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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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가 빚어낸 불세출의 인물, ‘필립 말로우’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품격을 이미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언어나 행동에는 세상의 무수한 사실 그대로가 장식이나 위선 없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 중에“한계를 넘어서면 어떤 위험도 다를 바 없다.”라는 문장은 세상을 대하는 신념을 엿보게 한다. 선악과 같은 이분법적 잣대로 획일화하여 구별하거나, 신분, 재산, 지위, 과거의 내력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며,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로서에 대한 연민으로 인간을 대하는 말로우의 철학적 개성은 요즘 세상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사교성과는 조금 먼, 강한 신념이 오만으로 인식되어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감, 의리를 간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술집 주차장에 만취하여 버려진 남자조차 외면하지 못하는 탐정이다.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된 남자에 대한 호감은 두 사람을 일종의 우정, 인간적 신뢰로 연결한다. 남자가 대재벌의 방탕한 둘째 딸의 남편임을 알게 되지만 그늘진 모습에서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과 불안을 인지한다. 어느 날, 권총을 든 채 새벽녘에 찾아 온 남자로부터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고백을 듣고 그의 도피를 돕게 된다. 물론 그 남자가 그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에서이다. 이것이 소설의 발단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재벌가의 딸이 피살되고, 그녀의 남편이 도주한 사건. 치정(癡情) 사건의 전형적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심층에 접근 할수록 그리 너주레하다거나 천박하지 아닌 것이 된다.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다짜고짜로 얻어맞고, 경찰에 연행되어 다시금 폭력을 당하지만 말로우란 인물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살인 종범이라는 억지 이유로 유치장에 구금되지만, 도피를 도왔던 남자가 자살하였기에 사건이 종료되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석방된다. 즉, 아내를 죽이고 도망친 남편, 즉 살인자인 용의자가 죽었으니 수사가 더 이상 진행될 이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소설의 외연은 확장되기 시작한다. 치정으로 인한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조속하게 덮어버리려는 힘, 그리고 그러한 힘에 기꺼이 공조하는 비루한 공권력처럼 혐오스런 인간의 오염된 사회질서, 법과 제도 등 문명이라는 그럴듯한 어휘에 은폐된 인간들의 위선적 심리에 메스를 갖다 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법률은 정의가 아닐세, 대단히 불완전한 기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단추를 잘 누르고 거기에 운까지 따른다면 정의가 튀어나올 때도 있겠지. 법률이란 그런 거야.”이 말에는 사회질서에 대한 강한 불신도 있지만 그보다는 삶의 초탈, 보다 높은 삶의 지혜와 진실의 통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이러한 형태의 일견 냉소적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름 심화된 사회학적 비판의식을 끼워 넣고 있는데, 이러한 덤 같은 문장들이 사건의 진실로 접근하는 통로이자 중대한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는 발견에 이르면 ‘챈들러’의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재벌이 자신의 치부를 조속히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주사한 것인가? 다시 말해 금권이 공권에 외압을 가한 것일까? 아니면 재화에 대한 탐욕에 눈 먼 경찰, 검찰 등이 스스로 시녀가 되어 재벌의 무릎에 앉아 아양을 떨어댈 요량으로 알아서 기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서 법의 정의로운 집행이란 정말 공허하고 무력한 얘기가 되고 만다. 단지 돈이냐, 권력이냐만 문제가 되는 세상에서 일반 시민의 법률적 정의에 대한 기대는 정말 가소로운 것이 되고 만다. 어쩌면 이 소설의 재미를 이끌고 있는 스토리는 이렇게 몇 글자 안 되는 소비물질주의, 기회주의적 관료주의, 정경유착이나 금권정치, 쾌락과 이기주의에 몰입하는 상류계층의 타락한 정신 등 비판을 위한 수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로 진지하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화를 방해하려는 듯 불쑥 정신적 고통으로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인 미모의 여성이 등장하고, 마침내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탐정의뢰를 받기까지 한다. 엄청난 광휘와 지성을 발산하는 미모의 여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감도 한몫해서 실종된 작가를 찾아내지만 이 과정에서 피살된 재벌의 딸과 작가의 관계, 작가의 아내와 자살한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곤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말로우의 인간적 갈등, 그 속에서 꿈틀대는 숨겨진 비밀들, 도피를 도왔음에도 자살한 남자의 사건이 무관해 보였던 이들 부부의 은폐된 사실에 접근 할수록 주변의 위협이 더해지면서 작품의 몰입을 견인하기도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러한 이야기의 개입이 복선이나 반전을 위한 내용의 구조적 필연이자, 이야기에 감각적 재미를 덧대기 위한 절대적 요소라고 이해하게 되지만 요즘의 미스터리 작품들이 갖춘 속도감이나 구조적 긴밀성과 같은 정교함에 비추어 그 유기적 연결이 느슨하거나 괴리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창한 비판적 시선의 개입과 마침내 드러난 사건의 원인이 결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사회와 제도와 같은 문명의 자기 비판적 성찰을 도입하여 자칫 경박하고 미천할 수 있는 장르문학의 내용적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인의 심리적 해부나 인간성 회복과 같은, 게다가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물질의 풍요 등 현대의 욕망이 수반하는 더러운 댓가로 해석하는 것 등은 필립 말로우라는‘고독한 초인’으로서의 매력에 더해져 작품의 격을 올려놓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발전사에 리얼리즘의 이정표를 제시한 귀중한 문학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인 『깊은 잠(The Big Sleep)』과 함께 읽어 볼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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