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애니미즘
오쿠노 카츠미.시미즈 다카시 지음, 차은정.김수경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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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철학은 더 이상 주객(主客)을 논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을 주체로 한,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간 - 사물, 동물, 식물, 화학물질 등등 - 을 대상화한 결과 그 오만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이었는지 반성적 고찰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 세기의 자기성찰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소외되었던 객체에게 새로운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의 교만을 탈피하여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려는 객체지향 이론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대상 일체 위에 군림하여 인간 자신의 힘, 즉 자력(自力)으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와 이로 인한 철저한 비인간 일체에 대한 소외와 자원화라는 합리주의와 효율성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은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비인간을 동등한 주체로서 이해하여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전에 이러한 이해가 없거나 시도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인간과 비인간 등과 같은 이항대립이나, 개체를 더하면 전체가 되거나 전체를 미분하면 개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일원화하여 동등성과 전체성의 시각으로 통합하려는 유장한 사유의 노력이 있어왔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서구철학의 자성(自省)으로 시작된 후설, 메를로 퐁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을 비롯하여 미셸 세르나 브뤼노 라투르를 경유하여 작금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이언트, 티모시 머튼 등 존재론적 실재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의존성이나 주객 혼효성(混淆性) 등의 변화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구의 사유는 이항 대립의 관계를 통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독립적이면서 관계들을 분리하는 요소들을 내적으로 포섭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서구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지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라는 잊혀진 고대의 원초 신앙을 21세기에 소환한 것처럼 대담한 기획이며, 철학적이고 인류학적 도전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늘날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짐으로써 150년 전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분리한 후 비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신(영혼)을 비인간에 투사한그런 소박한 애니미즘이 아니다. 다시 말해 풀, 나무, 벌레, 물고기, 돌 등 삼라만상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신앙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그 힘에 이끌린다는 함의(含意)를 지닌, 거대한 타력(他力)을 느끼며 자력을 잊지 않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상으로서 타력을 상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이다. 이미 인간이 무시하고 마음대로 남용하던 비인간의 배후에 숨겨진 힘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은 이러한 지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보다 풍부한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힘도 인간의 지혜도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음을, 또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기분을 기억해내는 작업이다. 21세기는 종교가(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일신교가 아니다!) 거대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오늘의 인류에게 주어진 새롭고 거대한 테마이다. 주객의 대립이나 정신과 물질 구별의 무용함, 무의미함을 전제로 한, 인간과 비인간이 공히 동등한 정서적, 영적 성질을 가진 존재임을 이해하는 신앙과 실천에 관한 종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인류학자와 불교철학자 두 사람이 나뉘어 애니미즘이 왜 오늘의 인류에게 소환되어야 하는 정당성이 있는지를 인류학과 초기 불교와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탐색, 논의한다. 사실 현대인은 인간과 비인간 정령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애초 상실되어 있기에 비인간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어떤 지적 감흥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장벽이 세워져 있어 표층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언어 이전(以前), 반성 이전과 같이 인간 사고를 초월하는 저 너머 세계에 가 닿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여겨진다. 바로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인류가 이해하여야 될 애니미즘 사고가 무엇인지를 민족지적 인류학의 현장 조사, 문학과 철학, 위상 기하학과 종교이론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요구되는 애니미즘 사고를 탐사해내고 있다.

 

문자 이전의 시대인 고대 원시사회는 동물의 정령을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죽였을 때, 그 동물의 영혼을 위해 제의를 지냈다. 그 때의 인간들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인간이었다가 곰과 같은 동물이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순환하는 세계를 마음속에 지녔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가 가 닿는 무시간적(無時間的) 기이한 시공의 경험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인류학자인 릿교(立敎)대학 오쿠노 교수는 오직 한 면만으로 형성된, 즉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유해, 면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걷는 존재를 이해토록 돕는다. 인과(因果)로 성립되는 현실 세계에서 인과 없는 세계가 만나는 놀라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었다는 색다른 시공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인류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은 오쿠노가 소개하는 아이누족의 곰 의례나 푸난족의 사냥과 같은 사례를 통해 애니미즘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푸난족의 새 사냥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데, 화살이 든 대통을 훅 불어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인데, 어느 순간 숲 속으로 화살이 날아가고 탁 하고 작은 새가 떨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을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 새를 맞혀 그 새가 떨어졌다고 인과율에 의해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과연 그럴까? 이것을 동시성으로, 무인과적 연결(우연)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작은 새의 죽음 너머 저편에 펼쳐진 어둠이, 죽음의 시계가 화살을 부른 것이라고, 푸난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불고, 죽음이 푸난과 작은 새를 에워싸며 퍼져나갔다고. 이것이 애니미즘의 관점이다.

