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가족특강 시리즈 2
이희경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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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족 특강'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기생충과 가족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에 이은 세 번째 읽기이다자본주의의 동력축으로 근대 이후 독특한 구조로 탄생한 핵가족(엄마-아버지-아이)이 '물적 토대'의 붕괴에 따라 해체분열되며 야기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이라 하겠다저자는 '루쉰'의 소설 광인 일기를 비롯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한국어 번역판 제목)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 하녀육체의 약속등을 통해 근대 이전의 가족 형태와 오늘의 핵가족의 차이를 설명하며나아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가족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오마주 했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그야말로 원만한 가족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타자의 배제와 낭자한 피 위에 들어선 잔혹한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핵가족 탄생과 관련된 이젠 고루해진 사설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문제는 21세기 오늘우리네 사회가 이러한 핵가족이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아마 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가 시작된 이래 핵가족을 토대로 한 물적 기반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적 기초 단위로 작동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소위 '정서적 연대'라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OECD 통계는 이혼율 1위 국가에 한국을 올리고, 1인 가족과 2인 가족의 증가와 같은 가족 형태와 주거 형태의 변화는 물론, "모성의 변화뿐 아니라 부부관계낭만적 연애에 기초한 내밀한 사랑이라는 신화도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페미니스트들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가부장제야!, 남자들이 문제야! "기존 가족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지체된 사회적 담론은 퇴행적 진단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 같은 가족 형태의 붕괴가 반드시 결핍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그리고 관계의 독점과 배타적 이기주의와 같은 핵가족의 속성마저 바로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부양하는 남성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정서적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라는 삼각형 구도를 깨뜨리는 근인(根因)으로서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물적 소비와의 균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루쉰의 Q정전 '정신승리법'을 삶의 신조로 하는 아Q란 인물이 마침내 이 좌우명삶의 습속을 의심하는 "성욕과 식욕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좌절"되는 순간을 겪는 장면은 '연애의 비극', '생계의 비극'이 어디에 토대를 둔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인간 세계의 모든 습관체제의 성립은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다이 토대의 붕괴가 몰고 온 오늘의 가족주의 해체 현상은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의 상실에 더해 급진적 기술사회로의 진입이 야기하는 유휴노동력의 양산초고령화 사회화로 인한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계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로의 '이행'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자 이희경은 지적한다즉 변화된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담론 지체로 인한 윤리적 공백의 발생이라는 것이다그나마 정서적경제적 안식처였던 핵가족의 붕괴는 폭행과 학대는 물론 버려지는 아이들방치되어 고독사로 발견된 노인들의 양산이라는 돌봄 노동 상실의 결과를 난폭하게 드러내고 있다그렇다고 자기 파멸성을 내재한 핵가족으로 다시금 회귀하여야 하는 것인가아니면 여전히 대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되는 가족주의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항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내려 한다아마 근래의 레트로 열풍, 1970년대 디스코를 소환하여 추억의 향기에 취하게 한 최근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복고적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위기와 돌봄 위기를 다시 가족 안으로 쑤셔 넣는"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시간 역행적 질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대 가족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시계를 뒤로 돌릴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경우즉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개인적사회적 대안도 없이 가족의 해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혐오의 대상으로서 노인에로스를 대체한 성폭력 ..., 한마디로 "공망의 세상이 될거"라 예견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 퇴행이 아닌 문명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연착륙은 무엇일까결국은 우리가 배척하도록경쟁의 대상자로서밟아 뭉개버릴 대상으로 배운 타자와의 관계 회복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 구축해야 할 새 질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결혼소울 메이트다자간 사랑(폴리 아모리)을 전제한 집단결혼과 공동 양육 및 재산공유체제인 일종의 집단가족제로서 '폴리 피텔리티등을 제시하고 있지만과연 이것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다만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공생적 관계의 회복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연습"해야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덕목일 것이다삐걱거리는 자본주의와 동행하던 가족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지금 종용하고 있다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와 연대의 세계라는 그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내가 남는다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진정 고집스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어쩌면 작은 관계들의 형성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변화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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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반양장)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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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대기에서 그려지는 기이한 사건들은 (...) 사실 오랑이 평범하다는 게 

첫 인상인 도시요, (...) 꼭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도시나 그 안에서 사는 삶의 

모습이 시시하리만치 평범하다는 사실뿐이다."

