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침 一針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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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세상이 온통 소란스럽다. 여기저기 말, 말, 말. 침묵의 미덕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머금는 것 없이 토해내기 바쁘다. 쉴 새 없이 떠든다. 무책임한 언어가 난무한다.”온축(蘊蓄)의 시간 없이 알지도 못하면서 죄다 떠들기에 바쁘다. 그 말들이 시끄럽고 입에서 구린내가 난다. 제 허물, 제 부족을 감추자니 시끄럽기만 하다. 민간인 불법 사찰문제로 정국이 요동을 친다. 이를 가리려니 궁색함과 파렴치가 말이 되어 더욱 분노와 갈등을 키운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정신이란 것, 진정함이란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듯 하기만 하다. 이런 우리들, 이 사회에, 정신이 번뜩 돌아 올 만큼의 진짜배기 말, 새길수록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진실과 진리를 확인토록 해주는 예리한 일침은 시의적절하다.

 

더구나 혐오와 구차스럽기만 한 현 정치의 쇄신을 내걸고 치러지는 선거가 목전에 다가서면서 말의 속내를 알아채는 변별력과 세상사의 부당위(不當爲)에 대한 비판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어 지금에 대해 말”한다. 건강한 사회의 복원을 위한 더할 나위없는 세상의 이치들, 교훈들로 우리의 인식력을 더욱 밝게 뜨게 도와주는 말들이다. 그래서 정작 지녀야 할 우리들의 마음에 침잠해있던 진실의 외침을 생각게 하고, 이 마음을 어떻게 일궈내야 하는지를 공부하며, 그를 통해 사회와 세상의 당위를 비로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지 곰곰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생각이라고 다 같은 생각이 아니다. 사상염려(思想念慮), 사유(惟)와 사색(索)의 생각, 이미지로 떠오른 상상(像)과 연상(聯)의 생각, 그리고 잡념(雜)과 염원(願)의 생각, 무엇인가에 짓눌리는 우려(憂), 염려(念)의 생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적막 속에 침잠해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 본적이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사실 뜬생각만이 난무했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해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다. 간위적막(艱危寂寞), 적막해야 마음의 근원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비로소 진짜의 말, 내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은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맑게 헹궈 내어 고요 속에 침잠해야 드러내는 것, 담박영정(淡泊寧靜)의 시간이 필요하다. 공허한 소리를 쉴 새 없이 떠드는 대신 침묵이 필요한 이유는 그래서이다.

 

이러하지 못하고 공허하고 가벼운 소리들로 제각기 자신의 목소리만 높인다. TV속 정책토론을 보아도, 하물며 연예인들의 허접한 잡담조차에서도 남의 얘기는 듣지 않는다. 음사(淫辭), 피사(詖辭), 둔사(遁辭), 사사(邪辭)만 난무한다. 방탕하고, 치우치고, 회피하며, 사특한 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하니 서로 믿지 못한다. 사회는 신뢰가 실종되고 저마다 이명비한(耳鳴鼻鼾)한다. “이명은 저는 듣고 남은 못 듣는다. 코 골기는 남은 듣지만 저는 못 듣는다. 분명히 있는데 한 쪽은 모른다.”는 얘기다. 즉, 남 잘한 것은 못보고 제 잘못은 질끈 눈감는 오늘의 우리들을 빗대는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다”고 썼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사상적 빈곤은 바로 이 듣지 않고, 온축되지 못한 얄팍한 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이익선생의 성호학파의 토론 방식을 들려주는데, 이택법(麗澤法)이다. 두 개의 연못이 맞닿아 서로 물을 대며 보완하듯이 토론이란 서로 듣고 다른 것에 귀를 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하지 못해서 우리사회에 표출되는 모습들은 실로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오직 자신의 지위와 부, 명예만을 얻으면 된다는 경쟁 일변의 이기심만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이러한 비뚤어진 부모의 가치관을 통해 타자는 적대자이고 타자의 언어에는 무관심할 것을 주입한다. 이렇게 자신만의 언어에 갇힌 아이들은 학교에서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동료를 짓밟는 것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학교폭력의 급증, 교사 권위의 한없는 추락, 눈에 뵈는 게 없는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한다. 모두 자기의 이익만을 쫓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자기 이익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니 인(仁)이고 의(義)를 찾는 것은 무능하고 한물간 사람의 얘기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없으니 어떤 일이고 자기의 이익에 반하면 아무도 승복하지 않는다. 시장만능, 물질지상의 소비주의를 강력하게 조장하는 자본가들, 재벌들, 권력자들은 이렇게 개인들을 파편화시켜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헛소리와 환영에 취하여 일생을 끌려 다닌다. 자신의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교자이의(敎子以義)가 정말 아쉬운 현실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의 정치사회의 현실로 돌리면 그 아둔하고 탐욕스럽기만 한 기득 세력의 아집이 드러난다. 교주고슬(膠柱鼓瑟), 거문고의 줄이 잘 맞았을 때 기러기발을 아예 아교로 붙여놓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 보겠다는 심산을 일컫는 말이다. 한 번 맞았으니 그대로 쓰자는 것이다. 온도도 바뀌고 습도도 바뀌며 환경은 무수히 변화하여 더 이상 줄이 맞지 않는데도 변화할 수 가 없다. 보수기득권자들의 짓거리가 이러하다. 그러니 사회는 난맥상을 보이고 이 어긋난 줄로 소음만 무성해진다. 이건 초짜들의 짓이다.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매야 한다. 해현갱장(解弦更張)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면 지킬수록 헤매게 되고 마침내 영 딴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으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독단은 기필코 참혹의 결말을 초래한다.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도덕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지금의 권력은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선생(北郭先生), 못된 짓을 하면서 그럴 법한 언사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위선적 지식인을 말하는 발총유자(發塚儒者), 바로 그것이라 할 것이다. 이번에 드러난 민간인에 대한 불법 사찰은 권력의 도덕적 타락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이 줄자 서서히 바위가 수면 위로 드러나듯이(水落石出), 이들이 저지른 흑막이 걷혀 추악한 진상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 정권이 하였다며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항변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를 하고서는 다른 이도 했으니 나는 괜찮다? 국민이 괜찮지 않다! 이 무례함. 국민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단순히 정당간의 시시비비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국민은 무엇인가? 국민은 전 정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같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인권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의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역겹고 분노가 이는 것이다.

 

이 처럼 이 책은 혹독한 자기반성과 비판의 인식들로 가득 차 있다. 말년의 J.J.루소가 그의 저서『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사람들은“남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할 뿐 자기의 내면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비로소 고독, 즉 고요의 세계에서 이성과 양심의 승인을 얻은 마음의 목소리를 찾았듯이, 생각하는 법,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법을 환기시켜주는가 하면, 이로부터 발의된 진짜의 말을 배우는 법과 진창에 빠진 세상의 무지와 불의를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깨우치게 한다. 백 여 개의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관련 시구와 경전, 그 밖의 문헌들을 통해 잃어버린 나, 그리고 우리의 정신을 화들짝 깨어낸다. 이것이야말로 생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위의 사회와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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