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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의 물신주의가 안고 있는, 그러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치부를 기막힌 입담으로 풀어 제친 걸작이다. 게다가 성적 방종 등 자유주의 쾌락으로 피폐해진 가족의 붕괴, 도덕적 가치의 상대주의화 까지 더해져 이성은 종적을 감추고 욕망만 부글부글 끓어대는 적나라한 세계가 펼쳐진다.
소설의 구조는 일가족 피살이란 참혹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살해된 사람들의 이웃과 옛 동료인 개별자들로부터 그네들의 삶의 일면, 즉 모자이크된 실체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자이크된 일화들을 짜깁기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여기에 또한 밑도 끝도 없는 남매의 대화가 개입하면서 외면하고픈 아동의 성적유린과 학대의 기억이 흐른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도덕적 비난의 잣대를 상대화시키고 대그룹의 최고직장을 꿰어 찬 명문사립대 출신의 남자, 오직 부(富)의 다과(多寡)가 결정짓는 계층의 상층부에 선 소위 내부(內部)자들만이 어울리는 상류가문의 여자, 바로 이들과 이들의 사회에 진입하려고 발버둥치는 욕망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빚어내는 추하고 졸렬한 이 세상이 바로 이 소설이자 사건의 무대이고 이유이며 그 자체가 된다.
이 작품은 분명 정교한 미스터리 소설이고, 치밀한 복선과 반전이 가져다주는 절묘한 흥분과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문학보다 강직한 의식이 있고 세상을 향한 명쾌한 외침이 있어 작품의 품격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피살된 가족의 가장인‘다코’와 아내인‘나쓰하라’의 동창생, 옛 연인, 회사동료 등 주변 인물들의 추억담과 기억에 깃든 이 두 사람의 인물 됨됨이에 대한 면모라 할 수 있다. 소위 성공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도 선이라고 주장하는 다코의 도덕관이나, 계층적 질서를 수성하기 위해서는 친구도 애인도 한낱 노리개에 불과하며, 자기존재의 부상을 위해 위선으로 무장된 나쓰하라의 드러나는 실체를 보며 살해의 당위성을 찾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결국 “어디서 어떤 원한을 샀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거예요.”라는 동창생의 증언처럼 작가는 이들의 비참한 죽음이 정말 당위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쓰하라의 게이오大 내부생으로서의 모습에서 상류계층의 구별짓기에 대한 일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점심식사를 위해 학교근처가 아닌 그네들만의 장소로 간다던가, 신분이 다른 학생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나 패션, 미용 등 미적 감각에서 조차 차별의 모습을 규정짓는 것과 같다. 즉 소비방식이나 미적성향을 통해 문화적 구별짓기가 만들어내는 지배계급의 폭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인데, 이렇듯 교묘하게 은폐되어 자신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실체를 그려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작중 인물중 신분상승을 위해 내부생인 남학생들로부터‘공중변소’라는 폄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과의 연결을 위해 나쓰하라를 추종하는‘나카야마’라는 여학생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계급적 불평등의 대표적 희생자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줄거리이자 일가족의 살해범을 찾아가는 플롯의 정치(精緻)함은 여느 미스터리 작품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기득계층의 탄탄한 욕망의 연결망이나, 계급적 위계질서의 고착화를 통한 불평등과 부조리의 당위화가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지, 그리고 이로부터의 고질적인 사회병리현상이 어떠한 지경에 있는지를 읽는 재미 또한 어지간한 사회비평의 관점을 능가한다.
아마 작품의 종반에 이르러 남매의 어린 시절 정신적 상흔을 들으며, 그다지 놀라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 사회가 잃어버린 도덕적 가치란 무엇인지, 아니 구체적으로 이 작품의 살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명작의 발견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