 

죽음 속에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으며 생명체가 살아가며 무수한 만남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이해이다. 인과로 연결된 표층적 현실 아래 우연의 집적이 사태간의 결합을 통해 상호 연관되는 별개의 존재 영역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애니미즘의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고, 비인간 세계의 존재자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새가 화살을 맞았을까? 맞았을 수도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사건에는 어떤 인과성도 없지만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시간성이다. 이 세계는 수시로 이러한 무시간성, 동시성이 흘러드는 세계이다. 인과성과 무인과성의 세계가 스치듯 마주치는 찰나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이고 인간이 관여한 바가 아닌 인간 너머의 거대한 힘의 작용을 상상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한편 불교 철학자인 도요(東洋)대학 교수 시미즈 다카시는 애니미즘을 불교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서구 이원론의 참된 초극을 향한 무수한 노력들이 환원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을 시작으로 인도의 논리학, 대승 불교에 이미 이원론의 초극에 대한 이론이 발전해왔다는 주장에 입각한다. 특히 주체/대상/하나/여럿이라는 이항대립의 통합을 위한 추구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라는 공간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하다며 소위 삼분법을 설명하는데, 이를 서술하기 위해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논리가 과학적 논변이 아닌 초월적 형이상학, 즉 불교철학자(선승들 포함)들의 증명할 수 없는 사유들에 의존하고 있어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비판승계하려는 야심은 미완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서구 철학의 실패지점에서 인류에게 요청되는 존재론적 접근인 일원론적 통합의 지향을 동양의 불교와 애니미즘을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모든 영역을 포섭 아우르는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는 측면은 그 시도를 존중하고 싶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철학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철학과 긴밀하게 조응함과 동시에 일본의 독자적 철학을 구축해온 그들의 두터운 층에 시기어린 부러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으로 이어지고, 이를 극복하는데 나가르주나와 도겐의 중관주의 불교 철학을 통해 평면적 대립의 통합 너머 삼차원적 이항 대립의 포섭과 통합으로 나아가는 당찬 주장들은 나름 현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을 발견한 것은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과실인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 1932~)’.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비인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지속적 목소리를 낸 보기 드문 애니미스트란 점 때문이다. 그의 중심 사상은 타력(他力)’이라는 언어가 점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오랜 동안 시달려 온 이중성의 문제를 아우르는 혜안처럼 보인다. 지금의 인류는 자기 힘만을 과신하며 못할 것이 없다고 모든 것을 물질화, 도구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신감 넘치는 이면에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6~17세기 에도 시대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숙적 요시오카 가문과의 마지막 결투에 앞서 승리 기원을 하려다 말고 바로 결투장에 임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무사시는 배례하기에 앞서 배전(拜殿)의 종을 치려다 말고,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자문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인데 뭘 빌고 말고 할 것인가 하고는 승리 기원을 멈추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그는 왜 기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을까.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타력의 바람을 느꼈기에 그러했다고 해석한다. 무사시가 자력,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싸우려 결심한 것에는 이미 자신이 관여한 바가 아닌 타력이라는 기묘한 힘에 이끌려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니미즘이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물과 생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작용에 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상상력은 극도로 편협해졌다. 인간의 자력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저편의 세계를 차단함으로써 세계 실재의 참모습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자연의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방황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自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는 저절로라는 뜻이며, ()은 관여한 바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여나 해석을 통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체가 저절로 진실의 작용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겸허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61쪽에서 부분발췌


이 저술은 고대의 소박한 정령신앙의 재판이 아니다. 이 세계와 인간 존재의 위치를 깨닫고 잃어버린 상상력, 감수성을 복원코자하는 작업이다, 서구 일변도의 이원론적, 이항 대립적, 주객분리의 근원적 결여의 사유를 넘어서 만물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 사고와 행동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제안적 사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인류학이나 불교철학을 학문적 토대로 지닌 사람들을 비롯해 존재론적 고찰이나 객체지향의 철학, 즉 비인간 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식견을 충분히 제공하리라 믿는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그의 창작 좌우명으로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는 로트레아몽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적 성질의 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을 한층 더 대립적인 성질을 가진 수준에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그는 이 복합적 형상과 그것이 드러내는 배경 사이에서 그 구성 요소들 간의 대립과 상관의 이중적 얽힘이 재편성되고 변형 조정된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었다고 느낀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이질적 존재자들의 얽힘에 의해, 그 보이지 않고 소외된 의미들의 혼효적 창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애니미즘을 오늘날이라는 바로 지금으로 호출하는 이 논의는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세를 위한 너무도 중요한 출발의 사유가 되어 줄 터이며, 아마 이러한 태도를 향한 무수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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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9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력>타력>에니미즘‘ 순으로 저는 이해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필리아님 글을 보고 이 상관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본성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 되어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어지는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하다 보니 각각 다르게 이해 되는게 아닐까요? 생각해 볼 만한 좋은 주제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9 12:41   좋아요 1 | URL
애니미즘은 인과성이 없는 저 편의 알 수 없는 힘으로서의 타력을 승인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이 단순한 정의에 동의하는데요, 우리들이 자력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힘에 이미 타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이제 새삼스레 인정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책은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과 민간 신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쩌면 두 저자의 시도처럼 서구철학이 돌파하지 못하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인용,소개되는 책들을 더 읽어보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힐님~, 벌써 주말이네요, 즐겁고 유쾌한 주말 되시기를요 :)
 
아침 그리고 저녁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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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과 죽음의 짧지만 지극히 강렬한 이 이야기를 읽기에 앞서, 안쪽에서 걷다보면 어느새 밖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세계, 그 경계가 바뀌는 신비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질서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게 나의 충동을 그 어느 누구도 강요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는 데도 이어서 이 책을 펼쳐들었던 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한 걸까? 책이라는 사물과 나를 구성하는 유기체와 그리고 온갖 물질과 비물질들이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상호 연결로 조정되는 힘이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은 필연(無因果的 連結)처럼 내게 펼쳐졌다.

