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머클라비어
야스미나 레자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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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소한 일상 순간순간의 조각 이야기들이 모여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세계에 대한 비가(悲歌)라 해야하나? 아니, 그저 시간에 무릅을 꿇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포기의 쓴맛을 가만히 기다릴 수 없는" 어느 여인의 시간과의 싸움에 대한 '감동의 기록물'이라는 편이 합당한 정의이리라.

딸아이 앞에서 베토벤의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하려하지만 깊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만을 드러낼 뿐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일화(逸話)로부터, 이젠 시간의 강을 건너버린 것들에 대한 40여편의 기억 편린들이 모여 "살아있는 자들, 과정 한가운데 있는 존재자"로서의 그 찬란한 감동을 음미하게 한다.

 

문득 거실의 서랍장위에 진열된, 카메라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함박 웃는 천진난만한 두 아이가 있는 사진 속 시간을 매양 그리워하며 미소짓는 내 표정을 느끼게 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딸이 그리고 썼던 일기장 '투덜이 소녀'를 찾아내곤 "사라져버린 하나의 세계", 시간 속에서의 그 가치를 이야기 할 때의 소설 속 '야스미나 레자' 와 이렇게 공명한다.

"얼마나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귀여워했는지,...얼마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그 애를 소유했는지,...한때 내가 얼마나 충만하게 그 애의 모든 것이었는지, 이게 심술궂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우린 시간에 저항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시간이라는 논리와 이성(理性)에 굴복할 수 만은 없는 것 아닌가?

 

다음의 일화를 옮기면서 살며시 웃는 '야스미나'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발자크와 그의 아내가 목적지에 가는 길로 싸운 에피소드인데, 합리성이라는 논리와 비이성적이라는 감성과의 부딪침에 대한 이야기다.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길을 찾던 발자크는 빙빙돌아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마 머리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을 것이다. 아내가 토라진 것은 뻔한 일, 발자크는 아내에게 뒤늦은 사과를 했지만 자기 논리에 대한 그의 완강함은 그녀를 실망시키에 넘쳐흘렀다. 그녀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세상보다 나를 우선해줘!" 라는 '하나의 실존적인 시험'을 한 것이다. "나에게 맞서 세상을 옳다고 하지 마." 비합리에 맞서는 이성, 사랑에 맞서는 오만만큼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도 없다. 삶을 지탱하는 것, 우리가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비이성적인 낙관의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작가만큼이나 나 또한 베워야 할 것들을 이미 배운 나이 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삶의 진실을 터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데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만큼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가운 침대와 허무외에 그 어떤 전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더이상 욕망하는 일도 시들하기만 하다. 그럼 더이상 뭔가가 되는 일에서 관심을 거둬야 하는 것일까? 발자크는 아내에게 눈부신 선언을 한다. "나는 싸우는 게 좋고, 널 사랑해!" 라고.

그래 "나는 더 길을 잃고 싶다."는 야스미나의 또 다른 선언은 시간의 강(江)을 어떻게 건너는지에 대한 빛나는 요령으로 와 닿는다.

"나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나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나는 전투의 운명을 원한다. ~ (中略) ~ 너로 하여금 좀더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을 음미하게 하소서. 포기의 쓴맛을 가만히 기다릴 수 없는 나로 하여금"

삶이란 앞니가 모두 빠진 빈 공간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앞니 빠진 소녀의 기막히게 매력적인 미소..., 눈물이 날 정도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것이라고. 역설적이게도 죽음 앞에 선 비가(悲歌)가 돌연 삶의 의미 가득함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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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평의회 / 기사와 죽음
레오나르도 샤샤 지음, 주효숙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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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사회가 사기 유형을 만들어내죠. 말하자면 사회에 맞추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자체가 사기죠, 법적 사기, 문학적 사기,

인간적...그래요, 인간적이죠. 심지어 '존재'에 대한 거라고 말씀드리겠어요."  P180 中에서

 