- 본문 9, 12쪽 변형 발췌

 

한 도시의 소개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첫 다섯 쪽은 지루한 설명과는 달리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장소나 사람들에게 발생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려는 서술자의 의지 때문이다. 더구나 증언과 서류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기술로서의 '연대기'임을 천명하는 것도 이 소설을 다분히 사실로서, 현실적 체감의 읽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어떤 의도를 느끼게 한다. 서술자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빠져나가려 들지 말라, 이것은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성을 띤 기술이라는 것이다.

 

의사 '리외'가 계단 중간에서 물컹한 죽은 쥐를 밟고 별 생각없이 계단을 내려온 이후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 가능성의 인식이 시작되는, 보건 전문가, 행정 관청은 물론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는 전언은 물론,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에 우선을 두", "자신들의 일상적인 습관을 방해 받고 이해관계에 영향 받는 것에만 예민했"으며, "첫 반응은 언론과 한 목소리로 행정당국을 비난하는 것"이었다는 서술은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를 생각케 한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지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제 생각에만 파묻혀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한다."

-본문 52쪽에서

 

코로나19로 세계가 신음하는 가운데,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있다.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 당사자와 이들의 가족 등 관계자, 그리고 이를 감당해야하는 의료진들 정도가 아닐까? 정말 이 숫자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어서 그저 "상상속에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는 서술자의 표현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의 지긋지긋한 투쟁"이라 한것은 이러한 인류적 재난에 씌워진 추상성, 즉 현실과 괴리된 이 추상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과제라는 자각임을 알려준다. 대개 자신만은 이 죽음의 전염병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상황으로, 좀처럼 자신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추상이 구체성을 띨 때,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 양식, 삶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태도를 발견케 된다.

 

재앙이, 페스트라는 억압과 절망의 공포가 '''내 가족'을 덮칠 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삶의 한계라는 그 간극의 좌절을 깨닫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절규하기 시작한다. 부당하고, 부조리하다고. 그럼에도 이 엄습한 불행의 인식, 재앙의 실체를 바로 자신, 인간 모두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이타적인 인간들의 행동이 시작되고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고서야 비롯됨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초기, 대구지역의 확진자가 급증할 때 자원봉사 의료를 위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도 이때쯤 해서 어렴풋이나마 바이러스를 자신의 안위와 연결짓기 시작했을 터이다.

 

"보건 위생대 덕분에 우리 시민들은 이 병과 싸워 물리치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을 납득했다.페스트가 몇몇 사람의 의무가 되자, 페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다."

- 본문 168쪽에서

 

도시의 폐쇄와 격리, 무차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의 현장이 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용기와 의지와 인내를 상실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을 미래로 재촉하고 싶은 비이성적 갈망" 조차 사그러진 채, 꿈꾸는 것, 미래의 도래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제 발밑만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점,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재앙을 내재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그 한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절망적 삶의 유한성, 삶이란 희망이라는 미래 없는 공허함이며 끝없는 패배의 연속일 뿐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해독이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이 세계,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의미를 획득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에서

 

재앙적 사건인 페스트는 다의적 언어로 여겨진다. 비인간적인 것, 원초적인 적의로 인간을 공포와 무기력, 절망에 몰아넣는 무 논리의 해독 불가능한 세계로써. 삶의 의미를 삭제하는 이 불모성 속에서 삶을 버텨내고, 이 무의미에서 조차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삶을 어떻게 수행해낼 수 있는 가의 물음일 것이다.

