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소멸, 늙음과 젊음, 그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 

   - 『잠자는 미녀』 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대해서

언젠가는 임박한 죽음을 느끼게 되는, 설혹 여기까지는 아닐지언정 신체의 노쇠함, 노년에 접어들었음을 자각하는 나이가 될 것이다. 최근의 경험보다는 어렸던 시절, 먼 시절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살아온 날들 속에서 꿈틀대던 욕망이 깃든 추억들을 반추하며 그 어떤 표정들을 지을 것이다. 그 표정들을 만들어내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안타까움, 아쉬움, 그리움처럼 나이 들어 할 수 없게 되는 많은 것들로 인한 비참함, 수치심, 자괴감 같은 것들일까? 아니면 삶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나아가서 거부를 통한 도전일까? 그때 나에게는 정말 어떠한 것들이 절실하게 되는 것일까? 과연 늙음은 죽음에 대한 수동적 겸허만을 미덕으로 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스쳐지나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 두 문호가 각기 쓴 『잠자는 미녀』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란 작품은 이러한 의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진솔하고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야스나리의 오마주에 가깝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시작페이지에는 『잠자는 미녀』의 한 문장이 실려 있다. 또한 ‘잠자고 있는 젊은 아가씨’라는 소재 역시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주인공인 노인이 잠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젊음과 여성에 대한 감각적 느낌을 구술하는 것 역시 다름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하다. 더구나 이 대가들의 말년인 노년기에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은 더욱 진실성을 띤다.
  
야스나리가 만들어 낸 67세의 노인‘에구치’, 마르케스가 숨을 불어넣은 ‘서글픈 언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90세의 노인. 본인들의 의지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남성성을 상실해가는 성(性)의 구분이 그야말로 의미를 잃어버리는 단지‘노인’이라는 외부적 시선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누군가가 사람의 나이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익명의 예언자’라고 말했듯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라는 한 꾸러미에 담기게 된다는 것은 쇠퇴를 포괄하는 어떤 범주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야스나리의 에구치는 성적 능력을 잃지 않은 늙은 남자의 욕망으로부터 살아있음에 대한 확인에 그치지만 마르케스의 노인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으로까지 나아간다. 문화적 배경은 제법 끈질기게 인간 본능의 표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러나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욕정이라는 이 불가해한 본성이 늙음에 대한 사회적 시선, 즉 통념적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 고뇌이자 난문제이다.

에구치는 동료의 소개로‘잠자는 미녀의 집’이라는 진기한 여관을 소개받는다. ‘안심 할 수 있는 손님’, 즉 남자가 아닌 노쇠한 노인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나신(裸身)의 젊은 아가씨와 동침할 수 있는 장소이다. 잠들어 있는 미모의 젊은 아가씨를 시각, 촉각, 후각을 동원해 탐하는 에구치의 노인성은 과거의 기억들로 연결된다. 그 기억들은 여인들과의 추억이며, 혼전에 처녀성을 상실한 둘째 딸아이로, 그리곤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생래적 귀환으로 맺어진다.

싱싱한 젊음의 육체, 어린 여체가 발산하는 내음, 입술, 벌어진 입 속에 드러나 이와 혀, 머릿결, 탄력적 피부가 전해주는 촉감..., 노추(老醜)와 배덕(背德), 마성(魔性)이 휘몰아치고, 억제된 관능이 환상적 희열을 고조시킨다. 남자를 잃은 노인들의 애처로움과 달리 여전히 남성을 지닌 에구치 노인의 감성은 붉은 비로드 커튼이 쳐진 은밀한 밀실이란 공간 안에서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소멸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래서 에구치란 인간의 보편적 욕정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난해해진다.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들고 싶다는 에구치의 소원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보게 된다. 노년의 에로티시즘, 즉 죽음과 성,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는 이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는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유지대인 그 회색지대를 이해하게 해주고 고뇌를 쓰다듬어 준다.

반면 마르케스의 노인은 보다 적극적인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성적 희열, 일락(逸樂)을 선물한다. 매음굴에 처녀를 주문하는 노인의 욕망은 에구치의 출발과 다르다. 또한 다섯 차례에 걸쳐 매번 다른 아가씨와 동침하는 에구치와는 달리 그는 단지 열네 살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치닫는다. 환희와 열정, 희열이 뒤엉킨 새로운 사랑, 삶의 역설적 복귀이다.
잠자는 여인들은 그녀들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노인들의 수치심과 교묘하게 교차한다. 또한‘죽은 듯이 자’는 여체는 살아있는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식이야말로 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더할 수 없는 장치일 것이다.

대문호인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것이 내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고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매혹되었듯이, 그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또한 노년의 고독과 에로스와 죽음의 관계성을 이해시켜준 걸작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수년전에 읽었던 것이지만 그의 작품의 기원이 된 야스나리의 작품을 당시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몇 년 후에야 『잠자는 미녀』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는데, 그나마 조기 품절되고, 다시금 초판 2쇄가 얼마 전 출간되었음에도 이 역시 일시에 품절되어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손에 넣고 나니 그 독서 맛이 여느 작품보다 더욱 깊다. 이 여운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탓에 작품의 본격적인 감상을 미루고 있다. 이 두 거장의 작품은 오랜 감동과 이해를 내게 보존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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