소설 『이집트 평의회』는 어쩌면 위의 말처럼 '존재'에 대한 이야기라 해야 할 터이다. 우리는 '있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어떻게 있다가 갈 것인가? 또한 '인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혀 완벽하지 않은 허점과 모순 투성이의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기막힌 드라마이니 말이다.  이야기의 발단으로 하나의 사기극이 연출된다. 1782년 12월, 나폴리로 향하던 모로코 대사의 선적이 시칠리아 해안에 난파되자 총독은 아랍어로 된 고서의 해독을 감정케 한다. 이때 아랍어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인물로 이웃들의 점이나 쳐주며 빈둥거리던 베네딕트회 수사신부가 통역자로 불려간다. 고서를 들여다보던 대사는 수없이 널려있는 "예언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말한다. 그러나 신부는 "시칠리아 정복 및 지배에 관한 이야기"로써 아주 값진 고서라고 거짓 통역을 한다. 이로써 고서는 감정에 공석한 시칠리아 총독, 고위성직자인 몬시뇰에게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수사신부는 대사가 떠난 뒤에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확보한다.

 

이 사기극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사기극의 주인공인 '돈 주세페 벨라'신부는 진정 어떤 인물인가?   사기극이 사회를, 사회의 중추적 성원인 귀족들에게 어떤 반향을 불러올 것인가? 이때에도 예리한 지성은 있었다. 그 지성들은 이 사기극에 어떤 관점을 가질 것인가? 그리고 이 사기극은 정녕 거짓의 의미이기만 한 것인가? 고서라는 역사의 기록물이란 진실이기만 한 것인가? 거짓과 진실의 경계란 진정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을 절로 하게되고, 누군가와 함께 덧없는 토론을 하고 싶은 심정을 갖게된다.

 

고서가 시칠리아 정복 및 지배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문과 함께 자기 가문의 명예와 재산에 관계된 내용이 발견 될 것을 예견한 귀족들은 너나 할 것없이 벨라 신부에게 아첨하느라 법석을 떨어댄다. 그리고 하찮은 수사신부의 지위는 까닭없이 '수도원장'이 되어 불린다. 그런데 벨라 수도원장의 행보가 거짓 통역 시점의 속물적 그것과는 사뭇 다른 무엇으로 느껴진다. 여기에 의혹의 시선을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 변호사 '디블라시'는 일명 <이집트 평의회>로 불리는 고서의 해석본이 거짓임을 확신하지만 그의 삼촌과 하는 논쟁에서 "벨라 수도원장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닙니다. 그저 범죄를 모방한 셈이죠. 말을 뒤집어 놓음으로써...시칠리아에서 수 세기째 소비된 범죄에 대한..."이라며, 우리 사회 자체가 사기인데 어찌 자신이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논리로 벨라의 행위에 진정성의 의미를 부여한다.

 

급기야 디블라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동시에 부여하지 않은 채 인간의 합리적 노력을 농부에게서 기대할 수 없지요"라며, 기득권 세력인 왕정과 귀족들의 불의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주도한 불순자로 참형을 받기에 이르는데, 처형장에 가기전 벨라와 그의 행위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는 자기방식대로 인생의 사기를 마무리지었다. 유쾌하게...목숨을 건 사기가 아니다. 목숨이 있을 때 친 사기다.. 살아있을 때가 아닌...아니 그래, 살아있을 때에도..." 자체가 사기인 사회에 멋진 한 방 먹인 역사라고. 이 말은 벨라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사한 역사의 정의에 대한 주장에 가 닿는다.

 

"온통 사기요.역사는 존재하지 않소.어쩌면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무에서 떨어져버리는 나뭇잎 세대나 존재하려나? 나무가 존재하고 새 잎이 존재할 뿐이오. 그 다음에 그 나뭇잎도 떨어져버리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나무도 사라져 버릴거요. 불에타서, 재로 말이오. 나뭇잎의 역사. 나무의 역사라고요. 헛소리! 만약에 나뭇잎 한장 한장이 자신의 역사를 쓴다면, 나무가 자신의 역사를 쓴다면 그렇다면 역사라 말할테지요...당신 조부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쓰셨소? 부친은? 그럼 내아버지는? "  P89 中에서

 

그렇다면 주세페 벨라 신부는 진정 역사를 쓴 것인가? 아니면 사기극에 불과한 것인가?  아마 이 질문의 답은 다음의 문장에서 찾아야 되는 것 아닐까?  "거짓은 진실보다 훨신 강하다, 삶보다도 더 강하다, 거짓은 존재의 뿌리에 박혀있다. 거짓은 생명너머에 있는 태초의 원시림에 숨어있다."  P171 中에서

고문, 상실된 인권, 부패한 권력, 삶과 존재의 의미를 '역사'의 허구성에 빗대어 오늘의 우리 인간 사회라는 극장을 재기발랄하게 그려낸 모처럼 발견한 수작이 아닐까?