 

페스트의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폐쇄된 도시 오랑으로부터 연인과의 재회를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혼자 죄수가 되느니 차라리 다른 모든 이와 함께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는 재앙의 시간이 영속되기를 기대하는 '코타르', 주변의 고통에는 무심한 채 가족의 안위에 여념 없는 판사 '오통' 등 일상적 이기심에 침잠하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서술자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겸손함을 잊고, 자기들은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남들보다 더 잘못된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것이 불모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태도가 될 수 없음은 페스트라는 무차별성과 비이성 때문이다.

 

한편 이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위생대를 조직하고 역병의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타루', 하느님의 재앙이라며 "정의로운 이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고통의 암흑 바닥에 놓여있는 영생의 황홀한 미광"을 역설하는 신부 '파늘루', 내세의 영광이라는 알 수 없는 진리의 말 이전에 현실의 고통을 보살피는 것, 재앙을 회피하거나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기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가 있다.

 

"그 작은 얼굴에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더니 긴 비명이 흘러나왔다. (...)

아이가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전 인류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항변 같았다."

- 본문 271쪽에서

 

서술자, 아니 리외는 이 세계의 불모성, 인간과 불화하는 운명의 부조리함에 반항한다. 부조리를 자기 삶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삶의 인식의 최선봉에 내세우고 투쟁하는 인간, 모든 초자연적 위안을 집요하게 부정하며 메마르고 자신만만한 명철함 속에서 의사로서의 자기 수행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인간을 발견케 한다.

 

리외는 구원에 호소하는 것, 영원에 대한 향수보다 자신의 용기와 이성을 선호한다. 아마 인간을 부추기는 희망이라는 수단의 거짓됨, 인간인 자신이 가진 것의 한계를 아는 인물이기에, 추상과 그 공허함과 싸우려는 인간으로서 생명, 그 육체성을 지켜내는 구체성이 그의 삶을 정의한다. 오통의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함께하는 리외의 위 문장은 부조리를 떠안은 인간의 엄숙함, 실천 행위의 숭고함이 절로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온다. 죽음, 이 끔찍한 최악의 부조리에 대한 아이의 긴 비명, 그 항변에 괜스레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이 숙명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서술자는 파늘루와 타루와 리외를 통해서 삶의 부조리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인식한 인간이 어느 순간까지 이 부조리의 논리를 삶의 태도로 지닐 수 있는가를 다시금 묻는다. 부조리의 인식이란 삶의 유한함, 그 허무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육체의 시간에 저항하는 육체라는 모순이 놓여있다.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외치는 파늘루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영혼의 정화와 병 걸린 육체의 비논리를 생성한다. 파늘루는 이 부조리에 직면하여 부조리의 논리를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감으로써 이 처절한 모순인 신에 저항하는 것 같다. 치료를 거부한 채 페스트로 죽어가며 자신의 믿음에 순응함으로써.

 

이와 달리 '타루'는 그야말로 카뮈가 그의 에세이에 쓴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인다. 리외에게 자신의 과거와 삶의 이해를 말하는 부분은 부조리의 추론속 문장 "부조리는 인간의 가장 극한의 긴장이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유지하는 긴장이다." 를 떠오르게 한다. 방심하지 않는 인간, 긴장의 끈을 놓치 않는 의지, 한 순간도 부조리, 즉 페스트를 지니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

 

"이런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극도의 피로를 자진해서 겪는 것입니다."

- 본문 318쪽에서

 

그는 환상 없는 삶을 살아가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 그는 "이 세계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알고 있으며, "스스로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추방형"에 처했기에, 그의 삶은 모순으로 찢어졌고, 삶의 현실은 아무런 색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리외의 그것과 결별한다. 타루가 리외에게 말하듯이 그는 리외보다 야심이 덜하다. 리외는 부조리와 함께 숨쉬며, 부조리가 가르쳐 주는 바들을 인정하며, 그 교훈의 살아 숨 쉬는 육신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리외는 부조리의 인간, 삶의 완벽한 모델의 전형, 카뮈가 지향했던 반항, 열정, 자유를 삶에 그대로 투영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 최고의 풍경이 된다.

