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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다다미방이 오밀조밀 기능으로 분리된 소박한 일본의 전형적 가옥과 그 안에는 세상과는 얼마만큼 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부부가 보인다. 도쿄 외곽의 한적한 셋집, 번화한 시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적막함마저 감도는 그런 외진 공간. 대화는 없지만 아내는 뜨개질을 하고 남편은 길게 누워있는 어느 일요일의 장면은 밋밋하고 무료함 그 자체임에도 그 어떤 강렬한 모습보다도 마음 깊숙한 무엇을 자극한다. 소설은 이러한 일상적 흐름을 통해 삶의 원형들, 존재의 의미들, 생의 가치를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산사(山寺)길을 걷는 나그네의 모습처럼 그렇게 낮게 타박타박 그리고 있다.
교토(京都)의 대학생,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던 청년, 절친한 친구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이 윤리적 불륜은 세상의 질시를 받으며 인생을 시작하게 한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무의식에 뿌리내린 죄의식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잊힐 것이라 여겨지지만 단지 잠복하고 있을 뿐, 남자의 삶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한 걸음 물러난 초연(超然)함으로 가려진 채 마치 체념처럼 일상이 흐른다.
그리고 유산과 사산으로 연이은 불운은 남자의 아내조차 세상과 단절된 듯한 변두리의 작은 그들의 둥지가 지닌 의미를 강화한다.
남편의 일과 행동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 아내, 아내의 그러함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남편, 그래서 이들 부부가“서로 부둥켜안고 둥근 원을 그리고”,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지만 그것은“쓸쓸한 안정”이란 표현에 가 닿는다. 아내의 병약함, 그런 아내가 작은 셋집에서 시동생까지 뒷바라지 해야하는 상황에 애처로워 하는 남편, 남편의 우유부단과 자기 격리조차에도 배려와 격려를 하는 아내,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심연에 원죄의 의식처럼 침잠해 있는 무엇이 강한 유대와 고립, 불안의 배경처럼 그들의 삶을 쥐어틀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급관리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온통 자기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남자, ‘소스케’는 그러나 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생의 길, 자기 존재성에 대한 가능성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어서, 대인관계가 거의 없는 그가 생활의 여유와 다양한 인간관계, 삶에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주인집 남자‘사카이’에게 호의와 동경을 보인다. 자신의 인생행로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사카이와 같은 삶의 행복을 가지지 않았을까하는 동일시의 기대에서 그것은 더욱 명료해진다.
급기야 주인집 남자로부터 우연히 튀어나온 자신과 아내가 배신한‘야스이’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삶에서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불안의 존재를 각성하게 한다. 상처 받을지도 모를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남자는 막다른 길, 삶의 장벽에 막혀버린 듯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종교, 불교의 참선의 장, 자기 존재, 삶의 행로에 대한 문(門)의 물음으로 달려가기에 이른다. “마음을 다스려 집중하면 일체의 감각과 지각이 끊어지고, 육신이 철봉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만큼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선불교의 좌선의 행위처럼 “혼자의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존재에 대한 힘겨운 물음에 인내하지 못한다. 결국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남자가 하는 행동은 집에 돌아와 혹 아내가 야스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불안만을 확인한다.
세상의 시선과 닿지 않은 도시 속 시골과 같은 공간, 그리고 극히 자기표현이 억제된 부부의 소박한 평온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 잠재하고 있는 쓸쓸함의 본질을 탐색하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쫓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에 뭉쳐졌던 무엇이 떠올라 하~아~하는 탄식이 뱉어진다. 닫혀져 있는 문 앞에서 나 역시 항상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왔던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어쩌면 끝내 소스케처럼, 또는 오요네처럼 인생의 문, 내 존재의 문을 열고 저 쪽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을 포기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본래 열지 말아야 하는 것일지도, 인생이란 그 모름의 불안과 고적함, 무력할 수밖에 없는 무엇일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인적 끊긴 산사의 눈길을 마냥 걷고 싶도록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