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듀나의 책《공포의 문법》과는 그 이론적, 경험적 지평을 달리하며,  

다만 참고 도서의 하나임을 밝힙니다.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무더위의 계절이면 독서나 영화 시장은 슬그머니 호러(horror)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대체 인간의 원시적 감정인 공포를 자극하려는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곁에 머물러 마치 더위와 결합한 계절상품처럼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습관적 계절 행위에 편승하듯 30년 가까이 익명을 고수하는 작가 듀나의 《공포의 문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호러 작품들을 열거하며 독자,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섭게 하려는 작품들의 테크닉에서부터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나 진실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서의 호러 장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결론에 가까운 장들에 이르러 실제 현실의 사악함은 언제나 허구를 뛰어넘는다고, 호러는 이처럼 사회의 억압된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의 괴물성을 들추어내어 인간과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호러의 사회적 가치는 사람들을 단순히 무서움에 떨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자극과 쾌감만을 소비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극만을 소비하는 디지털 환경 세계 속에서 마비된 지각과 편협성으로 인해 호러 작품들의 사회적 가치의 의도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호러 작품들이 왜 오늘에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의 독자적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 많은 질문을 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답변이 있다. 사람을 오싹함과 무서움으로 놀라게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평소 외면하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에 살아남았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공포를 이용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인간은 죽음, 질병, 타인의 적의, 신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근원적 불안을 살아가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기에 이 억압된 불안을 형상화함으로써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그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사천리의 답변들은 그리 명료하지도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여겨지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그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호러 작품들은 이러한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독자나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락산업으로서 폭력의 잔학성, 괴이한 공포를 안전한 장소에서 즐기는 쾌락의 소비를 판매하는 상품이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호러는 노골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판매하는 상품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고어(Gore)부류나 슬래셔(slasher film)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보다 신체훼손의 충격 자체를 상품화하는 감각소비 중심의 상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창작, 제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장르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과연 그것은 진정 공포를 이용해 무언가를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유를 명분으로 공포를 소비하는 자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장벽이다.

 


호러가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건드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변신》, 《샤이닝》과 같은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기를 즐긴다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에 오래전부터 이같은 모순이 존재해 왔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호러를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진실을 탐구하는 장르라고 평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산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호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감각을 이용하는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사회비판까지 하나의 소비상품이 되는 오늘이기에 호러의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장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조차 상품의 포장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남는다. 왜 굳이 공포를 재현하는가? 수많은 비극, 전쟁영화, 범죄실화물, 심지어 뉴스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전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 재현은 진정 성찰인가, 아니면 소비인가?

 


《공포의 문법》에서 저자는 호러 작품들에 표현되는 공격성과 잔혹성이 이미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호러 작품이 새로운 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내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좀 더 냉철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호러 작가들이 그려내는 그 소름끼치는 표현들, 장면들의 충격적 이미지가 과연 사회를 구현하고 인간을 개선하는 도구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혹은 인간의 얇은 표면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진단 장치인 것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 책의 14장 「남은 것들에 대하여」에는 아버지 앞에서 이스라엘군이 22개월 어린아이를 고문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우리들은 아마 그 영상의 댓글에는 ‘아이를 괴롭혀서 안 된다’라는 보편적 윤리 준칙에 해당하는 글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거기엔 그러한 글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을 즐기며, 나아가 잔악한 글들로 도배되는 의외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보다. 자, 이미 현실 세계는 허구로서의 호러가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잔인한 곳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사례를 저자가 쓴 까닭은 이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호러 문학, 영화 따위가 무슨 순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의 배경으로 인용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미 실제 이러한 공포의 세계가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호러의 세계를 작품화하는 것에 더욱 현실적 의혹을 강화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 억압 문제를 드러내 성찰을 요구한다는 명분의 그 어떤 기만성 아닌가라는 의심 말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온라인 사회관계망이 보편화되기 전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이러한 정당성의 변론 가능성이 잔존했지만 이제 그런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허구적 호러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물의 장르 무용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다. 사회적 불안을 가시화한 언어로서, 타자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세상에 우리는 도달해 있다.