 

리외는 인간에게 속한 것만을 바라는 사람이며, 평화는 희망을 전제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희망, 미래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이 부조리, 관념 덩어리는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는 파늘루의 신이나 영속으로의 추락도 아니요, 타루의 관념적 허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구체적 예증들이며 그 인간적 숨결을 추구한다.

 

"이 연대기는 (...) 모든 이들이 공포에 맞섰던 기록이자,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공포의 가차 없는 맹습에 맞서서 확실히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 본문 390쪽에서

 

연대기를 마치며 서술자가 리외 자신임을 밝히며 기록의 성격을 표명하는 이 문장에서 인간, 자기 힘의 근본으로서 필요한 열의와 집중력과 통찰력을 읽게 되며, 강고한 인간적 확신, 모순 속에서 자기 믿음을 묵묵히 실천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인간 존재의 위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떤 형이상학도, 꿈의 미래와 같은 희망도 거부함으로써 완전한 현실의 자유 속에서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 인간적 열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페스트가 도시를 물러나고 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는 이 연대기의 작성이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또한 헤아리게 한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지금 우리네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힘겨움에 내몰고 있다. 주어진 한계, 이 현실 속에서 삶의 명백한 가치를 깨닫는 데 이보다 맞춤의 글은 없을 듯하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 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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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사 3 - 부상신편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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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의 배경인 일본 역사의 고대 시대와 중세를 잇는 헤이안(平安)시대(AD 8~12C)는 음악이나 시가 등 예술문화에 대한 지각이 솟아오르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작품은 당대의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 '음양사'를 되살려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로 각색된 이야기로 이해된다.

 

중심인물인 음양사 '세이메이'는 주술사이자 퇴마사이며 점성가이기도 한 딱히 범주화할 수 없는, 인간계 속의 삶과 죽음의 속성을 헤아리고 있는자라는 느낌이다. 이 인물과 사건 현장을 함께하는 마치 홈즈의 파트너인 왓슨을 상기케하는 고위관료이자 피리부는 가인이기도 한 '히로마사'는 인간냄새를 물씬 풍기며 세이메이의 신비를 현실적인 이해의 세계, 친근한 감각으로 이끈다.

 

이 책에는 7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지만, 매 한 편의 에피소드는 그 속에 많은 일화들과 헤이안 시대의 다채로운 역사적 풍경을 담아내고 있어 의외로 풍성한 읽기를 선사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첫 편인 참외 선인또한 천황의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읍을 휘젓는 괴이한 소문과 눈 앞에서 펼쳐지는 마술적 광경에 더해 귀신인지 신선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방사(方士)의 등장, 요물과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쏭달쏭한 인간 마음의 세계를 종횡 휘젓는다. 그리곤 보이는 것, 감각하는 것을 실재화하는 것은 과연 인간 마음의 결정에 달린 것인지를 곰곰 생각케 유인하는 듯하다.

 



사실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사고가 지배적인 오늘에 귀신, 혼령, 접신, 기우제 등 인간의 이해가 가닿지 않는 설명 불가능한 것들에 인간 정신이 여전히 어떤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실로 조화롭지 않은 어떤 모순된 감정을 갖게한다. 여기에 현대적 해석을 붙인다면 신경증, 강박증,분열증과 같은 정신의학적 병인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음양사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와 기괴한 사건들의 현장으로 우마차로 도착하여 해당 사건들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정신분석가의 그것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애증과 시기, 그리고 명예, 지위, 재산 등을 향한 절제되지 못하는 욕구에 도사린 몽매성을 깨닫도록, 그 지옥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가 곧 음양사의 역할인 것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냄비 따위를 올려놓는 둥근 삼발 모양의 쇠 받침대를 일컫는 쇠고리라는 에피소드나 헤매는 혼령은 공히 사랑하는 님을 잊지 못해 애끓는 여인의 불가능한 욕망의 이야기이다. 죽은 자를 이생에 다시금 불러 들여 해후하고 싶을 정도의 욕망,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운 마음은 커져만 갈뿐 사그러지지 않는다. 이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귀신을 낳는다. "귀신은 사람이 낳는다. (...) 귀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일 것이다."라는 세이메이의 말은 환각에 대한 하나의 진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정하게 바둑 두는 모습이 비친 장지에 어린 그림자에서 뱀의 모습을 보는 남자의 마음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의혹의 반영임이 드러나는 것처럼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 그 심연을 상상케 한다.

