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난 이 아름다운 작품을 읽으면서 한 젊은 여성을 부정적으로 떠 올렸다. 영어학원 강사로 소위 성공이란 걸 하였다고 자부심 가득한 성공담까지 책으로 펴내면서‘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반추하는 인간은 실패자’라는 얘기를 그 말에 담긴 불행과 어리석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뱉어내는 무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무언가의 “답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의 불쌍함인데, 그럼으로써 비로소 삶이 지니는 귀중한 가치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이가게 된다는 진리를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기 삶에 대해 의문을 하는 것이 생을 얼마나 고귀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답게 하는지, 그리고 고요함과 평온함,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대자연의 숭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 너무나 안타깝지 않을까?

‘제르맹 샤즈’라는 마흔 다섯 살 남자는 그야말로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면 달려간다는 그 자체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무슨 생각이 필요하며,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차는 기름만 넣으면 움직인다. 인생을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어떠한 앎도, 질문도, 반추도 필요치 않다는, 단지 재화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꼭대기로 위만 바라보고 치달으면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쾌락을 획득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여자와 자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좁쌀만 한 지식으로 아는 채를 하며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 도움이 필요한 애들만 골라서 기막히게 모욕을 주는 이상한 이 땅의 교육 현장 같은 것,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과 주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는 것, 산다는 것과 삶을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제르맹이다. 아니 제르맹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일 것이다.

아비의 사랑도, 어미의 사랑이란 것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 상소리와 음란한 우스개로 술자리를 채우는 그런 사람, 하물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볼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를 주변의 친구들은 바보, 어머니는 골칫덩이라 부른다. 그런 그의 일상이란 가끔씩 있는 잡일로 버는 몇 푼의 돈으로 선술집을 오가고, 엄마 집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 카라반에서 살며, 그리고 공원에 앉아 비둘기를 무심하게 세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삶에는 어떤 불편도 없다. 그러나 그를 바보라 생각하는 인간들,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인간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잘났기에 인간을 구별 하는 것일까? 제르맹의 말은 두서도 없고 그래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아 선술집 동료들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 그렇다면 주변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은 과연 뜻있는 말들일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공원의 비둘기를 세다 우연히 마주한 여든여섯 살의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결코 이런 노인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제르맹이 아니지만, 할머니 마르게리트와 우연히 비둘기를 같이 세게 된다. 각자 어떻게 세어볼까요? 하는 마르게리트의 제안에“각자 머릿속으로 세어보죠”라는 제르맹을 과학적인 기지가 있다고 칭찬한다. 그 칭찬의 말은 순수한 격려와 진실한 마음의 표현 이상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것은 두 사람 우정의 시작이 된다. 한 사람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꺼내는 순간이 되는 것이며, 공원에서 만난 낯선 노인에게 저항 할 수 없는 호감과 그녀의 젠체하지 않는 지적 세계의 덫, 심상치 않은 인생의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상의 얘기 끝에 마르게리트는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줘도 될지 조심스럽게 제르맹에게 묻는다. 이를 시작으로 ‘카뮈’의 『페스트』,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쥘 쉬베르비엘’의 『난바다의 아이』가 공원의 벤치에 하얗게 샌 머리를 한 할머니와 거구의 장년남자가 나란히 앉아 읽는 장면은 지극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마음에 들어오고,  제르맹의 순박함과 무지에 대한 어떤 내색도 없이 순백색의 사랑, 앎에 대한 빛의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은 그 어떤 고결한 감동으로 스며든다. 급기야 제르맹은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마 그것은 엄청난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앎이 지니는 환희가 뒤섞인 그런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쥐들과 그 생생한 삶의 묘사들, 로맹가리가 말하는“삶은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보면서 인간 의식의 동질감과 사유와 삶의 무한한 영역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지식의 우물”같은 존재, 자신의 삶에 “근원과 샘물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깨우치게 하여준 사람, “삶에 대한 허기”를 비로소 알게 해준 사람에게도 불행은 피해가지 않는다. 노화에 따른 망막 퇴화증으로 더 이상 책을 읽어 줄 수 없다는 마르게리트을 위해 제르맹이 처음으로 용기라는 걸 내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읽기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데 이르면, 제르맹의 독백인 “책 읽기가 그리워지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내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오다니...”처럼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이 어떻게 주어야 하는 것인지, 독서와 앎이란 것은 또 어떻게 쌓아나가는 것인지, 그리고 안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사랑을 나누는 것,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갑자기 연약한 존재가”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과일 잼처럼 달콤한 감동이 되어 잔잔하게 밀려들어 옴을 느끼게 된다.

어눌한 말(語) 같지만 단어와 어휘에 대한 고지식하리만큼 꼼꼼한 정의를 다지는 주인공에게서 말이 지니는 그 진중한 선택의 중요성과 인간을 고립시키는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진짜 지식이란 무엇인지, 책 읽기의 즐거움과 그 세계에 대해서, 그래서 삶의 이해가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며, 생명과 지속성, 존중과 그 무한한 행복을 의미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의 고귀함까지 깨우치게 한다. 해학과 재치 넘치는 문장들, 어수룩한 가운데 톡톡 튀는 풍자와 총명함이 청결한 지식과 감동을 가지고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을 떠나지 않게 하는 기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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