 


이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려는 오래되고 강력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장르에 대해 그것이 과연 소비하는 장치인지, 성찰의 장치인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더욱 민감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각성의 변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문화산업은 비판마저 상품으로 소비시킨다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낙관론에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력과 잔혹성을 재료로 공포를 효과로 이용하는 장르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감수성의 둔화로 더 큰, 상상 초월의 잔혹성으로 무감각한 비도덕의 지대를 일상화 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감각의 작동이 멈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안전한 거리에서 공포를 경험하는 것, 마치 비극을 보며 슬픔을 경험하듯, 실제 위험은 없지만 위험을 체험함으로써 긴장과 해방의 감정을 얻는 것은 분명 일상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어떤 순기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자극에 머문, 하나의 쾌락으로서 감정의 소비에 머무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을 괴물화하는 하나의 무감각의 양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게 된다. 어쨌거나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드거 앨런 포, H.P러브크래프트, 스티븐 킹, 아니 그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그리고 발 루튼, 조지 로메로, 스탠리 큐브릭, 리들리 스콧, 마틴 스코세이지 등 지난 호러 걸작들을 살펴 볼 일이다. 특히 스티븐 킹이 원한을 삼켰던 자신의 소설 《샤이닝》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던 큐브릭의 작품과 비교하며 그 맹렬한 거부감을 들끓게 했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주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 사이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지 흥미로운 과제를 풀어보아야 할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 이야기>는  ‘심스의 구멍Horror)(Symmes Holes)’이라 불리었던 '지구공동설'과 관련한 SF상상의 한 자락을 발견하는 새로운 독서가 되어줄 듯하다. 19세기 남극이 상징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아는 세계 밖의 공간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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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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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 중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 즈음의 내 습관적 행위가 이어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학교가 있는 계동 골목을 내려와 당시 유일한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의 생활패턴이었다. 정말 오래된 시절의 얘기지만, 결코 오래전 얘기로 기억되지 않는 얘기다. 어쩌면 그 시절의 책 읽기가 내 언어와 태도와 행위를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막스 뮐러의 책은 아마도 아껴 모은 돈으로 한권이라도 더 읽기위해 값싼 문고본으로 서너 권씩 구입해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판본이나 제본형식 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을 법하지만 그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튼 세상 얘기들이 마구 전파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순박한 소년에게 진실의 사랑이라거나 순진한 사랑이라는 사랑에 수식어가 붙어있는 이 유별한 사랑의 담론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마리아와 화자와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남긴 상실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을 것이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한 뼘만큼 성장했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화자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라는 고요한 신비의 숲”에 대해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그 고요한 신비의 숲 속에 있었으니 알 턱이 있었겠는가? 요즘 부쩍 소년기의 시간이 자주 떠오른다. 어쩌면 그 때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으며 온 세상에 속했던, 영원한 삶을 살았던 시간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이 책 『회상(Memories-A story of German love)』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하는 화자의 물음이 괜한 수다를 떨게 했다.

 


이제 막스 뮐러의 “순수하고 깊은 사랑,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의 풍파를 겪은 듯하다. ‘좋아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 라는 낯선 규칙과 후작 부인은 남(他人)이고 신분도 높은 사람이니 더욱더 어머니에게 하듯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예의, 이것을 깨닫는 순간, 아마 어린아이로서의 세상은 종말을 고했을 터인데, 나는 그 순간에 해당하는 정확한 장면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내겐 순수한 사랑이라 말할 것이 없고, 언제나 이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이 아닌 변덕스럽고, “뜨거운 사막 위에 뿌려진 빗방울처럼 스스로 소멸”하는, 또는 “타오르다 꺼지고 마는 불길로 온기를 주기는커녕 연기와 재만” 남긴 이기적이고 의심 많은 사랑에 대한 기억만이 주렁주렁하다.