 

어쩌면 이 작품집의 의도였는지도 모를 돋보이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에피소드 사랑을 하느냐고는 헤이안 시대의 황금기라 할 시가(和歌;와카)와 예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내리(천황의 궁전)에서 하는 노래시합의 조직, 경연의 구성, 그 과정과 승자의 결정에 이르는 장황한 묘사가 그것인데, 당대 일본의 문화적 영광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아마 그네들에게는 중요한 문화적 중요성을 띤 역사적 문헌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작가적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단편은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향한 툇마루에 앉아 "밤의 어둠 속에 핀 겹벚꽃, 황매화, 등나무의 향기가 짙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내음을 음미하고 있는 두 남자의 그지없이 평온한 정경과 함께, 실은 보이지 않는 이 존재(향기), 그 생명성에 대한 사유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경연대회의 마지막 와카의 노랫말은 사랑하는 이의 수줍은 소박함으로 사자(死者)의 혼령과 주술을 떠나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케 하는 여운까지 품고 있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내 소문이 세상에 퍼져 버렸구나

이제 막 남들 모르게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음에도

살며시 숨어들더니 어느새 얼굴에 나타난 내 연심에

사랑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묻는구나

- 228쪽에서

 

한편 엎드린 무녀 피를 빠는 시녀라는 두 에피소드는 시기와 자기 과시라는 속된 욕망의 적나라한 드러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우가 앞선 출세를 하게 되자 참외의 외관을 한 주물(呪物)에 엮인 그 추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러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의 실체를 깨우치게 하는 음양사 세이메이와 히로마사의 두터운 우정의 대화는 생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선사한다. 히로마사는 귀신과 원한을 상대하는 친구 세이메이에게 말한다. 자네는 "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는 답변한다. "그렇지 않아. 자네가 있지 않은가." 생명을, 존재를, 그 고독함을, 고통에 대해 대화하며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지...

 

그런데 인간이라는 고통과 고독한 존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이메이와는 사뭇 다른 라이벌격인 음양사 '도만'의 행위는 생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안겨준다. 그는 "인간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어차피 여흥일세. (...) 죽을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 오직 그뿐일세. 아니, 요즘은 그것조차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어쩌면 악의 화신인 듯한 도만이 바라보는 삶이란 집착,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닌 유쾌한, 집요함을 덜어낸 삶, 관조의 여유로운 즐거움으로서의 삶. 요괴니, 귀신이니, 흡혈이니 하는 이 모든 인간 발명의 존재들이란 결국 인간 정신의 변형된 모습 아니겠는가? 나름 고대의 문헌과 전통의 산물을 끌어내 인간 정신의 틈새를 조명한 설화적인 이 소설집은 소재의 가벼움 속에 진지한 삶의 물음들을 지니고 예기치 않은 이야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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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가족특강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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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거 자체가 길 위에 나서는 거고, 길 자체가 삶이에요.” P 120

 

 

유튜브의 한 채널에서 강연된 내용이가족 특강이라는 시리즈의 제 1권으로 출간된 저작이다. 책의 제목 중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그것이다. 물론 이 어휘가 의미하는 것은 생물학명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고 있는 일. 또는 그런 생활 형태.’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란 오늘의 전형적 가족 구성형태인 혼인한 성인남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핵가족이다.

