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더링
앤 엔라이트 지음, 민승남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흐름에서 시간은 멋대로 역전되고, 회상과 비유가 난삽하게 연결되며, 모든 것이 화자의 의식 내에서 사실로 변조되어 있어, 그 진실을 알아차리기가 수월치 않다. 아니, 진실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수없이 다양한 장치와 기법을 통해 숨겨놓은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려면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무리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두 번 아니 세 번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래서 작가가 전달하려 애쓴 그 무엇들을 남김없이 밝혀내고 싶어진다.

화자(話者)인 나,‘베로니카’자신의 기억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선을 위태롭게 거니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미분화된 자의식으로 더욱 긴장되게 한다. 바로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와해시켜 그녀의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야 하는 독자를 정말 수고스럽게 한다.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쥐어짜듯이 모아놓는 구성이기에 제목은 오히려 이 작품의 기법이기에 가깝다.

희미하고 비어있는 엄마,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엄마,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은 그 왕성한 번식활동, 그리곤 항상 신경증에 시달리고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지 못했던 엄마로 인식하는 베로니카에게서 우울한 증오를 목격하게 된다.

이 작품의 커다란 플롯은 베로니카보다 11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리엄’의 죽음에 따른 나와 가족의 삶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리엄의 장례일로부터 5개월에 걸친 가족의 삶에 대한 자의식의 잔인할 정도의 해체이다.

번식과 신경증의 엄마를 위해 할머니 에이다의 집에 옮겨진 세 아이, 리엄, 베로니카, 키티, 그리곤 할머니 에이다의 처녀시절인 1925년, 호텔에서 마주하는 너전트와 에이다의 존재치 말아야 했을 만남의 암시, 그리고 두 딸 레베카, 에밀리의 엄마인 나, 베로니카의 구조는 나를, 나의 삶을 성찰하기위한 근간이 된다.

자식의 출산이‘번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랑과 섹스의 개념적 분리와 그 의미를 극명하게 하기위한 수단이다. 또한, 할아버지 찰스와의 짧은 기억보다는‘에이다의 집’에 주인처럼 행세하던 너전트와 에이다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그 끈질긴 욕망에 대한 탐색을, 그리고 영원히 씻지 못할 너전트의 추악한 모습에서 세상의 악을 발견한다.

이 주요한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듯‘욕망과 증오(desire and hatred)’에 대한 탐색이다. 이는 부커상 수상 직후,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엔라이트’의 작품 의도이기도 하다. 작품의 종교적 색채는 구교(카톨릭)이지만, 베로니카의 작품 초반의 선언처럼 종교를 던져버리며, 아버지의 신앙태도와 베로니카의 식탁에서의 에피소드에서처럼 그 믿음에 회의의 눈초리를 보낸다. 또한 위선적인 성직자로서의 오빠 어니스트를 통해서도 종교의 허울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는 카톨릭이란 종교의 그늘아래서 반복되는 무능하고 파렴치한 자신들의 탐욕스런 행위와 교차되어 그들의 오래된 종교적 갈등(신교와 구교)에 대한 냉소적 회의와 어울려 묘한 정치적 여운을 던지기도 한다.

한편 베로니카의 섹스에 대한 의식은 혼선을 빚는다. 마이클과 섹스, 남편과의 섹스, 너전트와 에이다와의 섹스, 에이다와 찰스의 섹스, 아버지와 엄마의 섹스, 이들의 섹스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은 그냥 섹스에 불과한 것이다.”처럼 그저 욕망으로만 해석된다. 이러한 의식이 시종되지만, 작품의 종국에는 “다시 남편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省略”에서와 같이 “前略~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자기연민과 같은 위안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렇듯 절대적 이념을 거부하고, 어린시절 에이다의 집에서 벌어진 리엄의 성적학대에 대한 잔상을 시발로 한 자의식적 서술, 그리고 불쑥 “나는 독자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생략”는 식의 메타픽션식 의식흐름은‘진실을 찾으려 했던’독자들에게 다시금 책장을 거스르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의 뛰어난 소설이 될듯하다. 읽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는, 세월이 흘러도 풍화되지 않을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화려한 수사와 극명하고 다양한 주제를 모두 토해 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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