(弱)한 것이다. 끊임없이 그 딛고 선 바를 돌아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라도 광기와 망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 (...)

도그마는 인간의 탐욕과 망상에 한계를 설정하는 외부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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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들, 행인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7
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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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의 ‘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년 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글〉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글〉, 117쪽에서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 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즉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돈>상품>더 많은 돈’ 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만족>더 큰 욕망’ 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 《感覺の帝國》에서】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裏面)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 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의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 과 히치콕의 〈새〉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기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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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
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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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즉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호(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低)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은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라는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의 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汚], 그릇된[誤],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로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다.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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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심금을 울리는 글입니다. 적극 동감합니다!

비의식 2026-06-02 12:22   좋아요 1 | URL
우리 사회의 도처를 갉아먹는 좀벌레들을 어떻게든 청산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차트랑님 동감의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