 

기생충을 관람한 이들은 영화 속 가족이 모두 핵가족임을 상기할 수 있다. 게다가 송강호가 분()한 김기사 가족의 생활형태가 사전적 주석과 일치하는 기생, 바로 그것이니 이 책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핵가족에 내재된 섬뜩한 반생명적, 반사회적, 병리학적 현상을 발견 규명하여 그 음침하고 교활하며 야비한 위악의 리얼리즘을 벗어나고자하는 변화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WARMING-UP (준비 운동; 데우기)

 


본론에 돌입하기 전에 저자 고미숙은 봉준호의 기 발표 작품들인 괴물,설국열차,옥자를 통해 문명의 폭력성, 기술의 오만, 욕망의 무한 증식을 향한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세 영화의 가족에는 엄마가 없다. 소위 결손 가정이거나 기이한 가족 구성을 하고 있다. 엄마가 있는 스위트홈의 핵가족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들은 결코 외부와 단절된, 타자와 경계를 둔 그런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모두 가느다란 하나의 탈출구를 제시하며 막을 내린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성 폐기물로 인해 출현한 괴생명체인 괴물을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큰 몸집, 거대한 입, 입안에 입, 그리고 또 입...”, 무한 탐욕의 상징물임을 알려준다. 생태계 오염이라는 거대한 재앙과 이에 대한 국가 시스템의 부조리함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다. 설국열차또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기술문명의 오만, 사건을 대하는 인간 태도의 어리석음, 그리고 멸망한 인간종족의 유일한 생존집단인 열차에서 조차 계급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종자임을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모두 지배 계급이 있는 앞 칸으로의 전진만 생각한다. 여기서 저자의 시니컬한 변은 걸작이다. 앞으로 가는 건 기차 바깥의 세상을 일체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끝에 가봤자 뻔한 것, 자본주의 생태계란 것이 정점에 오른들 우월감 이외에 대체 뭐가 있다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앞이 아니라 옆 칸으로 뛰쳐나가는 것,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기생충」 – 핵가족의 묵시록

 


Game over를 쓴 독일 슈피겔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한스 페터 마르틴오늘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안정적인 발전같은 것은 이제 없다. ‘극단적인 불확실성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진단처럼 신분과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정상적인 수단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영화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김기사(송강호)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는 망가진 혼돈의 이 세계에서 소위 성취라는 걸 어떻게 하는 지에 대한 전형의 제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중요한 것은 꿈이 아니라계획이란 것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확보하는 것, 내년에 갈 대학이기에 미리 당겨쓰는 것, 이게 계획이 되는 거다. 사기꾼의 방식인가? 아니,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대출 받아서 쓰고, 투자 받아 쓰고..., 그러니 이들에게 죄의식이 없다거나, 미안함과 같은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 매도하는 것도 자기 얼굴 침 뱉기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인간 생태계에 지독하게 적응한 인간들이라 해야 하지 않겠나?

 

()이 다른 을()을 어떻게 대하는지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이 지하에서 올라 올 때 발로 차 죽게 하는 것으로 설명이 족할 것이다. 소통, 연대가 아닌 그냥 밟아서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라고 사회가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지상에 작은 창이 간신이 걸린 반지하의 창도 없는 지하의 삶이 등장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 어떤 당혹감을 기억해 내게 한다.

 

김기사의 아들 기우와  딸 기정이 박사장네 저택에 진입하는 과정의 수단들과 그것이 성공하는 장면들에는 날카로운 이 사회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이 꼼꼼하게 투영되고 있다. 디지털 문명이 초래한,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노출된 상위 계층의 태도와 경험까지 배워 동일해진 욕망의 내재화는 이들의 현실과 이상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사실 핵심은 이제 부터다. 김기사네가 박사장네에 자연스레 기생이 가능토록 하는 근원적 배경, 환경적 토대라 해야 할까?