 

여기서 사회적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니 하는 그 어떤 윤리적 삶의 태도 같은 걸 길어 올릴 생각은 없다. 마지막 회상까지 여덟 번의 회상의 기록이 분리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른 기록이기는 하지만 각 회상(回想;memory)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첫 번째 회상」에서 화자가 다 잊은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를 말 할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와 달리 내겐 어머니가 들려주고 가리켜 보이던 별자리와 성스러운 노래 소리가 없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이기적인 분이셨고, 자식들에게 냉엄한 분이었다. 내겐 화자처럼 머릿속까지 스며든 어머니 손에 들린 한 다발의 보라색 꽃 싱그런 향기를 지닌 오랑캐꽃도 없으며, 별에 감탄하며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도, 영혼을 속속들이 파고든 경쾌하고 성스러웠던 찬송의 노래 소리도 없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한 인간의 품성을 만드는데 귀중한 것들일 것이다. 화자의 고귀한 품성, 인간애에 대한, 모든 존재의 우주적 얽힘에 대한 감수성은 이렇게 스며든 것일 게다.

 

“남이 뭐예요? 나를 예쁘게 봐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다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건 괜찮단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아.“

- 「두 번째 회상」, 28~29쪽

 

「두 번째 회상」은 화자가 여섯 살 쯤 부모와 함께 후작(marquess,侯爵)의 성을 방문했던, 자신도 모르게 후작 부인에게 입맞춤을 함으로써 버릇없는 아이로 질책 받던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경계 없는, 나와 너라는, 사회적 신분이라는 분류체계가 스며들지 않은 아이에게 그 오염된 질서와 규칙이 처벌로 가해졌을 때 아이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너는 봄철에 벌써 꽃잎을 뜯기고 날개의 깃을 뽑히는 구나.”라고 탄식하는 이의 아쉬움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던”,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인 사랑에 대한 침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의 사랑의 샘은 이때부터 막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메말라간다. 더 이상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은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과 윤리 규칙 등이라는 이름으로 무례이자 범죄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세상은 작열하는 격정, 타오르는 정열, 요구하는 사랑만을 사랑이라 말한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제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푸념하면서 거듭 첫 사랑, 첫 경험의 강렬함을 쫓는다.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솔직함, 자기존엄의 욕구라고 정당화한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겐 고독만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세 번째 회상」에서는 사물에 대한 소유,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진정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조용한 사색이 흐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황금 팔찌가 해낼 수 있다면 소년은 당당하게 그것을 내어줄 수 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 낸다. 이 회상에는 타인의 아픔, 고통에 대한 나눔의 감수성이 백작 지위를 가졌으며, 심장병을 앓고 있는 후작의 딸 마리아와의 최초의 기억으로 옮겨간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리아가 형제자매들에게 반지를 나눠주는데, 마지막 하나의 반지가 남았을 때, 혈육이 아닌 화자에게 반지를 빼 건넨다. 이때 화자는 그 행위가 그녀의 희생임을 안다. 화자는 반지를 다시 돌려주며 말한다. “이 반지는 날 주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니까.” 화자는 세상이 강요하는 규칙들에 저항한다. 사랑이라는 태곳적 본래의 감수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화 된, 아니 사랑이란 말이 너무 오염되었기에 우리는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이미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늘.

 

「네 번째 회상」에서는 기억 속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학생이 된 화자는 방학시즌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한다. 후작의 성(城)에서 어린 시절 함께 놀던 공자(公子)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성주가 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관계로 더 이상 친밀한 벗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거의 날마다 이름을 불러보고 그리워했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 아마 화자는 마리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존재라면 그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다. 편지가 전해진다. 마리아가 화자를 초대하는 그토록 갈망했던 영혼으로부터. 재회, 재발견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한 회상의 기록이 이어진다. “우리는 옛 친구잖아요”라는 말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서로 소개하지 않고도 함께 노래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새들의 그 다정한 정경을 떠올려보며 그 어울림, 사랑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상념을 펼쳐보기도 한다.