 

그리곤 바로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는 새 생명을 예감하는 첫 문장을 만났다. 그 어떤 생명이 소중하고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태어날 아기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 가득하다. 자신의 아버지, 태어날 아이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요한네스가 살아가는 동안 겪을 가장 힘 든 싸움 중 하나일 이 험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하기 위해 싸워야 함을 가만히 응원한다.

 

소설은 2부로 구성되어 1부는 요한네스의 출생의 순간, 생명 탄생을 에워싼 감사와 고투, 생의 시작이란 의미가 귀결한 시어(詩語)들이 생과 소멸의 짙은 사유의 강이 되어 흐르고, 2부는 한 생이 이울어가는, 불현듯 다가온 세계의 경계를 넘어선 요한네스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조망하는 관점의 이야기가 마치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통합된 듯 삶과 죽음의 세계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생명은 생성되었으면 소멸을 향해가기 마련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대단한 모험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생의 소멸이라는 어떤 부존재의 허무를 향한 길만은 아닐 것이고, 또한 어느 순간 세계 밖이라는 그 경계를 넘어서 다시 뫼비우스의 길 밖에서 안으로 들어설지 알 수도 없는 일일임을 나는 어렴 풋 믿는다.

 

물론 그 순환의 걸음 길을 다시 돌아 나올 때는 또 다른 변화의 존재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윤회(輪廻)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우주의 모두가 연결되었음을, 마치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서로 다르고 그 자신임을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떤 존재자를 분리하는 경계가 희미해져 이 세계우주의 거대한 흐름의 근원임을 실감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어느 날 잠자기 위해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간 아내 에르나가 다음날 아침 내려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요한네스는 마치 생과 멸의 그 이치 그대로의 그러함에 순응하듯, 그래그래, (...)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음을 떠올린다.

 

이른 아침에 깨어나 괜스레 딱히 할 일도 없는 요한네스가 이러저러한 소소한 행위에 앞서 공연히 행동의 순서를 망설이고, 그러다 느닷없이 어떤 동작을 행하게 되고, 이 방 저 방을, 마당과 창고를 기웃거리다 어떤 잡일거리를 발견하고는 하루의 일과가 생겼음에 비로소 평정을 찾는 장면을 읽으며, 공감하게 된 나를 거울처럼 보았다. 늙어간다는 것, 그 시선에는 익숙했던 모든 사물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고요를 내뿜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2부는 이른 아침 이미 사자(死者)가 된 요한네스가 생의 경계를 넘어선 무시간적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연결된 장면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간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 죽은 50년 지기 페테르를 만나 게를 잡고, 그 잡은 게를 시장에서 제일 먼저 사가던 노처녀 페테르센을 함께 기다리며, 젊은 시절 그녀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걷던 산책길의 어느 날이며, 아내 에르나와 친구 페테르의 아내 마르타와 만나던 한 때, 어느 덧 일곱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절이 무시간(無時間)적으로 흐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빨리 결정을 내리게나.”

 

검은 실루엣으로 흔들리는 페테르의 고깃배는 흰 뱃전부터

교회 묘지 앞 해변으로 들어간다.” - 100

 

항상 반복되던 요한네스의 거동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는 집은 이웃의 전갈로 인근에 살던 요한네스의 막내 딸 싱네의 발걸음을 빠르게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던 길에 딸이 분주하게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곤 싱네를 부르지만 딸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곤 싱네 얼굴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남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해 다가옴을 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몸을 그저 통과해 버린다. 싱네의 온기가 그를 관통한다. 가벼운 두려움이 떠오른 채 자신을 지나치는 딸아이의 몸을.

 

싱네는 온통 어둠에 잠긴 아버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버지의 담배갑과 성냥이 항상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 싱네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침실 방을 열고 등을 킨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꼼짝하지 않는다.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입술이 떨려온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다.” 홀로 죽음을 맞고 온종일 침대 누워 계셨던 요한네스, 아버지.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그가 죽었음을,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두었음을 알려준다.

 

