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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평점 :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오늘날 이탈리아반도 남단의 도시 크로톤과 피타고라스학파를 둘러싼 안팎에서 펼쳐지는 인간 욕망의 충돌들이 다양한 변주 속에 흐른다.
소설작품의 소재로서는 독특하다 할 수 있는‘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각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풀어보았던 것이어서 이러한 소재에 어떤 신비로움과 상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하고 내심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예견은 내 열악한 상상력의 탓이었음이 바로 탄로가 나버린다. 그간의 철학사에서 흘금 엿보았던 피타고라스에 얽힌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풍부하고 사실감 넘치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리스전역의 인재들이 몰려들고, 엘리트 귀족들의 필수 교육기관으로서 현자(賢者)인 피타고라스가 이끄는 폐쇄된 집단의 왠지 어둡고 투명치 않은 배경과 급하게 쫒기는 현자의 수제자, ‘디오도로스’의 다급한 행동이 이미 끔찍한 죽음을 암시한다. <다빈치 코드>의‘소니에르’가 죽음을 앞두고 다급하게 암호를 남기는 장면을 연상시키듯이...
석연찮은 시신으로 돌아온 형 디오도로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귀족의원직을 버리고 어려운 입시관문을 통과하여 현자의 학파로 진입하는‘아리스톤’의 형제애와 복수의 의지(意志), 여기에 사형‘히파소스’와의 의문의 죽음의 본질을 추적하는 과정은 명예와 부와 권력이라는 욕망과 관능적인 육체적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축으로 하여 흥미로움을 더한다.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보랏빛 아네모네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전경에서 알 수 없는 음모와 숨겨진 진실, 그리고 처연한 전설이 흐르리라는 걸 예상케 한다. 천년을 거슬러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라진 흙서판, 죽음을 감지한 형이 화급히 남긴 듯한 네 개의 직각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마름모꼴과 기호들, 결국 그 비밀인 “정수와 유한 소수, 또 순환하는 무한소수”이외의 “우주의 끝에 닿아 있는 수”, 또한 “아네모네 꽃 같은 수”이자, 이루어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다른 형상이리라.
그래서 이 신비의 수(이 수를 보면 아마 독자들은 활짝 미소 지을 것이다. 아~하~)에 대한 히파소스의 터득은 환희와 자긍심이라기보다는 권력과 불신, 그리고 죽음에 더 가깝다. 여기에 현자의 아내인 ‘테아노’의 디아도로스와의 떨림과 설렘조차 분간이 안 될 관능의 쾌락이나, ‘에우니케’와의 동성애에 탐닉하는 위선적인 피타고라스에서 ‘욕망을 기억하는 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보게 되고, 궁극에는 권력의 쾌락이 가져온 두려움에 가려진 지적탐닉이 오히려 “영혼을 타락시키는 칼로”작동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더해 지배 권력의 상징으로서 크로톤의 참주이자 귀족대표인‘킬론’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무지가 착취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깨달은 시민들”즉 시민 권력을 이용하여 대항권력으로 성장한 지식권력인 현자학파를 처단하는 권모술수는 또 하나의 작품 축으로 넌지시 오늘의 사회를 풍자하려는 의도로 작용하기도 하며, 또한 “신전과 관청, 학파건물이 화려해지고... 그러나 냄새나고 지저분한 저잣거리 뒷골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시민단체의 열성원이자 속물인‘니논’의 불만으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크로톤과 달리 시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는 현실의 푸념은 작금의 불평등한 부의 흐름을 꼬집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의 스승인‘페레키데스’가 운명하며“권력의 맛을 알면 누구든 시궁창같이 부패해. 학자라 해도....몸 파는 유녀와 다르지 않아...”라고 제자에게 남기는 유언 또한 어떠한 숭고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끝이 도달하는 그 추함과 불행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괴물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하는 문장과 결합하여 순간 이 혼돈의 체제를 진중하게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의문의 죽음을 파헤친다는 전통적인 추리의 패턴을 지니고 있지만, 통속적인 재미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처럼 나름 예리한 현실 비판적 의식까지 수용하였으며, 게다가 피타고라스의 정리, 무리수(無理數) 등 신선한 수학적 소재의 발굴, 그리고 에로틱한 로맨스까지 곁들여진 진정 탄탄하고 치밀한 플롯으로 안정감을 더한 우리의 장르문학에서 쉬이 발견할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다가오며,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아쉬움과 감동이 그리고 뿌듯한 기운까지 느끼게 된다.‘뉴웨이브문학상’심사위원단 만장일치라는 광고문구가 전혀 과장되지 않은 수작임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