 

이후 「다섯 번째 회상」에서 「마지막 회상」의 기록들은 마리아와 화자의 봄날 아침처럼 맑고 신선한 영혼들의 고귀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아마 사랑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이미 이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러나 속마음 숨기라고, 그렇게 숨기는 일이 예의요, 분별력이며, 현명함이라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회는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것을 억압한다.

 

온갖 강제로 억압되어 실종된 사랑, 그 잊어버린 사랑이 매슈 아널드의 詩 <파묻힌 생명> 속 생명의 강이 되어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한다. 화자는 이 시(詩)가 수록된 시집을 마리아에게 전한다. “나의 고백이었다”고, 장시(長詩)인 까닭에 세 연(聯)만 옮겨본다.

 

지금 우리 사이에 가벼운 농담 오고 가지만

보라, 눈물 고인 나의 눈을

이름 모를 슬픔이 가슴을 울리누나.

 

그렇다! 그렇다! 우리는 안다,

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고

미소도 지을 줄 안다.

그러나 이 가슴에 무언가 있어

그대의 농담 안식이 못 되고

그대의 미소 위안이 못 된다.

 

.......中略.....

 

예견된 운명, 변덕스러운 아이가 되어

때로는 장안에 마음을 빼앗기고

때로는 온갖 싸움에 몸을 던지고

본성마저 변하는구나.

그러나 운명은,

변덕스러운 장안 속에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고

존재의 법칙에 순응케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에 명령하여

우리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흐르게 하였구나.

그래서 인간의 눈은

파묻힌 그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장님 같은 불안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정처 없이 흐르며

영원히 떠도는 것 같구나

........後略...........

 

 【꾸밈 없는 마음, 진실의 사랑, 사랑의 추억 등 꽃말을 지닌 보라색 오랑캐꽃】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 「마지막 회상」, 145쪽

 

마리아와 화자의 정기적 만남은 심장병을 앓는 마리아의 생명에 위험신호를 발하였는가보다. 후작 가족의 주치의로부터 자네 탓이니 그만 찾아가라는 완곡한 부탁을 받는다. 인간에게 위안과 사랑을 앗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을 위한 고귀한 보호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화자가 마리아를 설득하는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의 것이라는 공상적 사랑의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것뿐이라며, 속속들이 이해가 되는 인간처럼 우리를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는 내 협소한 경험이 거부할 말을 찾지 못한다. 사랑에 무슨 윤리적 합리주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신은 너에게 고통을 주셨지만 또한 나를 너에게 보내 그 고통을 나누게 하셨어. 그러니 너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어야 해. 우리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해.” 이 말이 화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마리아로부터 마침내 “나는 너의 것이야. 신의 뜻이라면,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너의 것이야”라는 생의 마지막 인사인 편지를 받는다. 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다 잃어버렸음을 감사하게 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이제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내 사랑의 기억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을 남들과 연결되었던 기억에서 사라진 어린아이인 나를 찾는 걸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그 순수의 시절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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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얼굴을 디밀고 눈을 마주친다. 그 생글거리는 아이에게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그 존귀한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나도 “안녕”하고는 “몇 살이야?”라고 친근함을 표현한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아직 거절로 인해 내려앉아본 적 없다. 아이에게는 아직 ‘나’의 테두리가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나’와 타인은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의 타인들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평론가 김예솔비, 「나에게서 나에게로」, 『유령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의 회복을 사유하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라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 글은 순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상 수상 강연의 글인 「다정한 서술자(Tender Narrator)」의 4인칭 서술자의 다정함에 가닿았고, 다시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치(Идиот, The Idiot)』의 미쉬킨 공작, 그가 말하는 스위스에서의 삶의 한 에피소드인 어린아이들과 사랑이야기의 연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Corpus)』의 몸의 존재론,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있음(being-with)'으로 이해하려는 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연상은 이 존재론적 얽힘에 관한 사유가 갑작스레 새롭게 대두된 물음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다섯 살 꼬마 아이처럼 낯선 사람에게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감성을 보이면 오늘 우리들은 왜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회적 분류 체계 이전, 즉 사회적 정체성 이전의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아이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라는 ‘존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야기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초반부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아마 이 장면이 소설 전체의 의미를 이끄는 열쇠의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이 스위스에서의 4년간 병 치료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 성(saint)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 간 곳은 미쉬킨 공작 가문의 먼 친척인 예빤친 장군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집이다. 여기서 미쉬킨은 리자베따와 그녀의 세 딸에 둘러싸여 스위스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치』 1부 챕터 7에 등장하는 주제 전체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 예빤친 장군 부인과 세 딸 앞에서 미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장면】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는 불행한 여성 마리를 아이들이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미쉬킨이 하려는 말은 타인을 판단하려는 시선이 아닌, 존재 자체, 즉 상처입은 사람을 보면 다가가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사회적 낙인보다 그 사람이 입은 고통 자체를 먼저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순수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의 감각’이라는 차원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그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이 사회적 분류체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죄인과 정상인, 성공자와 실패자,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의 구분이 굳어지지 않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의 감각이다.