 

핵가족이 지닌 폐쇄성인데, 등장하는 세 가족 모두 타자와의 연결 고리가 한없이 취약하다는 데 있다. 광현 부부, 김기사 가족, 박사장 가족, 이들 모두 우리는 가족이야.’를 내면화한 채 외부 세계는 그저 정보를 주고받거나, 밟아 뭉개야 하는 존재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외부가 없다. 부자는 부자이기에 타자와의 접촉을 경계하고, 가난한 자는 올라서기 위해 타자를 혐오한다. 여기에 그 폐쇄성의 장막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박사장 부인의 영앤심플(Young & Simple)이라는 맹함은 오히려 양념에 불과하달 것이다. 타자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기우와 기정이라는 터무니없는 인간들의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핵가족, 즉 가족 이기주의가 자기 파멸적 구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니들과 우리로 구별하면서 인간 감각의 가장 원초적인 후각, 냄새 타령을 하는 박사장, 그가 얼마나 타자를 견디지 못하는 지에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아무런 공감도 잣대도 없음을 목격하게 된다. 냄새라는 어휘에 민감한 것은 김기사 또한 그 대척점에 있다. 가난의 냄새, 그 콤플렉스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서로를 인정할 외부가 없는 이들의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저자 고미숙이 지적하듯이 핵가족,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정작 그 속에 사랑도, 삶이라는 인생행로에 대한 서로의 응원이란 것도 부재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날, 생일, 이런 범주의 특정일에 핵가족들이 하는 행동이란 아마 상품과 이벤트 이외에 무엇이 아닐 것이다. 그저 마시고 먹고 쇼핑하는 소비, 그리고 화폐로만 이루어진 관계가 스위트홈의 정형화된 묘사라는 데 이의를 달기에는 변명거리가 너무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살인과 죽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기우가 아버지 김기사에게 하는 자기성찰이란 아예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던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한 치의 변화도 없는 욕망, 보편적 윤리란 것이 싹 거둬진 탐욕만이 여전히 넘실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당하는 모멸감에만 반응하며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란 아예 존재치 않는 인간들이 바로 오늘 이 사회 우리들의 초상임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론 핵가족 폐쇄회로 탈출하기


 

겉보기에 안정적이고 화목하며 단란한 우리 가족이라는 스위트홈, 핵가족에 담겨있는 진실이란 이처럼 음울하고 반생명적이며 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정작 핵가족을 해부하고 보니 거기엔 공감의 세계도, 윤리도,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있더라는 것이다. 괴물」「설국열차」「옥자에 엄마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한 가닥의 통로가 기생충에 와서는 막혀버린, 사방이 완전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길이 없는 데 이제 어쩔거야!”라고 묻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라고 말한다. 명문대를 가야해, 공무원이 되어야 해, 30평 이상 아파트를 사야해,...(...) 핵가족을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즉 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고 제안한다. 오늘 우리네 사회의 이 무수한 혐오와 적대가 빚어내는 갈등들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 개인들의 무한 탐욕을 근본으로 하는 핵가족, 그 구성원인 우리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변해야 하고, 내 가족이 변해야 한다. 너와 너희들에게 변하라고 말하기 전에. 비난의 손가락이 타자를 향하기 전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먼저 향해야 세계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팸플릿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 압축되고 정리된 문장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균형과 불안의 시대인 오늘, 그 꽉 막힌 듯한 모두가 원치 않는 세계에서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예리하지만 연민 넘치는 통찰의 혜안이 넘친다. 세계인이 공감한 문제작과 냉정하고 비범한 분석과 함께 하는 놀라운 각성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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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는 수학이라니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매혹적인 숫자 이야기
리여우화 지음, 김지혜 옮김, 강미경 감수 / 미디어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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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업무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직업군에 속하지 않는 이상 소정의 학업과정을 떠나게 되면 가까이 할 기회란 거의 전무하다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학과목 중에서 수학이나 혹은 이를 응용하여 생각게 하는 물리학 시간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마 보편적인 느낌이리라. 그러니 수학에 "이토록 재미있는"이라는 수식어는 왠지 기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직업을 보면 IT업계 종사자인 수학 마니아로 소개되고 있듯이 수학을 학문적으로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이가 아니라는 점은 일단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프롤로그에서 그는 '페르마 정리''리만 가설' 같은 심도있는 수학을 평이한 설명으로 대중 친화적 쓰기를 하려 했다면서 수학 공식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기까지 하며 유혹한다. 수학적 사고력, 논리와 추론 능력을 자가 테스트해 볼 절호의 기회라는 호기까지 생기게 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수학'이지 않은가.

