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정치를 말하다 - 보수와 진보의 뿌리는 무엇인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손대오 옮김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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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정책을 가지고 여당과 야당의 인사가 방송에 마주 앉아 논쟁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곤 한다. 이들 토론 프로그램의 한결같은 마무리는 평행을 달리는 양극단의 의견을 뱉어낸 채 어떠한 합의나 결과의 도출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차후의 논의로 이월시키는 것이다. 결국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대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흘려버린 채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심사, 주장만을 강요하다 끝나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또한 대개는 두 분류로 나뉘어져 상대방의 몰지각, 비천함, 무지함, 천박함이라 비난한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동일한 사안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는 것일까? 더구나 서로 자신들이 더 도덕적이라고 까지 하면서 상대를 비도덕적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한다. 또한 보수 꼴통, 파시스트라고 보수주의자들을 전형화하거나 가난한 무지랭이, 빨갱이라라고 진보주의자들을 몰아 부치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일까? 자신의 믿음을 체계화하는 것, 즉 세계관의 차이, 자신의 정신 속에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고 상식적으로 일상의 수백 가지 일들을 판단케 하는 어떤‘개념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도덕체계, 도덕적 신념이란 것이 어떻게 창조되고 형성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질문의 실익은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두 부류의 헤게모니 향방과 직접적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고, 이로서 어느 한 쪽은 자신들의 신념과 배치되는 상황을 감수해야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정치적 믿음을 체계화하는 이 절대적인 도덕관을 장악하는 것, 즉 도덕적 패러다임을 자신들의 언어로 기울게 하는 것이 곧 정치의 미래를 주도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패러다임의 원천을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가정의 두 중심 모델로 비유하여 이를 정치, 국가체제로 연장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엄한 아버지 모델’과‘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이 그것이다. 엄한 아버지 모델의 특성은 “절제와 책임, 자립의 장려, 보상과 징벌, 외부의 악으로부터 보호,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힘과 권위, 자기이익, 질서의 중시”라는 것이며, 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의 경우에는 “감정이입과 공정성 장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을 돕고, 인생에서 충만함을 장려하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양육”을 행동의 주요 카테고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엄한아버지 모델이 보수주의로, 자애로운 아버지모델이 진보주의로 비유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사회현상들의 적용례에서 이들 세계관이 어떻게 범주화되어 해석되고 이해되는지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작은 정부, 국가의 불간섭을 주장하는 보수주의자가 사회복지프로그램의 예산투입과 조세부과에는 극렬한 반대를 하면서 교도소 예산과 국방비 예산의 증액에는 적극적인지를 엄한 아버지 모델을 통해 해석하는데, 자기이익을 중시하고 개인의 절제와 자립을 통해 성취한 부를 국가가 가져가는 것은 그들의 신념에는 부도덕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더구나 사회복지프로그램은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부도덕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부를 배분하는 것이기에 더욱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도소 예산이나 국방비 증액을 선호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과 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에 가치관에 부합하는 행위가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보수주의는 엄한아버지 모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으며, 실제 이들 가정에서 양육된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견지한다. 

한편 진보주의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고, 공동체의 건강한 육성을 위하여 사회복지프로그램은 필요한 투자가 되며, 조세부과는 공정성의 장려라는 측면에서 정당한 것이다. 교도소의 예산 증액보다는 계도와 사회적응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의 도입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 한다. 여기에는 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의 도덕적 우선권을 가진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감정이입’이 도덕적 판단에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케 된다.
결국 이 두 가지 상이한 가정 중심모델을 통해서 두 다른 세계는 자신들만의 도덕성을 정교하고 확고하게 견지한다. 이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다른 양육 모델이 다른 언어와 다른 개념을 고착화시키는 가정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실제의 세상에서도 우리들은 국가를 아버지로, 또는 가정에 비유하여 논의하는 것에 익숙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서로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하지만 결코 공통분모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사람들임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세계관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 쪽에서 주장하는 서로 다른 도덕성이 모두 옳다고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엄한 아버지 모델에 비유되는 보수주의의 행동 카테고리에서 발견되듯이 이들은 개념적 절대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만의 도덕적 경계를 짓고, 도덕적 힘과 권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에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인간의 번영과 접촉하지 않으며, 보편적 인간성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은‘우리와 그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할하고, 기계론적으로 인간을 징벌과 보상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지되지 못하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들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내몬다. 그럼에도 보수주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엄한 아버지 모델 프레임을 이식하는데 성공하여 왔음에 반해 진보주의는 이러한 노력에 눈을 뜨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관이 종용되는 우리네의 가정과 양육모델은 우리사회를 해석하는데 진정 결정적이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 한다. 왜 보수주의자들은 교육의 사립화를 억척스럽게 추진하려하는지, 여성권위의 신장과 남녀평등을 왜 질색하는지, 누진세를 반대하며, 사회적 권력이나 계급이라는 언어는 사용하려하지 않는지, 왜 모든 것을 개인의 이익실현에 두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정치는 도덕성이라는 세계관을 양육하는 자신들의 프레임을 장악하는 선전장이다. 누가 익히 통용되거나 문화적으로 존중받는 아이디어를 사용할 줄 아는가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핵심 가치에 대한 빛나는 도덕 정치학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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