 


그는 타인을 하나의 범주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 혹은 ‘나’의 연장(延長)‘으로 느낀다, 여기서 미쉬킨과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ten der narrator)'가 만난다고 여겨진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가까이에서 주의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정함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지닌 서술자를 4인칭 서술자로 명명하고, 그것은 모든 인물의 시선을 품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 바라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의 연결을 보는 시선으로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정확하게 상관하는 인물로서 미쉬킨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개별적 자아로 보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다. 토카르추크의 4인칭 서술자가 문학적 장치라면, 미쉬킨은 바로 그것의 인간적 구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차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이러한 감각은 거의 종교적이다. 미쉬킨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실패하기에 『백치』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반면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은 구원이라기보다 연결성의 인식에 가깝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심지어 초월적 시간 속 존재까지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을 미쉬킨의 존재론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고상한 것으로 속이 가득 찬 분이시다.”

-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아무것도 모른 주제에...백치 같으니!” -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미쉬킨 공작에 대한 이 두 상반된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하는 인물의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아니 그 인물의 됨됨이 자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미쉬킨의 이러한 어린아이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그의 육체가 품고있는 간질발작과 결합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는 순수함이 아니라 백치(白痴)성으로 읽는다. 미쉬킨이 앓고 있는 간질은 여기서 사회적 낙인의 상징이 된다. 병든 몸,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존재,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미쉬킨의 자리를 위치시킨다. 즉 미쉬킨의 일면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민이 간질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결합되어 영적 순수성과 육체적 취약성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인간 세계에서의 타자성 충돌의 봉합은 영원한 불가능성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쉬킨의 간질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과연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육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미쉬킨은 그 어떤 존재이건 사회적 범주 그늘아래 덧씌워진 존재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고통받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야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킨은 사회 분류 체계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그 분류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미쉬킨과 아이들은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다. 결국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가 백치로 이해하고자하는 미쉬킨이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은 결코 미성숙함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잊어버린 원초적 관계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나 김예솔비의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에 편재하는 유령으로서 ‘나’,  낭시의 타자란 존재의 조건 자체라는 ‘관계성에 놓인 존재’는 같은 지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들 모두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혐오와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꼭 내 혈족, 이웃, 동료, 동일 이해집단의 고통만이 고통이 아니다. 우린 애초에 서로 얽힌 존재이다.