 

첫 장을 열면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마랭 메르센'의 성을 딴 '메르센 소수'가 등장하여 기를 팍 죽이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 이외의 수로 나누어 지지 않는 수인 평범한 소수도 내키지 않는데 메르센이라니? 그럼에도 "2-1이 소수라면 n은 필히 소수"라는 정리까지 등장하고, 새로운 소수의 발견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를 찾는 수학 마니아들이 있다는 말은 왠지 도전의 욕심을 자극한다. 또한 소수 순서 생성 공식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서 난제를 슬며시 던져 이를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페이지를 넘기면 인간의 불타는 질투심의 아주 작은 사례가 등장하는데,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이다. 세 사람이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항상 남의 케이크가 더 커 보이는 이 심리적 본성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분할하여 만족 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질투 없는 목표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하였던 모양인데 '셀프리지-콘웨이 분할'이란 방법의 설명을 골똘히 들여다보다 문득 아이구 이렇게 많은 반복의 칼질을 해야 하나 하고, 그냥 조금 양보하면 될 문제를 하고 미소를 짓게도 된다.

 

아무려니 우린 일상생활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부분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직각 모서리를 가진 폭이 1인 복도를 통과할 수 있는 소파 단면적의 최대는 얼마일까? 현재까지 계산한 최대 면적은 조제프 게르버의 부분최적화법에 의한 2.2195란다. 그 발상 모형또한 문제만큼 흥미진진하다.

 

본문 49 쪽 부분 발췌

 

이처럼 수학적 난제들로 빼곡한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네 직관을 벗어나는 수학적 결과들을 보게 되는데, 조화급수의 발산 개념을 이용한 개미의 고무 고리 둘레를 도는 문제라던가 구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의 최단경로가 결코 직선이 아님을 수학적 증명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즐거움을 넘어서 인간의 감각이란 얼마나 편향적이며 관습적 환경에 지배되는지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SF 작가 류츠신의 소설삼체를 읽어 본 이들이 눈을 밝히고 관심을 가질만한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라는 만유인력의 작용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세 개의 행성 궤도를 과연 계산 해낼 수 있는가에 이르면 저자가 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사실 고마움까지 느끼게 된다. 일명 '라그랑주 평형점'이라는 "특정 초기조건에서 3개의 질점(소행성)은 정삼각형의 세 꼭지점 위에 있다."는 정리가 실제 태양과 목성, 목성 궤도상의 소행성이 이 같음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은 수학 이론의 우주 천체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신비로움에 가닿기도 한다.

 

대수 나선, 에어디쉬 편차, 그레이엄 수,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등 지적 호기심, 아니 우리의 사고력을 시험하는 내용이 즐비하다. 여러번 반복하며 곱씹어도 사고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내용도 물론 있다. 내 수학적 사고력의 쇠퇴 혹은 게으름 탓이겠거니 하며 후일 다시 도전할 과제로 남기기도 했다


모처럼 쓰지 않던 두뇌를 사용하느라 애쓰기도 했지만 결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사고하고 추론해보는 즐거움을 넘지는 못한다. 특히 책의 마지막장인 5수학적으로 세상을 수학하라는 이미 깊숙이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디지털 세계와 AI와 관련하여 '확률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수학은 남은 21세기의 언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갖게 된다. 삶의 믿음과 가치에 대한 편향으로 굳어진 사고의 틀을 잠시 조정하고 깨우기에 이 만한 책과 독서도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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