친구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페테르가 온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가는 거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내가 너이고 모든 것이 하나이지만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자기 자신인 온 우주세계가 하나인 곳이니, 요한네스와 페테르의 구별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긍정되는 세계,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 인 세계, 작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생성중인 삶과 죽음의 리듬’, 그 순환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163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하나의 전체가 있어서 거기서 시작이 그대로 끝이기도 하다는 선불교가 떠오른다. 또는 이편과 저편, 나와 너라는 대상이 분화하지 않았다는 요즘의 실재론적 존재론의 세계,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서로의 영혼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 순환의 고리에 순응하는 섭리를 생각게 된다. 작가 욘 포세는 아마 서로 대립하고 분리되어 미분화하는 세계의 추락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한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인위적 관여를 떠나 자연의 힘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자연법이(自然法爾) , 본원에 의한 것으로부터 저절로 그처럼 있게 한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가닿게 한다.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모든 분절의 무화(無化)가 이야기되는 세계 말이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을 느끼고, 언어와 지식을 넘어서 만물을 있게 한 작용에 마음을 맡기고 열린 기분을 기억해 내는 것, 아마 우리들이 사는 이 세기의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 불안을 탐색하는 작가의 깊고 깊은 사색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주체가 어디 있고 대상화된 객체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주객 분리의 사고가 지금 인간사회를 어떤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러한 목소리들에 대한 한 울림일 것이다. 곰과 나무와 돌의 대화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저 먼 원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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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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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세 편의 단편에서 시시하다라는 기분에 잠식된 인물들을 공히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아마 너무 익숙하고 뻔해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이어서 하고자 하는 것도 별 신통함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무어 그리 신통방통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겠는가. 어쩌다, 아니면 예기치 않게 정말 대단하고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연속 아닌가? 그런데, 순간 스치는 생각이 내게 이러한 시시함의 느낌을 경계하라고 일깨운다. 그 익숙해서 보잘 것 없음의 이면에 속살거리는 무수한 함의, 삶의 진실들이 있음을.

 


표제작 파주에서 일산 변방 논술학원에서 좆같은 맞춤법이나 알려주며 밥벌이하는 화자 윤정이 아이들의 평가하는 눈이 싫다고 할 때, 현철이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미워하는 거보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 너무 무서워 하다보면 그게 미워지는 거거든요.”라고, 어떤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시시껍절하게 되고 만다는 말일 것이다. 현철은 윤정과 함께 살고 있는 정호란 인물에 의해 군 생활 내내 맨 날 뒈질 것 같은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던 인물이다. 현철은 정호에게 당한만큼 잔혹하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 반복된 고통의 기억이라는 익숙함과 3년이라는 시간 속에 하찮음, 시시함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그 시시해지는 감정을 떨쳐내고 복수(?), 사죄로서의 보상을 요구한다.

 

이와 달리 가해자인 정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게 언제 적이야.”라거나, 괴롭히는 축에도 못 끼었다.”고 말한다. 소설은 가해자의 기억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진부한 또 하나의 주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호와 현철이란 인물들의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시선으로서 윤정이 느끼는 현철의 시시해 보일만큼 긴 미움에 대한 감응이다. 그래서 현철의 비열하고 역겨워도 보상 받고 싶다는 말을 윤정은 잘 헤아릴 수 있다. 정호는 자신이 현철에게 뭘 잘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시함 속에 하찮아진 것인데, 어쩌면 이 시시함이 함의하고 있는 오래시간의 축적, 익숙함이 가져온 둔감함에 묻혀버리는 생생한 미움의 감정을 망각한 까닭일 것이다. 화자 윤정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무 시시해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변화없는 규칙적 단조로움이 가져온 익숙함에 매몰되어가는 자신에 대한 항변의 목소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녀는 왜 정호를 떠나지 않을까? 시시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불감증 인간을. 내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두 번째 작품인 그런 사람의 주인공 는 가벼워지기 위해 서울에서 3,870킬로 떨어진 후아힌의 락사수바 리조트에서 3개월 째 머물고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무게로 짐 지워지는 것을 떨어내려 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 떨어낼 대상이란 것에 대한 몇 가지 정황이 발설되어 추정될 수는 있지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직장 상사인 유부남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이를테면 유부남을 꼬신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 모르는 애, 다 알면서도 만난 어리석은 애, 머리채를 잡고 가기에 딱 좋은.”과 같은 시선이 가져온 고통인지, 아니면 7년 전 문화센터 소설수업을 맡았을 당시 선배와의 어떤 부적절한 사건인지 불확실하다. 다만, 이들 모두가 화자인 를 무겁게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7년 전, 소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러나 이후 쓰기를 멈춘 채 일반 사무직원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상황으로부터 도피처럼 보이는 후아힌으로의 가벼움을 위한 떠남은 체류 3개월이 되던 어느 날 기억 속 멀리에서 유영하다가 곧 사라져도 무방한수강생의 연락을 받는다. ‘는 가벼움에 방해가 되는 기억의 무거움으로 거부감을 갖지만 후아힌에 1개월째 체류하고 있다는 남자와의 마주침을 불가피하게 피하지 못한다. 그는 7년 전 소설수업을 하던 선생님, 더구나 배우고 싶었던, 아끼고자 했던 선생이 아님을, 변화된 인간을 보게 되고, 그녀를 도우려 한다. 그것이 순수한 보호의 심정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가벼움을 방해하는 남자의 불편함으로 는 후아힌을 떠나 돌아온다. 그리고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병원의 도움을 받는다. 치료법인 모양인데 나비와 꽃을 색칠하는 것이 나를 고쳐주었다고 하며, 그런 시시한 생각을 자주했다. 아주 가볍게라고, 삶을 무겁게 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중요한 것을 놓쳤다. 제목인 그런 사람의 지칭된, 타인에게 인지된 변화된 범주로서의 인간, 그것의 인정이라는 것, 그대로의 수긍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소설 제목에 답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 직시가 가벼움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 게다. 다 잊고 새로운 껍질로 갈음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이라고. 변화된 자신, 바로 그 자체로서의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세 번째 작품 보통의 경우보통이라는 수식어처럼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극한 다수성, 바꿔 말하면 이 또한 시시함에 대한 연속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케 한다. 방송사 외주 사무실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는 막내사원 지수는 선배인 희진 언니가 직장을 떠나 환해서 눈이 멀 것 같은 곳, 토레스 델 파이네로 떠날 때, 머리카락이 거의 모두 빠져 모자를 벗을 때 가발이 함께 벗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희진은 지수에게 말한다. 이건 말하자면 비슷한 애들끼리의 결속 같은 거야라고. 비밀은 비슷한 애들끼리만 가능한 거라고.