 


사회적 상징이 축조해 놓은 나와 너의 경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감각의 회복은 기계생성 시대에 돌입한 오늘 더욱 필요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상징적 세계의 축조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감수성, 사회적 분류 체계에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존재들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백치』는 가장 성스러운 인물이 현재 세계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끝날 수 없는 작품, 생각해 볼수록 새로운 연결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작품이어서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이의 손을 잡으려는 시원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회복은 불가능한 염원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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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 4
최미래 외 지음 / 스위밍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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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학잡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지은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책의 몸피는 여느 소설집 또는 시집과 같은 단행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에 매혹된 것은 책표지의 안 날개에 작게 써진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이어진 ‘유령의 목소리가 때론 와글와글 그리고 소곤소곤 들려주는 목소리’에 대한 이유 없는 끌림이었다. 이 작은 문학잡지 《유령들(ghost friends)》 Volume4.에는 소설 세편, 네 편의 시, 두 평론과 에세이가 소박하지만 밀도높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말했던 4인칭 서술자로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 따르는 감정을 그대로 기술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전달해주는 충실한 대변자의 음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나에게서 나에게로」에서 말하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으로서 우리들이 망각 저편으로 던져버린 잃어버린 목소리로서의 ‘유령들’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가 권혜영 작가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도깨비라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로 인해 가장 직관적으로 유령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게, 가야당이라 불리는 허름한 구제숍을 맡아 운영한다. 인수인계도 없이 돌아가신 탓에 화자 ‘나’는 할머니가 기록해 둔 업무일지를 지침삼아 미숙하나마 관리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괴생활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도깨비 가족을 데리고 방문한다. 물론 도깨비들은 “쉬었음 청년과 은둔 중년, 쪽방촌 노인, 쓰레기집 주민, 중독자”처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속 존재들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메리트를 이용해 지식과 경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배제된 자들의 회복과 자립을 지원하는 대기업 운영 집안을 요괴라 지칭한 것은 흥미롭다.

 

도깨비와 요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의 향연은 건너뛰기로 한다. 한 달도 못 돼 도깨비 가족은 갱생프로젝트에서 떨려나고 공무원이 그들을 인솔하고 ‘나’에게 봉인을 의뢰하기 위해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이들 유령적 존재들을 봉인이라는 절대 감금의 처벌권을 가진 인물이다. 봉인 하루 전날, 이들은 한바탕 흔쾌한 춤과 떼창으로 어우러진다. 이를 방관하며 어울리지 못하던 ‘나’는 사물 상태로만 있으려는 백소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잘 들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나’는 귀를 기울여 그네들의 시끄럽기만한 소리를 비로소 서서히 듣기 시작한다. 엉망이면서 묘하게 기승전결이 있는, 세상과 부딪치는 데도 완전히 매력 있는 선율과 보컬을. 이윽고 ‘나’도 그들에 끼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천천히 적는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춤추게 만든다.”고.

 

이 세계의 요지경을 흔쾌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소음같은 배제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시간이 된다. “장마철엔 물건들이 잠을 설친다.”, “오래된 거울은 습기를 먹으면 요기가 생겨서 시커멓게 흐려진다.”라는 할머니가 남긴 여름철 관리지침의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만 않는다.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지닌 작품이다.

 


두 번째 소설, 최미래 작가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산다는 것에 어느만큼 무심한 존재가 된 인물, 그래서 세상사에 펄펄 끓는 마음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첫 단원을 읽어나갈 때 혈액에서 원심분리기로 혈장을 분리하는 장면이 묘한 호기심으로 작동해 내쳐 읽은 작품이다. 삶의 징그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것에 서로들 얽혀드는 관계를 생각게 하는 소설이랄까.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는, 손님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가난한데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징글징글했다. 그 덕을 보고 있는 나도 징그러운 건 마찬가지만”

 

피부과 간호조무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나’는 기력회복주사, 일명 혈장 주입술이라는 불법 시술을 독립적으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하여 혈장을 분리하여 젊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판다. 이렇게 시술을 위해 손님들을 만날수록 사람에게 정이 떨어지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유일한 정규 손님인 호떡 장수 이난희 할머니라는 펄펄끓는 존재를 보며 자신이 그런 삶에 끈적하게 얽혀있음을 자각한다. 사실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이난희 여사보다는 무심한 ‘나’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원’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이유가 “이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환상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온 마음에 열이 오르며 다시 살고 싶어지는”, 그런 열정으로만 살아가는 펄펄끓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아마 열역학적으로 심정지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혈장은 맑고 투명한 노란색, 노란 피가 내 몸속을 돌고 있는 한, 나는 이 징글징글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그 모든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문장의 이해 불능의 삶이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게다. ‘나’를 따라다니는 소녀 고서라에게 간택당하는 삶이 되듯, 모든 삶의 추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일 게다.