 

책은 이 작품외에 <기사와 죽음>이라는 중편이 하나 더 실려 있는데 마치 추리물 같은 면모를 보이지만 권력의 정체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유명 변호사 '산도츠'가 피살된 채 발견되고, 살해되기 전 같은 장소에 있던 권력자인 '체사레 아우리스파'란 인물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지만 서장인 '카포'는 단서가 될 메모를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려 한다. 이렇게 권력의 시녀가 된 서장이 있고  이에 저항하는 부서장 '비체'가 있다.

 

"나는 너를 죽일거야"라는 산도츠에 보낸 아우리스파가 쓴 발견 된 메모는 한낱 농담으로 치부되고, 아우리스파에 답신으로 보낸 산도츠의 메모는 사라지고 없다. 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체는 산도츠와 아우리스파가 함께 머물렀던 장소의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그러나 없다.

"쓰레기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회학적 교훈이다." 결국 산도츠가 보낸 메모는 아우리스파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아우리스파가 사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아우리스파를 살인의 무대에서 제외시키려는 카포와 용의자의 선상에 세우려는 비체는 갈등한다. 급기야 여론을 조작하기에 이르는데, 어떤 조직이 주요 인사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형식을 띤다.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조직을 기성의 조직으로 만들어 여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후발적인 조직을 염두에 둔 교활한 방식이다. 즉, 시민들의 불안에 근거하여 권력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권력유지 수칙 1번.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은 항상 불안의 확산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믿음은 역사이래 불변의 원칙인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는 짧은 풍자극 속에 있는 셈이지."라는 문장은 <이집트 평의회><기사와 죽음> 두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작가 샤샤의 이 세계의 실체에 대한 시선인 것 만 같다. 어쩐지 이 우주에 홀로 던져져 외로이 유영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같아 쓸쓸함이 몰려온다. 그래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사기이며 거짓인 환상의 세계이기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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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지음, 한단하 그림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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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나 누구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로 득실거리는 2016년 한국사회의 오늘을 사는 내겐 부패한 권력의 안하무인과 탐욕을 호들갑스럽게 전하는 매스컴이 진부하기 그지없다.  터무니없이 불안정하고 비인간적이며, 탐욕을 옹호하는 비이성적 권력이 지배하는 상인화된 사회에서 무엇이 그리 새로울까?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않다." 라는 한 줄의 법으로 사는, 그리고  "저는 당신보다 높지 않습니다."라며 서로 손을 뻗어 어깨에 대는 인사를 하는 소설 속 섬 주민들의 삶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동경의 시선만 보내게 된다.

 

총 다섯 편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제1 배경인 섬은 그래서일까?  뭍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이며,  누군가는 그곳의 바람, 파도와  달려드는 갈매기, 외로움 탓에 '가히 살인적'이라 떠나는 곳이다. 소비와 탐욕과 무사유가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 찌들대로 찌든 나같은 이들에게는 낯설고 비현실적이라 공감하지 못하는 곳일 게다.

