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얼굴을 디밀고 눈을 마주친다. 그 생글거리는 아이에게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그 존귀한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나도 “안녕”하고는 “몇 살이야?”라고 친근함을 표현한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아직 거절로 인해 내려앉아본 적 없다. 아이에게는 아직 ‘나’의 테두리가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나’와 타인은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나‘의 무수한 연장으로서의 타인들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평론가 김예솔비, 「나에게서 나에게로」, 『유령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의 회복을 사유하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라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 글은 순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상 수상 강연의 글인 「다정한 서술자(Tender Narrator)」의 4인칭 서술자의 다정함에 가닿았고, 다시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치(Идиот, The Idiot)』의 미쉬킨 공작, 그가 말하는 스위스에서의 삶의 한 에피소드인 어린아이들과 사랑이야기의 연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Corpus)』의 몸의 존재론,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있음(being-with)'으로 이해하려는 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연상은 이 존재론적 얽힘에 관한 사유가 갑작스레 새롭게 대두된 물음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다섯 살 꼬마 아이처럼 낯선 사람에게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감성을 보이면 오늘 우리들은 왜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회적 분류 체계 이전, 즉 사회적 정체성 이전의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아이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라는 ‘존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야기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초반부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아마 이 장면이 소설 전체의 의미를 이끄는 열쇠의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이 스위스에서의 4년간 병 치료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 성(saint)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 간 곳은 미쉬킨 공작 가문의 먼 친척인 예빤친 장군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집이다. 여기서 미쉬킨은 리자베따와 그녀의 세 딸에 둘러싸여 스위스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치』 1부 챕터 7에 등장하는 주제 전체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 예빤친 장군 부인과 세 딸 앞에서 미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징면】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는 불행한 여성 마리를 아이들이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미쉬킨이 하려는 말은 타인을 판단하려는 시선이 아닌, 존재 자체, 즉 상처입은 사람을 보면 다가가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사회적 낙인보다 그 사람이 입은 고통 자체를 먼저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순수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의 감각’이라는 차원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그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이 사회적 분류체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죄인과 정상인, 성공자와 실패자,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의 구분이 굳어지지 않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의 감각이다.
그는 타인을 하나의 범주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 혹은 ‘나’의 연장(延長)‘으로 느낀다, 여기서 미쉬킨과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ten der narrator)'가 만난다고 여겨진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가까이에서 주의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정함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지닌 서술자를 4인칭 서술자로 명명하고, 그것은 모든 인물의 시선을 품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 바라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의 연결을 보는 시선으로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정확하게 상관하는 인물로서 미쉬킨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개별적 자아로 보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다. 토카르추크의 4인칭 서술자가 문학적 장치라면, 미쉬킨은 바로 그것의 인간적 구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차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이러한 감각은 거의 종교적이다. 미쉬킨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실패하기에 『백치』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반면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은 구원이라기보다 연결성의 인식에 가깝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심지어 초월적 시간 속 존재까지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을 미쉬킨의 존재론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고상한 것으로 속이 가득 찬 분이시다.”
-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아무것도 모른 주제에...백치 같으니!” -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미쉬킨 공작에 대한 이 두 상반된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하는 인물의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아니 그 인물의 됨됨이 자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미쉬킨의 이러한 어린아이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그의 육체가 품고있는 간질발작과 결합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는 순수함이 아니라 백치(白痴)성으로 읽는다. 미쉬킨이 앓고 있는 간질은 여기서 사회적 낙인의 상징이 된다. 병든 몸,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존재,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미쉬킨의 자리를 위치시킨다. 즉 미쉬킨의 일면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민이 간질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결합되어 영적 순수성과 육체적 취약성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인간 세계에서의 타자성 충돌의 봉합은 영원한 불가능성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쉬킨의 간질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과연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육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미쉬킨은 그 어떤 존재이건 사회적 범주 그늘아래 덧씌워진 존재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고통받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야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킨은 사회 분류 체계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그 분류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미쉬킨과 아이들은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다. 결국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가 백치로 이해하고자하는 미쉬킨이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은 결코 미성숙함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잊어버린 원초적 관계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나 김예솔비의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에 편재하는 유령으로서 ‘나’, 낭시의 타자란 존재의 조건 자체라는 ‘관계성에 놓인 존재’는 같은 지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들 모두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혐오와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꼭 내 혈족, 이웃, 동료, 동일 이해집단의 고통만이 고통이 아니다. 우린 애초에 서로 얽힌 존재이다.
사회적 상징이 축조해 놓은 나와 너의 경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감각의 회복은 기계생성 시대에 돌입한 오늘 더욱 필요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상징적 세계의 축조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감수성, 사회적 분류 체계에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존재들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백치』는 가장 성스러운 인물이 현재 세계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끝날 수 없는 작품, 생각해 볼수록 새로운 연결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작품이어서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이의 손을 잡으려는 시원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회복은 불가능한 염원에 불과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