 

이 잡지의 기획자인 김화진 작가의 「편 고르기」는 작품 속 출판사 편집자 이완희의 혼잣말인 “내가 한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걸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큰데도 자꾸 그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것만 같다. 매번 잘 안 되지만 누군가의 옆자리에 못 박히고 싶어하는, 사람이랑 꼭 붙어 앉으려고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의 외사랑 이야기이며, “흘러 지나칠 수 있는 얘기도 품에 잘 안고 가는 사람”을 향한 끝내 말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말하지 못하는, ‘주변을 맴도는 말, 서성이는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몰라도 너에게는 소중한 책, 그런 게 되겠구나. 거보세요, 쓰시기를 잘했죠. 그런 마음은 분명 편집자의 마음이었다.”처럼 후련하고 허망하기도 한 마음,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헛손질하는 마음, 그것 그대로가 좋은” 이야기이도 하다. 작품 속 편지 쓰기 워크숍 참가자들의 끝내 닿을 수 없는 편지들처럼 우리의 선택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의 반향과 무관하게 그 행위자체가 이미 회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 읽기보다 소설의 이야기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서 따라 읽으면 어떤 마음의 좋은 향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고 싶다. 김화진의 소설들을 조금 더 읽고 싶어졌다.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대표작, 〈Object; 모피로 된 아침 식사, 

최지은 시인의 詩 <오브제>의 모티브가 된 작품】


최지은 시인의 네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정말 반가웠다. 첫 시 「오브제」는 조금 낯설다. “그가 만지고 간 자리마다 털이 났다”로 시작되는 시의 문장은 커피 머그 손잡이 안쪽에서부터 컵의 내외부로, 그리곤 집 안이 털로 뒤덮인 전경을 말하지만, 감추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만도 않아서 홀로 여기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가 떠난 뒤의 일이고, 시 속 화자는 빗질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들여 쓰다듬는 사람이 된다. 자꾸 눈물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털이라는 장식이 아니라 이미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장치로 읽히듯, 어떤 본능, 육체성, 또는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다. 집 안 모두에 털이 덮이듯, 나의 상념 속에서는 이 세계의 질서를 찢고 그 아래 잠긴 그리움의 감각과 접하는 매개물, 그 경계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보 나왔어/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 무슨 일인지 ‘나’는 답할 수도 없다. 경계 너머에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슬픔의 감각은 그 애틋한 그리운 육체들에 다가서기 위해 쓰다듬음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마음」처럼 “봄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열린 문틈으로/ 아끼는 고양이 달려와 안기어오는 오늘 아침(「봄」 詩전문)”처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며 응원을 보낸다.

 