그러나 푸르고 맑은 바다, 여러가지 꽃들, 그리고 "너무 맑고 또렷해서 빗자루질이라도 하면 후드득 별이 떨어질 것 같은" 곳이라고 하는 이들,  아마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사유할 줄 아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저 단 한 줄의 법이면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소설은 얄궃게도 이들에게 시련을 준다. 그들 섬에 화산활동이 시작되고 부득이 고위관리와 지도자, 무수한 법과 공장이 있는 우리들의 세계에서 삶을 꾸려야만 한다. 제2 배경이다. 다섯 편의 연작중 제 1배경을 서술한 [그나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어지는 네 편은 이 익숙한 우리들의 '나라'에 적응하는 섬 사람들의 생존기라 불러 마땅하지 않을까?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에서 표제작인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흘러내리는 고름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제 섬 사람들은 쓰레기 치우는 곳, 파출부, 환자 목욕시키기, 가로수 정비, .... 이 일들에서 생활의 방편을 얻어내고 만족과 관조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뻔뻔한 우리의 세계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 그들의 적응은 우리사회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무사유의 사회가 아니고서야 가능한 말이겠는가?  소비지상, 물질중심, 이익 우선, 무한경쟁, 자유시장과 같은 이 세계의 가치가 토해내는 경제적 불균형, 사회적 양극화, 문화전쟁의 양상, 도덕성의 상실, 지적 공백 상태에 이들이 적응했다는 이 천박한 문장보다 역겨운 말이 어디 있을까?

 

"당신은 일방적으로 설득하려고 해. 그게 무슨 대화야?"

 "맞아 나는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 이해받고 싶단 말이야."

"지겨워 듣기 싫어"

 

남의 말을 들어 줄 여유가 없는 사회, 그래서 '이야기 들어주는 집'이 성황을 이루고, 나아가 "서로 번갈아 이야기 하고 관심 깊게 들어"주는 '쿠니의 대화하는 집'이 있으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네 고향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더럽대" 라며 섬 주민의 아이를 몰려들어 때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악보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훌륭한 연주가가 되려면 기존의 연주를 그대로 본받는 것도 꼭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아무나 한 명만 치면 되잖아요."  교사와 아이의 대화가 발하는 우리 이성의 현주소와 교육의 뼈아픈 이야기가 흐른다.

학교에 들어가서 배워야 할 것들을 학원에서 미리 배우고, 준비하는 자만이 성공 할 수 있다고 끝없이 내모는 경쟁중심의 이 피폐한 사회,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시도할수록 지쳐가고, 서로 등을 돌리며, 누구보다 높아지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분노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윽고 화산활동이 멈추고 그들의 섬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이야기인 [다시 그곳으로]라는 연작은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이득이 없는 사람들이 떠나는 항구에는 어떠한 환송도 없으며, 화물선에 실려 비좁은 공간에서 독선적인 배의 절대규칙에 얽메여 항해한다. "선장은 언제나 옳다."  우리사회의 수많은 법률위에 있는 이 절대규칙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남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더군요."라는 이 세계에 대한 지도자의 행태에 이보다 적확한 이해가 어디에 있을까?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않다!" 와 대척점에 놓여있는 비이성적인 이 사회의 현실들을 다 섯편의 우화로 지펴낸 170여쪽의 작은 소설집이 발산하는 무게는 장중하기 이를 데 없다.  '가히  살인적'인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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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 - 모방적 욕망과 르네 지라르 철학 우리 시대의 고전 19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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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혹짙은 책의 제목만큼 '르네 지라르'의 주장은 매혹적이다. 그런데 이 매혹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지만 흥미로움을 떨쳐낼 수 없을만큼 읽는 즐거움이 있다. 우선 서구와 비서구의 구분 연장선에서 논의되는 차이(差異)와 다양성(多樣性)의 부정을 통한 서구중심주의, 모방의 폭력성 논의에서 야기되는 인간 본질의 불분명함,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비칠만큼의 타종교를 비롯한 고대종교의 폭력에 대한 무지의 주장이 그렇다.  즉, 같아지기, 따라하기, 혹은 의식, 무의적으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모방(模倣')'이라는 논쟁의 중심어(語)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모름지기 "인간관계의 핵심은 그 관계가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모방으로 되어있"으며,  "아주 사소한 몸짓까지 모방적 욕망 혹은 욕망하는 모방이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책은 이 모방이론을 토대로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옹호와 상대주의의 비판, 그리고 모방의 폭력성과 인간의 집단적 폭력의 속성을 폭로한 희생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3개의 논문과 이탈리아 메시나 정치학 교수인 '마리아 스텔라 바르베리'와의 자신의 철학에 대한 대담으로 구성되어있다. 바르베리와의 대담은 지라르의 연구자들에게는 그의 그간의 저술들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이지만, 일반 독자인 내게는 '상대주의 극복'이라는 주제하의 3개의 논문이 훨씬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1. 이중모방과 나쁜 상호성