 

지수는 소위 짬밥이 쌓이지 않은 막내 작가이기에 협찬 코너 원고를 쓰거나 온갖 잡다한 일을 버텨내야 한다. 그녀는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음식섭취로 축약되는 탈모의 원인들로 인해 정수리와 두피 부분이 미치도록 가려워 진물이 날 정도로 긁어댄다. 그리곤 이 증상을 언니가 말한 결속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또한 긁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들이 (...) .매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버텨내야 하는 고통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도 대학 등록금 대부금을 갚기에는 20개월 남짓 남았기에,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녀는 버텨내느라 그 보상으로 인한 것인지 초고도비만과 고도비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뚱뚱해진다. 보복, 음식고문으로써.

 

지수는 밉보이지 않기 위해 융통성이라는 것을 보이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직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중 한 신입 남자 피디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생각한다. 나의 다음을 궁금해 할까, 아니, 누군가는 나를 조금 궁금해 할까. (...) 내 이유에 대해서, 체념과 절망 사이,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그 익숙해지는 삶의 슬픔의 감정은 사실 꽤나 끈질긴 모양이다. 이윽고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그녀는 자신도 하나의 독자적인 방송을 맡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제안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실제 참여자가 되어 체중 감량의 출연자가 되는 것이고, 이후 결과에 따라 메인 작가로 발탁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녀는 수락하고 직접 체중 감량의 실연자가 된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가 되어주던 피디는 왜 그 작업을 수락했느냐고, 그냥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그러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촬영 구성안이라는 허용된 말 속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겨 놓을 때만 작은 희열을 느꼈다.”, 한 협찬코너의 원고에 올 겨울은 어떨까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라고 써 넣지만, 최종 방송분에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는 삭제되어버린다. 지수는 보통의 삶, 시시한 삶을 당분간 꾸려가기로 한 것일 게다. 시시함, 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의 단어에는 우리네 삶의 온갖 곡절이 숨어있는 듯하다. 익숙함이 가져오는 무감응이나 망각, 반면에 체념이나 그대로의 순응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 보존의 의식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지혜가 버무려진 언어, 삶의 농축인 것만 같다. 왠지 시시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은 평온을 느끼게 된다. 김남숙 작가의 앞선 소설집 아이젠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알고 싶은 또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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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운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1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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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의지와 운명1,2권  통합 감상입니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어...

그렇다면, 선생님, 필연은요. 그 빌어먹을 필연은요?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06)

 

소설은 오늘을 구성하는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류하며 형제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부조리한 삶의 형식인 시간의 악을 드러내고, 그 악의 형상이 어떻게 오늘의 인간문화에 깊숙이 불가항력적 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히 신화적으로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잘린 머리다.“, 이 이야기의 종국이 비극임을 전제하는 이 문장은 비장(悲壯)하게 다가온다. (註: 카스토르와 폴룩스, 카인과 아벨, 이들 신화와 성경 속 인물과 소설 속  여호수아와 예리고를 읽으면 더욱 풍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

 

태평양 연안 게레로 주 연안, 바닷가에 야자열매처럼 버려져 모래밭에 뇌수가 흘러내리는 몸통을 잃은 머리통이 자신의 짧은 삶의 여정과 시대의 역사를 술회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린 자신의 머리통이 멕시코에서 천 번째임을 밝히는 통계 숫자는 그 사회가 만연한 범죄의 장소임을, 뿌리 깊게 부패한 곳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술회하는 머리통, 화자는 여호수아 나달이라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다.

 

연안 모래밭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통, 여호수아는 자기 삶의 여정을 소년시절부터 거슬러 술회하기 시작한다. 코주부로 놀림 받던 어느 날, 에롤이라는 동급생 불량소년들의 우두머리인 에롤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이때 예리고란 소년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고 에롤을 망신시켜 더는 여호수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처리한다. 여호수아와 한 살 많은 예리고는 평생동안 유지될 동맹, 신성한 형제로서의 의무를 맺는다. 그런데 두 소년 모두 의지가지 할 부모를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정기적 도움으로 살아가지만 둘 은 그 누군가나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각각의 진리, 그들이 학습한 독서와 지식에 기초한 비평의 틀을 통과한 의견만을 받아들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사회가 설정한 모든 근거나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피로파테르 신부의 가르침인 스피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페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대변되는 자유에 대한 관점, 즉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라는 중개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는 두 철학처럼 둘의 삶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조금씩 달리 진행된다. 에리고의 그 어떤 귄위와 위압적 체계에 대한 부정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으로, 여호수아에겐 확실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과 친구가 된 에롤이 이 둘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너희에게 허용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운명과 내기를 걸어보거나 (63).”

