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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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표제인‘비행운’은 국제공항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오십대 여성의 신산한 삶의 궤적을 좇는 「하루의 축」이라는 작품에 “안도의 긴 한 숨 자국”이라 표현되고 있다. 그저 가까스로 스스로를 달래는 곧 사라질 흔적이라고. 그것은 여유로워 보이기조차 하지만 떠오르기 위해 중력을 다한 것의 힘겨움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존재했었던가 할 만큼 이내 소멸해 버린다. 우리네 삶이란 것이 결국 이런 순간적인 자취일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존재했었던 사람들의 자국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삶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소설집의 맨 앞에 수록된「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같이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깨닫는 미영이란 인물의 자기모멸에 수치스러워하던 어느 날의 기억은 동시대인들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인 소설집 전체의 작품들을 아우르는 목소리로 여겨진다. “내가 살아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는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 자기 연민에 훌쩍이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오늘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그 몽매함을.

 

1.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란 정말 얇다

 

이 시선이 첫 번째 향한 곳은 주류와 상승의 경계에 선 아슬아슬한 사람들, 그리고 오래전 여기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미약한 구조(救助)의 중얼거림이다. 「벌레들」,「물 속 골리앗」이라는 두 작품이 그러한데, 전자는 재개발을 위해 쓰레기더미로 방치된 구역과 경계지대에 선 빌라가 호흡하는 빈곤의 냄새와 악취를 통해 바깥세상의 경계라는 것이 안쪽에 있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을 일깨운다. 경계너머에서 길게 줄 이은 벌레들의 행렬, 쓰레기 더미 위에서의 급작스런 산고로 ‘살려주세요!’ 라는 외침이 공허한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실체일 것이다. 경계 밖도 바로 나의 삶인 것을.

 

후자는 아예 경계에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표현대로 “오래전 수도에서 밀려난 이들의 둥지”인 외곽지역의 낡은 아파트가 배경이다. 아파트가 한창 신분 상승의 이미지를 지니던 시대, 너도 나도 그 안에 속하길 바라는 부추겨진 위선에 희생되어 사그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 전기도 수도도 끊긴 재개발의 폭력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자(母子), 크레인 위에서 임금지불을 요구하다 추락사한 아버지, 이들을 에워싼 거친 물살, 부서진 문짝에 몸을 싣고 생존을 향해 떠내려가는 소년, 그런 그가 의탁할 수 있는 것이 수면위에 비죽이 몸을 드러낸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은 실로 패러독스하다. “거대한 수중 무덤같은 세계”, 전국토가 공사 중인 세상을 향해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중얼거리는 소년의 말은 “누군가 올거야”라는 손길인 것은 아직은 희망을 걸 무엇인가가 이 사회에 있다는 기대일 것이다. 이제 그만, 상생을 말하는 권력이 진정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2. 나르시시즘, 그리고 물화(物化)

 

「큐티클」이란 소설은 “기분도 구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계속 구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하루를 좇는다. “안도 할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라는 자조의 말처럼 타인의 시선, 그리고 세뇌된 소비적 과시의 쾌락에 젖어든 사람들은 구매의 매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루카치’의 지적처럼 대상물을 물화하는 해석습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물질적 소비로 인한 관계의 영향력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손톱에 사로잡혀 네일아트 숍에 손을 맡긴 여자가 “배꼽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무시하고, 선망하는 것처럼, 일단 뭔가 알게 되자 그 앎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경쟁력이야”라고 온통 자기관리를 말하는 상품화된 시대의 초라함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가의 손톱 손질을 하고 찾아간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그녀의 손을 보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손에 신경 쓰고 있는 건 그 자신 뿐 인 것이다. 과시와 타인의 시선이란 것도 결국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상점 앞 스테인레스 기둥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라는 여자의 행위처럼 말이다. 여행용 캐리어의 요란한 바퀴소리, 변색되고 시든 부케를 안고, 하얀 원피스에 호객용 경품 클러치백을 멘 채 9센티미터 힐을 신고 언덕을 뒤뚱거리며 내려가는 지친 여자의 뒷모습이 바로 물화된 현대인, 우리들의 초상 아니겠는가?

 

3. 외로움과 소외,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들

 

한국사회 계층화의 고착은 가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 거대한 양극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고독하고 고립되어 가고 있으며, 갈피를 잡지 못해 서성인다. 스무 살이 되면 세상의 진입(進入)로에서 엄청난 장벽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 「서른」은 십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된 여자의 변화란 고작 여섯 번째 자취방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이 미래가 삭제된 말이 시린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한다.

 

여기에 더해 소설「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택시기사가 반복하는 중국어 회화문장인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은 반향을 기대치 않는 말 같아 코끝이 찡하고 울려댄다. 그리곤 작품의 말미에서“리 쩌리 위안마 (여기서 멉니까?)”는 고달픔과 절실함이 묻어나 그 방황의 안타까움에 한 동안 먹먹함의 여운으로 눈을 내리감게 된다.

 

물질의 과잉과 타인의 시선에 매몰된 우리들과 우리의 세계는 지나치게 분별하려 든다. 극한적인 경쟁, 그 대열에서 낙오된 이들은 경계 바깥으로 밀려나 이내 시선에서 지워지고 외면되어 버린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 고립과 소외를 자처한다. 다시금 분열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도 없는 구원의 목소리로 불안해하고 방황한다. 추석 전야에 구멍 난 인력을 대신하여 공항 청소를 자처하는 중년 여성 기옥의 긴 한숨을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십년이 지나도 겨우 내가 된다는 좌절한 세대를 만들어내는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읽기를 마치면서 어느덧 나는 경계가 지워지고 허물어진 사회, 배제된 이 없는 모두 함께하는 세상을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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