 

우선 우리네 일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독특함으로 인해 이 '이중모방(二重模倣)'을 감상의 첫 번째 제목으로 삼았는데, 이는 아주 사소한 몸짓까지 '모방적 욕망'이 지배한다는 주장,  즉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타자와의 경쟁관계에서나 설명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들 사이에서도 과연 모방이라는 개념이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일례를 소개하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손을 내밀자 나도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는 행동"이 그것인데, 이것은 어떤 동일한 욕망관계나  경쟁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대수롭지 않은 제의에 내가 참가하기를 거부할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떨까? 아마 손을 거둬들이고, 등을 돌리거나 냉랭한 태도를 보이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모방이 아닌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손을 내밀지 않음으로써 모방을 거절했을 때 당신은 나의 거절을 되풀이함으로써, 다시말해 "거절을 모방함으로써 나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일치를 실현하는 모방이 나오자 오히려 불일치가 견고해지고 강화되는 것, 이것을 이중모방이라 정의하는데 이는 곧 모방이 얼마나 엄격하고 단호하게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상호성은 이렇게 모방을 통해 언제나 나쁜 상호성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결국 적대자들은 점점 더 같아지면서 역할은 서로 바뀌고 서로를 반사한다. 이 유사해짐, 무차별화의 과정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 인간들을 위협하는 갈수록 심화되고 많아지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우리네 일상에서 목격하게되는 무수한 형태의 폭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사유방식, 혹은 관점으로서 수긍할 수있다. 그러나 저항없이 순전히 납득하기에는 내키지 않는 것이 있다. 같아지는 것이 인간들의 궁극적 '목적'일까 하는 의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더 커다란 범주의 목적, 그것은 타자와의 '다름', 즉 '차이(差異)'가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라르는 '레비 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을 겨냥해 "차이 타령만 하는 그런 인류학은 당연히 불완전하고 불구"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비슷한것, 동일한 것, 차이가 없는 것으로 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모방이론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차이의 존중이라는 상대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모방의 사슬을 끊는 것, '차별화'함으로써 폭력이 발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지라르의 이 '차별화'에 대한 맹신은 사회의 양극화라는 이 극단적인 차별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2. 희생양 예수, 모방의 폭력성을 폭로하다

 

모방이론은 급기야 기독교와 타 종교및 고대 신들과의 차별성을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희생양'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는 "근거없는 비난을 제공해주는 그 맹렬한 전염때문에 까닭없이 비난 받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즉 우리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있는 모방적으로 집중 동원된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피해를 받는 희생양의 의미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희생양이다. 지라르의 주장은 여기서 시작된다.  거의 모든 종교나 신화의 신이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희생양이 되지만, 기독교 이외에 이 희생양을 박해하는 사회를 비난하는 신화나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외에서의 희생양은 그냥 죄인이며, 사회는 무고한 자일 뿐이지만 기독교는 사회의 유죄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차별화된 종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폭력의 전염에서 나오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인데, 모방은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기저(基底)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동맹에서는 인간 영혼에 들어있는 어두운 세력이 드러난다. 집단적 전이는 전혀 새로운 죄악을 얻는다." 인간의 모방적 욕망을 적극 이용한 이 집단적 푝력성의 전염, 모든 사람들이 빠져있는 모방적 경쟁관계의 결과인 집단 폭력에 앞서 나타나는 카오스는 희생양에 대한 반대를 통해 더욱 단단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곤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적 군중현상'인 "모방적 경쟁관계를 중단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은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러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곧 사회조화라는 것이 폭력적 만장일치라는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를 폭로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방적경쟁관계 이면에 숨어있는 이 폭력의 지배력을 끊어내기위해 기꺼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특정 종교의 유일신에 기반을 두고 있긴하지만 '모방적 경쟁관계의 중단'이 오늘 우리네 사회에서 얼마나 필요한 지적인가 하는 점에서 수긍의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위신재를 향한 끊임없는 소비의 부채질과 과시적 욕망, 교묘하고 은폐되어 자신들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공고화인 문화적(교육적) 구별짓기 등, 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단절을 위해 분명 모방이론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 책의 소감은 『마태복음 5:38~40』중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하여야 할 것 같다. 가장 폭력적인 사람도 자신은 항상 타인의 폭력에 대응했을 뿐이라고 믿을 정도로 폭력에 대한 인간의 관행적 환상을 지적하는 문구이다. "모방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에 폭력 상승작용을 향한 큰 문이 열린다. " 폭력상승에 가담하지 않는 것, 부정적 상호합작의 빌미를 끊어내는 슬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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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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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억을 들춰내는 추억이 깃든 사연을 듣다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아니 어떤 단어나 문장, 혹은 그 분위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곤 한다. '유배지의 한 끼니, 흘러간 사랑, 잃어버린 그 맛, 나그네 살이, 밥도둑- 토박이 음식' 등 다 섯장, 서른네 꼭지의 산문마다에 한둘씩 풀어늫는 추억의 레시피들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시선을 멈추고 곧 회상(想)의 세계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아마 개정판 서문에 작가가 써 놓은  "누군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문장 탓이었을까?