 

이제 두 청년은 운명과 내기를 거는 의지라는 자유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걸음의 길은 그들의 신념만큼이나 다르다. 여호수아는 실제가 허구를 능가함을 안다. 그의 성장통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 그를 간호했던 간호사와의 세속적 신음과 기다란 감탄사로 표현되는 최초의 정사이후 깨달은 것이라면 헛소리가 될까? 이를테면 여호수아는 현실론자이고 예리고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마도 어설픈 구분이 될 것 같다. 여호수아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뼈대에 살을 붙이는,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국립자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지만 그 드러난 문제점의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예리고는 갑작스레 자신은 프랑스로 떠날 것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보이지 않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대화의 문장은 이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하나가 될 듯하다.

 

오감에 근접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 환상의 모든 권리를 갖춘 그런 상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80)

 

사람을 망치는 게 뭘까? 여호수아는 명예? ? 섹스? 권력? ...” 거론하지만, 예리고는 그 반대쪽에 있는 실패, 무명으로 남는 것, 가난, 성불구...”를 호명한다. 여호수아의 주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한 주장인 반면, 예리고는 부정성에 기초한 단정이다. 예리고가 떠난 이후 여호수아는 대통령과 통신사업으로 멕시코 최대의 부를 가진 막스 몬로이의 자문역인 변호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법과 이론의 실제적 통찰을 위한 스스로의 관찰이라는 경험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고, 멕시코의 시베리아이자 황무지 안의 황무지인 감옥중의 감옥인 교도소를 출입한다. 인구의 절반이 가난 아니면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멕시코의 실상인 하부 세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독특한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스스로 수감되기를 원해 석방을 거부하고 교도소의 질서자로 군림하는 인물, 미겔 아파레시도를 관찰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졸업에 즈음하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마키아벨리와 국가의 탄생>이라는 변호사 자격취득 논문의 주제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예리고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상히네스에게 호출되어 불려간다. 여기서 예리고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대통령실로, 여호수아는 막스 몬로이의 통신사업제국에 입사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음모와 배신, 비열함과 추악함, 탐욕으로 일그러진 멕시코 사회를 철저하게 해부하기 시작한다. 막스 몬로이의 어머니인 망령이 여호수아에게 건네는 꿈 속 같은 훈계들은 배신과 거짓말, 만행과 복수로 점철된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그것은 운명에 마주선 의지의 시험대가 된다. 이십년이나 지속된 내전, 그로 인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 (...) 이 나라는 배신의 나라야.(202)”

 

젊은 피를 수혈받은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주문한다. 투표만 해서는 민주주의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욕구와 갈증과 허기를 다독일 수 있는 축제를 조직하라고. 사실 오늘날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퇴락한 후진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국민을 상대로 뻔한 농락을 행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이 퇴행적 기만수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 사회와 국민들에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기득권 계층의 집요한 수구적 탐욕과 이를 위한 기만과 거짓, 부패라는 악의 세습이다. 다시금 마이클 존스턴의 한국사회의 부패유형을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라는 아픈 말이었는데, 딱 소설 속 멕시코의 유형이랄 수 있다.

 

이야기 속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말한다. 의식(儀式)은 우리 모두가 누더기를 가리기 위해 어께에 두를 수 있는 품위 있는 망토라고. 에리고는 대통령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벤트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념인 이상주의, 즉 무능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의 준비로 활용한다. 아주 흥미로운데, 이때 대통령의 유일한 경쟁자인 막스 몬로이는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런 기만적 수단은 오히려 국민의 불만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정보 사회인 오늘은 그런 비밀스런 통치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쟁자가 하는 경고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기득권집단의 암묵적 협력이다.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내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고요 협박인 듯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공조이자 동업자의 협력인 것이다. 예리고는 실패하고, 권력에 쫓긴다, 잡히면 죽음이다.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모든 운명이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명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철문이 닫히듯 삶의 문이 닫히고 만다. (...)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운명을 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확실함이 인생의 실체적 기후라는 사실을....” (246)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젊은이는 그 어설픈 낭만적 이상주의의 독단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이 소설이 얄궂은 것은 여호수아를 정점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건, 교도소의 지배자인 죄수 미겔이 되었건 막스 몬로이와 맺게 되는 관계다. 이 관계에서 빚어지는 증오와 복수, 빼앗긴 욕망,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는 그늘에 덮인 실체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에 토대를 둔 사회에서 의지라는 것은 한낱 숙명으로서 허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양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사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역사거나 현실의 실체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참혹한 폭력의 토대에 구축된 기득권 계층사회이다. 일본의 주구들, 미군정에 기생한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그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와 경제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부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

 

막스 몬로이라는 경제 권력의 거대주체는 여호수아의 믿음인 실제는 허구를 능가한다는 진술이 바로 허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압하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신화가 현실을 기만하고 세계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그럴싸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실제가 허구를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산다.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필연에 대한 믿음은 폭력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현실을 제압하는 허구의 세계인 멕시코요, 바로 허구의 다른 말인 조작이 판치는 한국이며 악의 형상이다. 젊은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늙은 겁쟁이들이 권력을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수구의 심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피비린내 나는 희생양으로 던져 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머리가 잘려 해변가 모래위에 던져져야 했을까?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비정한 비극적 드라마는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에 집요하게 매달린 인간들의 염오(厭惡)의 역사, 그 현실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걸작을 이제라도 읽어 볼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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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지 않고 필리아님의 리뷰만 봐도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라 지네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걸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1 12:21   좋아요 1 | URL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허망함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자유는 우리의 야망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말고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의지라는 수단으로 운명을 돌파해 내려하지만, 거대하게 구축된 권력의 세계에 희생될 수 밖에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답니다. 무엇보다 푸엔테스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괜찮은 소설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 마힐님 ~~
 
