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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음부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8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평점 :
19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정체성이란 한국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40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 자유나 남녀의 성적 평등이 월등하게 개선되었다고 하는 시각에 동의치 못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정치적 환경과는 달리 작금의 사회를 여성을 단순한 성적 노리개의 대상으로 양육하거나 인식하는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관점은 여성의 성적 욕망의 제약에 대한 해방에 맞추어져 있어, 오늘의 시선으로는 그닥 매력적인 작품이라 하기에는 시대성이란 괴리가 있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자크 라캉’에 경도된 사람들의 실험적 차용이 이루어진 작품의 대표적 예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으며, 그 형식적 구성과 내용의 전개에 대한 기술적 방법론을 엿볼 수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주인공인 30대의 여성‘아니타’의 꿈과 일기와 대화를 오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하는 주체(desiring subject)'로서 대상화하는 이 소설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욕망은 결여의 산물이듯이‘상실과 결핍의 무덤 위에서 욕망의 꿈이 피어난다.’는 식의 발상을 소설에 식재(植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문제와,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아니타’와 연인‘포지’의 논쟁들이 소재가 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남성적, 폭력적 문화, 욕망의 규제자로서의 제도, 정치 환경을 은유하는 라캉 이론의 반영으로서, 이처럼 라캉의 욕망이론이 소설의 정신적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거부(巨富)와 결혼하여 초야를 치룬 신부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되는데, 거칠게 성적으로 유린된 여성의 몸을 천천히 훑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전기가 흐르는 쇠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 저택의 단지에 갇혀, 남성욕구의 배출구로 사육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암 투병중인 주인공‘아니타’의 꿈 속 분신이다. 한편 미래사회의 섹스치료사로서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공창(公娼) 'W218'을 등장시켜, 여성은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섹스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는데, 이 역시 현실 속 주인공인 ‘아니타’의 무의식적 욕구의 한 표현으로 독자를 납득시킨다.
이 모두 남성 사회에 가두어진 성적 역할만으로 억압된 여성들을 상징하고 있는데, “결혼 초에 느꼈던 그런 쾌감이 지속되었더라도, 왜 내가 나중에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리면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까? 그 사람이 대가를 지불했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름다웠던 것이고....”와 같이, 이에 대한 아니타의 저항이란 것도 사실은 성을 단지 대가(代價)라는 교환적 가치에 머물게 하고 있어 여성의 성적해방이란 지위로의 도약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주체적 자유로서의 성적 욕구를 지향하지만 “내가 그 어누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오히려 불감증이란 열패감만을 노출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자극, 현실의“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면서 절망감을 느낀단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하면, 그리고 또 지금처럼 정신을 집중하면, ~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하면서 끝없는 자극을 추구한다.
이는 기계적 섹스치료 장치로 훈련된 W218이 찾는 이상적 남성에 대한 갈망과 겹치는데, 그 理想의 남자인 'LKJS'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그 사랑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남자에게 중상의 상해를 입힌다. 이러한 암시는 소설에서 시간을 달리하며 동일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거부인 무기상으로부터 탈출한 여배우인 여주인의, 탈출 동행자인 남자의 살해나, 현실의 연인 포지의 죽음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불신이며, 반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곤 나아가서 역설이게도 수동적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성(性)을 불치의 인간들을 치유하는 성(聖)스러움으로 재탄생시킨다. 불치병자들을 구원하는 천사의 음부로서 말이다. 결국 여성의 성적 해방이란 이처럼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위태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균형이란 마치 정치와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감성적인 인형이 되려는 여성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이 소설의 시대성에 격세지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참고】이 작품에는 현실의 주인공인 '아니타'의 꿈의 분신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여주인'이라는 이름없는 여배우가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미국 망명시절 접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헐리웃 여배우인 '헤디 라마(Hedy Lamarr)'를 모티브로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헤디 라마는 1930~1950년대 전 세계의 스크린을 데운 절세의 미모로 <Ecstasy> <Lady of the Tropics>등 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우리에게도 <Samson and Delilah(삼손과 데리라)>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