김예솔비, 김병규 평론가와 김미래, 황예인 네 분의 평론과 에세이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 기울이지 못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소설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1947~2016) 의 소설집 『나 (私)』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 〈세 여인〉을 오가며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두와 손잡고 싶었던 유년기의 감각, 나와 타인을 분리시켰던 최초의 거절이라는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영화평론가 김예솔비 작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손을 붙잡는 아이의 모습들을 연상하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 월간도 계간도 아닌 비정기 문학잡지 《유령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김화진 작가를 비롯 김미래, 황예인 작가 등 편집진들의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라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은 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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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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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오늘을 ‘음모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초국적 미디어와 플랫폼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유통시키고, SNS는 누구나 기록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이 형성되고, 사실과 허구, 증언과 조작, 신뢰와 의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혔다. 감정적 키치와 스펙터클은 소통을 대신하고,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맥락을 제거한 편집 영상은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허위와 조작을 방조하는 사이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하고 인간의 판단을 선행하는 정치적 장치가 되었다.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한 철학적 응답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한다. 대신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기억과 증언, 기록과 픽션, 역사와 정치,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서로 얽혀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다큐멘터리론이 아니라 이미지 철학이며, 동시에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책의 첫 장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보편적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과 사실성을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그 믿음 자체를 의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CNN이 동시 송출한 영상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저해상도의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현실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숨소리, 어둠 속의 모호한 화면은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있다'는 감각만큼은 강렬하게 생산했다. 즉 다큐멘터리의 신뢰는 명료함에서가 아니라 식별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진짜라고 믿게 되는 역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통찰은 '다큐멘터리=사실'이라는 오래된 등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는 순간 이미 화면은 촬영자의 시선과 구도, 편집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인터뷰 역시 기억의 왜곡과 언어의 한계, 사회적 위치에 따른 침묵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의 증언조차 진실 전체를 재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서발턴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실패한 장르일까. 슈타이얼의 대답은 오히려 반대이다. 진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실재와 연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해체한다. 영화 「타이타닉」 제작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이 지나간 자리(Titanic's Wake)〉〉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은 거대한 세트장과 화려한 영화 제작 과정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 놓인 멕시코 해안 마을의 빈곤과 물 부족 지역에 대규모 인공 수조를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민물을 끌어오는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거대한 허구를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복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된다. "진실은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표명된다."는 라캉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지점에서 『진실의 색』은 아카이브의 정치학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를 과거를 보존하는 중립적 저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기억을 선별하는 권력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남기고 누구를 침묵시킬 것인가는 언제나 정치적 선택이다. 기록은 객관적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질서를 조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무한한 저장 능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결정한다. 삭제는 기록만큼 정치적이며,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의 효과가 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장치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와 몽타주 편집, 그리고 맥락을 제거한 영상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모론은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 속에서 허구는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낳으며, 행동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체주의와 선전 정치 속에서 반복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AI 합성 이미지와 왜곡된 영상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따라 형성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베르토프가 외쳤던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라는 선언도 슈타이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삶은 결코 '있는 그대로' 이미지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성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삶만을 '진정한 삶'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 담론이 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분은 쉽게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하나의 전형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삶은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보편적 불확실성이라는 슈타이얼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진실은 단일한 명확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해소되지 않는 균열과 모순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와 허위 정보, 기록과 연출, 사실과 픽션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교차한다. 다큐멘터리 역시 더 이상 진실을 보증하는 장르가 아니다. 때로는 스펙터클과 감정 소비를 위한 쇼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은폐하는 선전의 형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더욱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미지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 욕망이 스며있다.

 

결국 『진실의 색』은 우리에게 진실한 이미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며,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를 끝까지 읽어내라고 요구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며 사유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필요한 비판적 감각이다. 『진실의 색』은 다큐멘터리에 관한 철학 에세이를 넘어, 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가는 시대에 진실이 어떻게 생산되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문하는 보기 드문 정치철학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가장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 용기일 것이다. 이 이미지 철학의 현대의 고전적 지위를 지닐 역작을 거듭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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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책 제본의 부실로 낱장으로 흩어져 읽을 때마다 매 쪽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조악한 제본은 처음이다. 21세기에 쓰여진 고전으로 남을 만큼 압도적인 저술이 이렇게 출간된 것은 정말 수치스럽다. 출판사여, 제발 책 제본도 신경 좀 쓰세요. (책의 물성을 문제 삼는 글을 쓰는 독자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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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심하네요.
예전 학교 근처에서 전공 서적 제본한 것보다 더 떨어지는 품질 수준이네요.

비의식 2026-07-06 20:44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은 최고수준, 책의 제본 품질은 최저 수준,
어쨌든 슈타이얼의 집요한 통찰은 현대의 고전이라 할 정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