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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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역주행 소문을 듣고는 책장 어딘가에 꽂아 두었다는 기억을 살려냈다. 아마 몇 차례 자리를 옮기며 책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책 중 하나였던 것이 분명했다. 앞뒤로 배열된 뒷줄에서 찾아냈다. 바로 첫 페이지를 펼치고 읽어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로 닥쳐왔다. 진평강 하류에 떠내려 온 두 사람의 시신을...”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이 문장의 유혹을 보지 못했는지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걷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39쪽에서

 

이 소설은 사랑과 숭고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위에 인용한 소설 속 숭고에 대한 주인공 도담의 이해처럼 어떤 고결성과 같은 드높은 고양의 언어는 늘 과장의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과장의 언어에는 무엇인가가 은폐되어 무지의 유보상태로 남겨지기 일쑤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사랑과 숭고라는 언어에 드리워진 음영을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인지 이야기는 초입부터 수영을 배우기 위해 아빠 창석을 졸라 진평강을 찾았다가 미장원 원장 미영의 아들 해솔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때 부지불식간에 해솔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도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부가 하얀 서울에서 갓 내려온 도시적인 해솔에 무의식적으로 매혹되었을 수 도 있으며, 아빠로부터 배운 생명 구조에 대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동기야 어떻든 물에 빠져 곧 익사할 수도 있는 사람을 보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 행위를 아주 고결한 정신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숭고함이라 말하기도 한다. 숭고란 말은 이처럼 항시 죽음에 근접한 어떤 생명 초월의 현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 행위 또는 정신에 은닉된 수수께끼같은 이성을 넘어서는 고귀함에 대한 표현 불가능한 개념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소방관인 아빠에 대한 헌신적인 생명 구조의 노력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빠가 기관지 질환으로 입원한 엄마의 부재 속에서 해솔의 엄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해솔을 물속에서 구조한 이후 도담은 해솔과 우정을 쌓아가고, 이윽고 어린 사랑의 싹이 피어난다. 그리고 둘 만의 비밀 장소에서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된다. 도담은 아빠와 해솔 엄마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아빠의 핸드폰을 훔쳐보고 그들이 숲속 계곡에 있는 칠성폭포에서의 만남을 알게 된다. 도담은 해솔을 설득해 아빠의 소방관용 랜턴을 손에 쥐고 어두운 숲속 밤길을 오른다. 해솔은 그만 둘 것을 청하지만 도담은 듣지 않는다. 그녀는 존경하던 아빠에 대한 믿음이 훼손 된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인데, 이윽고 현장 근처에 도달한 도담은 두 사람의 만남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 한다, 그때 해솔은 도담의 입을 틀어막고, 급작스레 랜턴을 폭포 용담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비춘다.

 


폭우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당황한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해솔의 엄마 미영을 보호하려는 창석은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간다. 수일간의 탐색 끝에 소설의 첫 문장처럼 두 시신이 발견된다. 빼곡하게 다슬기로 덮인 부패한 두 구의 시신. 작은 마을은 온갖 악취나는 상상력으로 뒤덮인다. 고아가 된 해솔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도담의 집을 찾지만, 도담의 엄마 정미로부터 악의에 찬 독설을 듣는다.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 마.”, 그리고 도담으로부터도 그 어떤 기약의 말도 듣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린다.

 

정미의 차가운 언어는 해솔의 엄마 미영과 남편 창석의 관계라는 수치스러움과 분노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해솔이 어떤 죄책감을 가져야 했을까? 외로웠던 엄마, 친절하고 존경받는 의인이었던 도담의 아빠 창석에 대한 호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소년이 질 수 있었을까?

 

정말 사랑 했나 아니면 그저 욕망에 도취한 불장난이었나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 82쪽에서

 

거침없이 휩쓸 듯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물이 급류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떤 현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라는 비유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이 둘의 의미를 그 물리적 속성을 지닌 급류 실체로서의 장면과 이 장면을 겪은 후 깊은 내적 영향을 갖게 된 두 사람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참으로 그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출현한다. 사랑과 욕망의 도취, 과연 다른 것인가? 다르다고 제시하는 혼인으로 취득된 가정의 불가침성에 대한 법 규정과 도덕의 덕목들, 그런데 사랑이 과연 법과 도덕으로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던가? 대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궁핍함 속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소박한 꿈의 실현을 위해 약학과에 진학한다. 도담의 그리움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며, 약사가 되어 도담과 함께 하는 삶의 시간을 위해.