 

내가 제 아무리 혼자하는 삶의 의미있음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 고독의 허기를 모른 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배와 망명으로 제 땅에 있지 못했을 망정 항상 타인과 함께하는 작가의 삶의 풍성함에 시기심이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떠올릴 만큼 맛있었던 음식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던 순간이 지극히 없었던 내겐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나와 함께해주었던 사람들을 몇 번씩이나 생각하느라 글 읽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이라는 산문 속에 사랑스런 에피소드의 한 구절이 있다.  "수남아 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 받아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만을 위해 몰래 건네주는 무수한 의미와 정감을 지닌 그 음식과 함께했던 추억이 내게도 아스라이 시간을 거슬러 풋풋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그리곤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이라는 [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의 창]에 깃든 문장에서 다시금 그 타인을 기억 속에서 더듬곤 했다. 나는 "모시조개 넣고 된장 고추장에 끓인 '냉이 토장국''같은 기억은 없다. 줄 곧 하나의 대도시에서만 살아 왔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내 존재를 비춰주었던 여인과 함께했던 동숭로 가로변(지금이야 상업성 짙은 곳으로 변했지만)의 작은 카페 '오감도'에서의 음식과 분위가 지금에도 내 가슴을 설렘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잠시의 행복감과 설렘의 시간으로 향기로운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라는 문장이 날카롭게 나를 헤집는다. 이 달콤한 회상들, 누군가와 같이했던 순간이 이렇게도 오랜시간을 건너뛰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내가 진정한 관계들을 지니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파고든다. 내겐 음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그저 살기위한 하나의 습관 이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삶의 전체가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린것만 같다. 음식은 다름아닌 사람과의 관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 "내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작정"이라던 초판 서문의 이 문장속 단어들, '인생살이', 그리고 '사람의 관계'가 계속해서 내 입속에서 반복된다. 

'모하카르' 작은 해안마을에서  "무엇이라도 사납게 먹어치울 것 같은 식욕이 솟구친다." 던 '가스파초 수프'가 궁금해진다. 내 식어버린 삶의 열정이 살아날것 만 같다. 이 역시 함께했던 '부랑자'라로 부르던 벗이 있었기에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 살아났을 것이다.

 

언제나 나를 위해 달려오는 친구,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대학 1년 후배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하던 음식이란 것들이 뻔 한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억이다. "아욱 된장국이 올라올때면 어쩐지 수저가 무겁다. 좀 잘해줄걸"하는 이젠 세상을 같이하지 못하는 옛 지기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에서 "순수한 처음의 식사를 회복하는 일은 자기 시대를 정화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출발점이다."라는 구절의 전정함을 곱씹게 된다. 쉽진 않겠지만 이제 나도 음식의 맛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보다. 그와 그녀들과 함께하는 세상, 관계가 풍성한 세계, 인생살이가 의미로 가득한 세상으로 말이다. 함께하는 세계가 있는 작가의 인생살이를 한껏 부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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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2016-03-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비의식 2016-03-13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천천히 추억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