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그림자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1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온, 지나간 여정을 마음속에 고요하게 되풀이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책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에 대해서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키냐르는 원초적 분출,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순수한 목소리, “사랑, 번식, 정액, 모유, 파도의 광휘”를 잃어버리고 지시대상도 타자도 없는 불가능한 것들을 쫒아 헤매는 불행한 인간의 삶을 ‘옛날’이라는 최초의 왕국과의 연속성에 편입을 모색한다.

 

키냐르의 시간은 기성의 관념과 다른데, ‘최초의 왕국’은 시간성이 없는 빅뱅과 같은 원초(原初)이고, 이것, 어둠속에서 분출되어 빛을 느끼고 아직은 언어가 없는 유아의 시기가 ‘옛날’이며, 이후의 존재 즉, 삶의 시간을 ‘마지막 왕국’이라 하였다. 따라서 과거-현재-미래 라는 가공된 의식적 관념이 아니라 이행(移行)중인 지각적인 존재자로서의 삶을 그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삶은 옛날과 연속되는 것으로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옛날, 최초의 왕국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삶은 백일몽,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책은 바로 이 단절된 옛날이라는 잃어버린 세계로의 복귀를 향한, 그래서 삶의 충실성을 위한 사유의 여정이라 할 것이다.

 

옛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에 그들은 읽고, 듣고, 만지고, 말한다. 그들은 「나는 걸어가서, 구입하고, 박수치고, 발을 구른다.」 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밝혀주고 감동시킨다고 말했다.” 즉, 오늘은 인간 집단을 길들인 동전 부딪치는 쇳소리가 언어를 말하는 목소리를 능가하고, 이미지에 매혹되어 얼빠진 추종과 자기증식의 순환바퀴에 갇혀 자기 본질을 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말의 광휘가 사라진 삶 아닌 삶.

 

그래서 오늘의 인간들은“자신의 반영(反映)에만 쏠려있다. 시선은 반영을 찾는다. 반영은 화면을 찾는다. 화면은 시선을 찾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누구도 아닌 자의 반영위에 머물러있다.” 이 인간에 대한 정의처럼 자체유사(自體類似)를 쫒는, 모네타(Moneta)의 세계에 매몰된 터무니없는 삶의 음울(陰鬱)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다. 혼자인 사람은 불행하다! 라고. 그리곤 이미지와 유용성의 세계만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외치며, 정작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들에는 금지의 덧을 씌워 근원, 최초의 왕국에 대한 탐색을 따돌리며 대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가 틀렸다! 고,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혼자인 사람(생시랑)들이 있었고, 이미지 없이 꿈만으로도 육체에 결핍된 모든 것의 대체물을 공급받기에 충분했으며, 쓸모없는 나무의 무용함에서 진짜의 풍요와 유용성을 맛보게 된다. 고 키냐르는 썼다.

 

돈, 기업, 이윤, 풍요, 건강, 승리, 야구, 생산력, 성공...을 숭배신조로 하는 이 쾌활하고 한심한 덕목들의 본질, 이 무한경쟁의 순환하는 욕망, 기의 없는 기표들의 세계, 이미지라는 환상과 마비의 모욕에 붙들린 도취된 소비의 세계는 언어를, 타자를, 감동의 기억을 사라지게 한다. 이것들은 아름다움, 자유, 사상, 사랑에 빠진 연인의 정표, 고독, 문자언어를 기억에서 흐릿하게 하여 향수(鄕愁)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게 만든다. 마지막 왕국은 이렇게 황폐해졌다! 이제 키냐르는 옛날의 냄새, 은밀하게 스며드는 달빛, 정신을 다듬는 고독의 시간, 언어가 없던 최초의 어둠은 어디있는가고 묻는다.

 

이 물음의 답변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비단 바지춤에 한 손을 밀어 넣고 눈을 감아요.”, 그리곤 “옛날의 냄새를 맡아요. 이런 게 삶이라오.” 주변성을 은둔성으로 바꿔 주변성을 무효화시켜버린 키냐르의 세상을 벗어난 삶이 이런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 잡는 행위”라는 말처럼 옛날로 마지막왕국을 편입시키려는 행위와 독서는 닮아있다. 또한 반영이 비치지 않는, 꿈 없는 잠이 있는 그곳과도. “어둠이 그립다.”고 했던 다니자키의 한 문장이 얼마나 거대한 삶의 의미였던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내밀한 목소리로 목구멍을 가득채운 문장들의 책, 정신을 다듬는 위대한 조각이다. 스쳐가는 삶의 시간이 너무 짧아 번뇌가 이리 떠도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