 

이후 도담과 해솔의 삶의 시간을 오가며, 3년 만에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 그리고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과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 미안함, 그간의 외로움과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3년이란 시간의 공백을 없애려는 듯 다급하게 하나가 된다. 서로의 존재가 아팠던두 사람은 절박하게 서로에게 안긴다. 나는 서로의 존재를 아파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 사랑의 정의가 어쩌면 숭고와 어울리는 우리가 찾는 그 사랑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폭포 사건을 시작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는 도담과 해솔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삶의 단면들을 비추며, 작가의 말처럼 급류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안녕을 찾아가는 여정을 쫓는다. 아빠를,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과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 한편으론 해솔과 도담 서로에 대한 미안함이 얽혀 두 사람의 상처입은 마음은 갈등과 치유 사이를 오가며, 고통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이 여정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그러한 사랑의 정의들은 성장, 혹은 성숙 과정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상처입은 사람의 냄새를 도처에 풍기며, 그녀에게 각인된 사랑이란 언어는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담에게 사랑은 사기이고 기만인,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 치는치사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의 엄청난 크기에 대한 도담의 오인 때문일 것인데, 다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을 가장 좋은 것이라 믿는다고 사랑 예찬론자인 친구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해솔은 도담과 함께 있다가 정미에게 발각됨으로써 다시금 강제 이별을 하게 되고, 졸업 후 소방서 구조대원이 된다. 그리고는 각종 화재와 재난 현장 속에서 생명을 구출하는데 헌신하고, 수차례에 걸친 화상과 생명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기도 한다. 동료들은 그의 행위를 자살행위라고,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왜 해솔은 약사라는 안전한 직업을 뒤로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소방관이 되었을까?

 

도담이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병원에 해솔이 중화상을 입고 실려 옴으로써 8년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이는 도담이 해솔에게 하는 말속에 그 답이 있는데, 너는 너를 용서했니?”라는 두 사람 모두 12년간 자신들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 필요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서로에 대한 거울은 앞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아픔의 감응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잘 알려진 소설에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이라는 문장이 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존재가 버티는 거대한 힘일 것이다. 그것은 잘 포장된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며,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는 마케팅 같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로움이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내 상처만이 더 크다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그런 냉소적 오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랑의 진정을 폄하하는 가난한 마음도 아니다. 특히 사랑은 허술한 교리 따위는 더욱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아마 대형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매몰된 현장에서 눈이 감겨 오는 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는 해솔의 말처럼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여기서 도담이 사랑은 기만이고 사기라고, 그저 설명할 말이 없어 한 단어로 퉁 치는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드디어 사랑은 지고한 숭고함에 이른다. 해솔이 도담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의 이야기가 주제에 이르기 위한 전복의 언어로 발설되는데, 이 문장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비밀로 하기로 한다.

 

바다에 재가 되어 뿌려졌던 아빠 창석의 기일을 한 번도 치룬 적 없었던 도담은 사랑의 숭고성 앞에 해솔과 함께하는 삶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해솔과 함께 추모선을 타고 하얀 국화송이를 바다에 띄운다. 아빠 창석이 하던 일은 생명을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었음을. 두 사람은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는 마지막 문장처럼, 삶의 급류라는 휘몰아치는 시간을 견뎌내고 사랑과 생명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배웠던 것일 게다.

 


누구든 급류에 휩싸여 그 흐름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급류는 현실의 폭우 속 강물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급류에 더 많이 속수무책이 될 때가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한동안 잡아 얽매이게 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것과 마주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도담과 해솔은 그 마주함에 이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책임을 덮기 위해 급류라는 그 사건의 기억들로 회피하고 있었음을, 두 사람은 그것을 서로라는 거울을 통해 발견하고, 바로 그 거울 됨이 사랑임을 확인한다. 그래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하는 것"일 게다. 이 사랑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나오려니 조금은 더 머물고 싶은 아련함이 남는다. 해솔과 도담의 그 절박한 사랑의 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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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4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서관에도 예약이 꽉 차 있네요^^

필리아 2024-11-14 22:02   좋아요 1 | URL
저도 명쾌하게 역주행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은유와 상징 등 책읽기의 숙련(?)된 사유를 요구하거나, 사변적인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아주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가 두 어린 인물들(열일곱살)의 성장(서른살)과 함께 정서적으로 친근한 의미로 풀어내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천박하지 않으면서 어떤 고결한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에요, 또한 다소 충격적(?)인,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지니게 된 죄책감을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을 통해 그것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이야기의 재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더욱 빠져들게 하는 점이 아닐까해요. 두서없는 제 소견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꿈 꾸는 밤이 되시기를요. :)

p.s. 통속적이라는 의견도 있네요. 네, 그 통속성이라는 친근함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맞서고자하는 어떤 숭고함으로 소설 전체의 배경처럼 흐르는 탓에 얄팍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필리아 2024-11-14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주행하는 소설에 대한 이런 소박한 분석도 있네요.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도 역주행한 소설인데요, 두 작품 모두 소위 ˝피폐한 사랑 이야기가 인기가 있다?˝는 공식에 들어간다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지 리딩(술술 읽힌다)이라는 거구요, 특히 10~20대가 선호하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네요. 뭐 다 거기서 거긴인 얘기 같네요.... , 결국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가, 어떤 평을 할 수 있는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페넬로페 2024-11-14 23:03   좋아요 1 | URL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었는데 감상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감이 안 와서요. 계속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