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에로티즘 e시대의 절대사상 20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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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푸코, 보드리야르 등 현대사상을 대표하는 이들의 뿌리를 이야기하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조르주 바타이유’가 있다할 정도로 그의 전복적 사유,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 등 그의 사유는 “현대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性)과 성담론, 그리고 소비의 경제학에서 그를 배제하고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영향은 오늘에도 뿌리 깊다.

최근 발표된 노인의 소녀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한 국내의 소설작품은 거의 노골적으로 바타이유의‘에로티즘’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할 정도로 그의 성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성적 욕망에 대한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과시적 소비사회인 오늘에 있어 보드리야르, 부르디외로 이어지는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을 과잉 에너지의 비생산적소비로 파악한 일반경제학은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무한히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우리들이 접하는 많은 저작들에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바타이유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바타이유의 사상을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수월하게 해석하고 그의 본격적인 접근을 위한 친절한 길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처럼 사상적 근간이 된 계기, 그리고 문학작품을 포함한 저작의 세계를 통해 핵심 사상이자 저술인 『저주의 몫』과 『에로티즘』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시공을 초월한 고전”이라 칭송을 받는 이 두 저작의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위하여 사유의 원천이 되었던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바타이유 자신의 저술인『내적 체험』,『에로스의 눈물』등 관련 저술들의 설명까지 더해져 바타이유에 대한 완벽한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바타이유 사유의 출발점은‘에너지 과잉’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는 대가없이 무한히 주어진 태양열 때문에 늘 에너지의 과잉에 시달리고 있으며, 바로 이 에너지 과잉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폭발, 즉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즉 “가계경제에서는 에너지의 부족, 즉 빈곤이 발생할 수 있지만, 전체경제, 예컨대 세계경제에서는 언제나 에너지의 과잉 즉 잉여가 발생”해서, “적절히 이 잉여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전쟁”이라는 파괴적 행위가 발발한다는 관점이다.

이를 위해서 바타이유는‘비생산적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로서 고대사회의 증여교환 체계는 과잉에너지를 해소하는 더 할 수 없이 현명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북미 인디언의‘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비생산적소비의 예로서“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전쟁이란 비극적 해결책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생각한 것이 바로‘비생산적 소비(데팡스: depense)’”라는 것으로, 전체의 관점에서 항상 잉여의 문제로 야기되는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지혜로운 소비였다는 것이며, 인간사회의 경제적 관점은 자원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과잉에너지의 소비를 위한 문제였다는 통찰이다. 바로 증여교환이나 희생제의와 같이 인간은 과잉에너지를 가장 사치스럽게, 가장 집약적으로, 가장 과시적으로 소비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의 사회는 생산과 성장, 그리고 부의 축재(蓄財)에 매진하여 성장이 한계에 부딪치자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비생산적 소비라 할 수 있는 양차대전이란 비극적 파괴의 수단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이를 오늘의 사회에서 해석한다면 비등한 과잉의 에너지가 야기할 상상하기 싫은 공멸이 아니라 비생산적소비로서의 증여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사회복지의 강화, 다양한 기부 등이 이루어져야 함의 당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자연스럽게 비생산적소비의 원형으로서“자연의 기본적인 사치인‘먹기’,‘성(性)’,‘죽음’”이라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조건없는 소비로서 에너지를 열광적으로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성행위나, 빈자리를 만들어주는 죽음은 가장 탁월한 비생산적소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비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작 『저주의 몫』이 말하는 에너지 과잉의 소비론에서 『에로티즘』이라는 사회인류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에로티즘이 탄생한 최초의 조건을 밝히고 있는데, 2만 년 전의 동굴벽화인 라스코 동굴의 내장이 흘러내리며 죽어가는 황소와 발기한 성기를 한 인간의 죽음이 그려진‘우물’그림에서 성과 죽음과 종교의 일치를 읽어낸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이다.
공포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죽음의 관능을 인식한 최초의 인류는 섹스에 목적의식을 갖게되었고 그것은 바로 즉각적 쾌감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시발로 하여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에로티즘이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바타이유는 인간은 서로 교통하고 싶어 하나 본질적으로 두 개체는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불연속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연속적 존재들의 삶에 모종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기막힌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식의 시간으로서, 이로 인해 정자와 난자라는 두 개체가 하나로 결합하여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는 것으로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적 표현으로서 알몸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데“알몸은 존재의 불연속성, 즉 폐쇄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며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금기와 금기의 위반이라는 개념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인간사회가 설정한 금기의 대상은 폭력으로서 죽음과 성(性)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연관된다는 점이다. 즉“성의 외양은 그것이 아무리 황홀할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성을 띤다.”는 것이며, “성행위는 정상 상태의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던 폐쇄적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때 필연적으로 숨을 멎게 하는 파열이 발생하며, 뒤이어 존재의 와해 속에서 황홀한 연속성이 구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무서운 동시에 황홀한 것이며,
말을 바꾸면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임에도 오늘날의 에로티즘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된 것은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인 에로티즘이 노동이라는 생산과 성장, 축재라는 사회에서 제한되고 죄악시되는 왜곡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성(性)금기의 위반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전형적 예로서 결혼이나, 신성성을 가졌던 고대의 매춘에서 오늘의 매춘에 이르는 금기위반의 관념을 통한 성찰은 매혹적인 담론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이란 애초에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에 모순과 역설에 빠지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순과 역설을 인간은 삶의 본질로 여긴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아마 “모순과 역설은 에로티즘의 본성 앞에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연속성의 열락을 희망하고 때로는 불연속성의 고독을 희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롭게도 또는 음험하게도 모순되는 두 항의 양립을 모색”하는 발칙한 존재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금기를 완전히 와해시키지 않으면서 순간순간의 위반의 관능을 만끽”하고, “
죽지 않으면서 죽음 저편의 세계로 살짝 넘어갔다 오는 길, 그리하여 욕망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는 길”, 바로 에로티즘의 길을 숙명적으로 걷는 것일 것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이 해박한 입문서이자 탁월한 두 저작의 해설에서“욕망이란 결국 금기의 위반이 맺는 역설의 윤무(輪舞)이며,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된다.
“도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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