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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 - 기술공상가, 억만장자, 괴짜가 만들어낼 테크노퓨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우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에 대한 것이다.” - 본문 P 13中에서
위 문장에서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의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노이로제에 걸린 종(種)이에요. 필멸(必滅)성 때문에요. 늘 죽음이 따라다니니까요.” 인간은 각종 질병과 부상과 사망에 취약하고, 매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기억력에 한계가 있고, 충동조절 능력이 한심할 정도로 낮다. 이렇듯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은 출생하고 번식하며 그리고 죽는다. 지금까지 이 범주를 벗어난 인간 종은 없다. 과학기술은 이젠 이 한심한 순환을 멈추자고 한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육체의 능력을 증강, 개선 할 수 있으며, 기술과 정보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무엇, 즉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책은 바로 이러한 ‘호모사피엔스의 조건을 제거하여 궁극적으로 정신적, 물질적(육체적 성질) 능력을 무한히 증강 또는 대체시켜 영생하는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휴먼(Post human)이 되려는 욕망’들의 섬뜩한 현장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 욕망의 실현을 위한 기술지상주의 운동이 곧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원 제목은 이보다 더 선정적이다. ‘To be a machine', ‘기계가 되려는’이라는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탈신체화‘에 대한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시사한다. 실제로 가속화되고 있는 이 기술들은 ‘인간 생명의 형식’을 가공(可恐)할 정도의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이를테면 옥스퍼드 미래연구소의 안데르스란 인물은 ‘뇌 임플란트’기술을 뇌까린다. ‘전뇌(全腦)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을 통한 자아의 무한 반복적 복사로 영원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죽을 경우 그의 머리는 냉동 보존되어 다시 깨어날 초월의 갈망을 달성해 줄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이란 곳에 보관된다. 더 이상 산 자에 속하지 않는 유예된 불멸자들이 이곳에 117명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이 ‘희망찬 죽음학’은 극단적 실증주의의 소름끼치는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운다.
또한 카네기멜론대학 인지로봇공학 교수인 한스 모라벡은 무한한 가능성의 실재로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극한까지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 몸을 자신이 선택한 몸으로 교체키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중 플랫폼 몸, 즉 인체를 인간형 장치로 완전히 대체하고, 기질 독립적인 마음을 업로드 하겠다는 프리모 포스트휴먼 계획(Primo Posthuman)은 탈 신체화 전략의 끝을 보여준다.
책은 이 외에도 생명의 운영체제를 다시 쓰겠다고 약속하는 양자도약(quantum leaf)의 발견 추구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을 코드로 번역하고,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개발하며, 기술을 인간의 몸 안에서 원하는 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고, 데이터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자기수량화(Quantified Self Movement)에 이르는 기술들의 현장감 넘치는 기술(記述)들을 쏟아놓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은 고작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짙게 깔려있다. 따라서 더 효율적으로 강력하고 유용한 장치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라는, 지금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는 신생기술들은 인간을 이런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기술발전의 가속화에 따른 인간 생명의 형식에 대한 변화된 인식은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몸 없이 존재하는 것이나 제 3의 휴머노이드 하드웨어에 돌아가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구원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이야기 한다.’라는 표현을 “나노기술 단백질 컴퓨터를 이용하여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라고 번역하며, 자극과 반응의 단순화 된 도구주의적 모형으로 전락시킨다. 나의 직관은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육체와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내겐 혐오와 두려움, 불신과 곤혹감만이 맴돈다. 지금의 기술들 - 인공지능, 합성생물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전산신경학 등 - 은 한결같이 절대적 유물론을 신봉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두부(頭部)를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하고, 뇌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이식하면 그것이 동일한 자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물질이 분리될 수 있다는 모순된 확신을 보인다. 내 육신을 떠나 복사된 마음이 과연 ‘나’인가? 그렇게 불멸을 획득한 존재의 영원함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러한 진술들, 이러한 기술들이 마치 SF(Science Fiction)와 같은 먼 미래의 망상, 허구처럼 인식된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MIT 미디어랩, Google의 딥마인드, 미국방부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 DARPA, 3 Scan, 카본 카피스, 런던 퓨처리스, 휴머니티 플러스, 그라인드하우스 웨트웨어(GRINDHOUSE WETWARE), Google의 칼리코 등 세계 유수의 신생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과 정부기관은 물론 옥스퍼드, 하버드, 카네기멜론을 비롯한 최고의 대학 연구소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사태이다.
구글의 인공지능기술 개발 이사인 레이 커즈와일의 주장처럼 “기술은 복리이자와 같은 속도(law of accelerating returns)로 증가”한다. 기계의 지능이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고 생물학적 생명이 기술의 하위 범주가 되는 때를 일컫는 ‘기술적 특이점 (Technological Singularity)’의 도래에 대한 필연성을 부인할 답은 내게 없다.
그러나 “지금 불멸을, 구글이여 죽음을 해결해주소서! (Immortality Now!, Google, Please solve Death!)와 같은 인간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마치 기술적 문제로, 그래서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는 식의 사물적 인식에는 거부감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기계적 해결, 수학적 해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한 극단적 무관심과 무지, 인간가치에 대한 노골적인 도구화의 경향에 심취해 있는 것 같다. 과연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간의 육신에 깃든 생명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크 오코널’의 이 세심한 인간 업그레이드에 대한 르포는 불멸이라는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욕망을 향해 치닫는 기술들의 현재를 저널리스트다운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풀어 놓고 있지만, 그 내용은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실존적 가치에 대해 사유케 한다. 생명이란 진정 무엇인가? 이내 다가올 20년, 30년 후의 미래에 우리들의 자식들이 마주설 세계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아이를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는 아내와 그 위에서 자지러질 듯 웃으며 소리치는 아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경이로운 신체적 이해의 장면은 “나는 신체였다. 또한 나는 결코 몸이 아니라 의식이었다.”는 인식과 겹치면서 이 책을 인간 생명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