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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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대 서사시. 넘실대는 욕망의 끊임없는 쟁투. 거짓된 이데올로기로 위장된 탐욕과 파괴가 사랑과 파탄이란 애증과 교묘하게 교차된 야만으로 퇴행하는 인류사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신화적 상상력과 현실이 교감하는 루시디만의 특유한 마법적 이야기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닐 정도이다.

‘카슈미르’,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가 어우러지고 전통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들의 평화가 깃든 낙원이었던 곳, 그러나 오늘날의 캬슈미르는 극단적인 종교 갈등과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부딪는 곳, 죽음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장소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은‘누가 이 아름다운 산야를 피로 물들이고, 경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는가? 그 의도와 목적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신화와 어우러진 전통 민속공연을 부족의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카슈미르의‘파치감’마을. 파치감의 족장‘압둘라 셰르 노만’은 “누가 힌두인이고 누가 무슬림이오?”할 정도의 공존과 개방을 신념으로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자 철학자이며 요리사인‘판디트 피아렐랄 카울’과 여성해방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설명하는 아내‘팜포시’는 바로 그 공존과 평화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이들의 자식인‘광대 샬리마르’와 ‘부니 카울’의 광풍같은 사랑의 열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법의 선(善)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신의 운명에”맞서야 한다는 속박 없는 미래와 자유의 비전을 지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도덕적 판단도 멈출 수 있는 여인인‘부니’와 사랑의 지고지순함과 성스러운 결합이라는 신념의‘샬리마르’의 결혼은 이미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여기에 인도주재 미국대사‘막스 오퓔스’의 등장은 젊은 무희 부니의 지독한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는 노골적인 실용주의, 아니 공리(功利)주의적 기회이자 수단이 된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막스라는 인물로 인해 극단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더욱 견고한 의미를 담은 의식을 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남편을 버린 부니와 쉰다섯 살에 종교적이고 시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지상 낙원을 얻은 막스의 불륜은 외교적 실패와 정치 생명의 단절이라는 운명을 가져오지만, “그의 운명이 정책이나 외교, 무기 판매와는 거의 무관하며, 훨씬 더 오래된 태곳적 욕망의 명령과 전적으로 연관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인식처럼 거대해 보이는 세계의 정치 질서라는 것의 이면에는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꿈틀대는 것 이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소설은 이들과 함께 일명‘인디아 오퓔스’, 또는 ‘라테타’, 아니‘카슈미라 카울’이 가세하여 이 비극적인 사랑과 증오의 승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디아’,‘부니 카울’,‘막스’,‘광대 샬리마르’, 4인을 축으로 하여 그네들의 삶을 투영하며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적 갈등의 본질을 탐색한다.
사실 작가는 종교나 정치적 이념의 갈등으로 포장된 이면의 진실을 이들 삶의 족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란 기껏 욕정과 흥정과 광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스의 칭송받는 2차 대전 레지스탕스로서의 경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기생존의 우연한 산물인지 하는 것이나 한낱 세밀화가의 열정을 타고난 위조 전문가의 재능이 무기거래상이자 억만장자로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그리고 테러리스트로, 미래를 거래하는 세계의 설계자로 둔갑하는 것의 실상을 술회하는 것, 그리고 무자히드(성스런 전사)가 되어 파키스탄에서 필리핀에서 미국에서 이슬람의 적대자들을 심판하는 전문 테러리스트인 광대 샬리마르의 신념이란 것이 결국 부정한 아내에 대한 살의와 그 복수라는 것처럼 욕망의 광기, 부지(不知)의 부도덕(不道德)이 곧 세계 권력과 테러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캬슈미르와 로스엔젤레스, 소설의 배경인 두 도시는 승리와 패배가 거듭되지만 반복되는 야만의 전쟁이 가져오는 것은 헛된 죽음뿐인 곳으로서 또한 꿈틀대는 현대의 음험한 욕망의 장소로서 복수의 천사, 죽음과 저주의 천사를 암시하는 공간일 따름이다. 그래서 광대 샬리마르가 미국의 이 도시에서 막스 오퓔스를 살해하는 것은 겉으로는 반테러리즘을 옹호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탈리브의 테러를 지원하는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세계의 권력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빼앗긴 남편의 명예의 손상, 수치에 대한 보복이자 사랑의 약속을 실현하는 행위일 뿐임을 더욱 명료하게 인식케 한다. 이는 달리말해 문명의 갈등, 종교의 갈등, 정치이념의 갈등이라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위선의 조롱이자 인간의 탐욕이라는 본질의 규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오는 증오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더구나 “옳고 그름이란 단어가 의미를 잃고 산산이 부서지는”정의의 회색지대에 우리를 풀어놓아, 시체와 피, 광기,..흑마술, 결코 끝나지 않는 어둠이 계속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욕망이라는 충동처럼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실체를 대면케 하고 있다. 인디아 오퓔스는 아버지 살해자인 샬리마르에 대한 증오를 연속시키는 세대이다. 그래서 욕망이 잉태한 자식, 인디아 오퓔스 이자 카슈미라 카울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벌이는 전쟁과 테러, 이데올로기와 종교 등 이 세계의 불가해한 현상을 연인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여정에 정말 멋지게 녹여내고 있다. 탐욕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권력, 평화의 진정한 적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적나라한 통찰과 규명을 가한 소설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자유가 곧 전쟁인 이 사악한 세기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선택을 놓고 벌이는 정의에 대한 최고의 문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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