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964년 도쿄올림픽 준비 등 일본의 전후(戰後) 고도성장기인 1963년 9월을 시간적 배경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경제발전 중심의 급속한 변화의 추진은 사회 저변에 대한 균형적 관심을 쏟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기본적 시민권리가 희생되고, 인간의 소외로 인한 사회적 병리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1988년을 전후(前後)한 격동의 시기쯤으로 이해하면 얼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기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표현되는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사회적 분노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에게 향하는 것인데, 아마 사회적 불균형을 의미하는 하나의 표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에 일본을 발칵 뒤집은 동일인 소행으로 추정되는 연쇄적인 다중 사상(死傷)사건인‘소카 지로’사건은 이러한 시대상을 상징하고, 더구나 미해결 사건이어서 사회학적으로도 중요한 이슈였던 모양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공공장소나 공공시설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손상을 가하는 악질적 범죄이다. 주간지의 특약기자인‘무라노 젠조’는 소속사인 <주간담론>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폭발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낯익은 이름‘무라노’는 여탐정‘무라노 미로’시리즈에 아버지로 등장했던 그 인물이다. 바로 미로의 아버지, 야쿠자의 조사역으로 탐정 일을 했던 사람이다. 당연히 반가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기막히게 정교한 플롯이나 탄탄한 구성이 압도적으로 탁월한 것은 물론이지만,  미로의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의 배경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무라노 미로’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미로의 출생에 관한 비밀(秘密)이라 할 내용이 담겨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로운 소설 외적 정보만으로‘무라노 미로’시리즈의‘걸작’외전(外傳)이라는 격찬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소재의 독보적인 선택은 차치하고라도 본전(本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진감, 그리고 짙은 인간애와 끈끈한 남자들의 우정까지 가세하여 작가의 여느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깊은 감동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무라노 젠조, 일명 ‘무라젠’은 스물여덟의 잘나가는 특종꾼이다. 중앙언론사가 아니어서 경시청은 물론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지만 그의 민완한 사건의 조사능력은 동종 업계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이다. 범인이 남긴‘소카 지로’라는 닉네임 탓에 사건명이 된 연쇄 사건은 해를 넘기며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을 괴롭히고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특종사건 기자인 무라젠은 사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몰입하고,  <주간담론>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인‘고토’와의 우정을 쌓아간다. 여기서 고토가 자신의 연인인‘사에이’를 무라젠에게 소개하게 되지만 곧 그녀가 고토의 여자임을 알게 된다. 이는 친구에 대한 무라젠의 유일한 질투가 된다.

한편 조카와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한 소녀에 대한 내키지 않는 도움의 인연은 그녀의 죽음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살인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된 무라젠은 스스로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여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살해된 소녀의 폭력적인 주정뱅이 아버지, 이상한 강박 증세를 보이는 그녀의 오빠, 조카를 찾으러 갔다가 목격하게 된 유명작가 저택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현장과 그곳의 사람들, 신설잡지사의 편집자로 가는 친구 고토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힘, 야쿠자 세력, 그리고 가정의 폭력으로 인해 집을 등지고 수면제와 각성제에 의존하는 아이들, 이들을 이용하는 어둠의 세력들, 게다가 해결하지 못한 소카지로 사건으로 독이 오른 무능한 형사와 경찰집단까지 무라젠은 이들과 탐색하고 맞서며 사건의 배후와 진실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그러나 사건의 조사를 위해 감행한 한 현장에서 형제 같은 친구 고토를 잃게 된다.  이처럼 사건을 객관적으로 좇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당사자로서 직접 개입되는 것은 감성의 출렁거림을 크게 느끼게 한다. 더구나 하나의 중심 사건에 지류의 사건들이 어느 순간 물밀듯이 몰려들어 거대한 실체를, 그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게 될 때, 그 카타르시스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것을 그 어느 작가보다 잘 이해하고 멋지게 만들어 낼 줄 아는 것 같다. 또한 그녀만이 쓸 수 있는 소재의 전형이 있다. 잠든 여자를 눈으로만 범하는 기이한 관찰자의 시선은 바로 이 작품의 그것이다. 그리고 그 소재로서의 잠의 어둠을 뚫고 타버린 재(災)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탄생은 외전으로서의 책임을 지닌 소설임을 확인시켜준다. 미로의 아빠, 무라젠의 저돌적이고 추진력 넘치는 남성적 매력이 더해져 시리즈의 본전과는 또 다른 감흥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