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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2월
평점 :
열일곱 장의 이미지, 그것을 몽타주적이라고 하든 그 어떤 정동(affect)적 반영이라 하든 그 이미지들을 통한 사유 전개작업으로써의 글쓰기가 이 책이다. 그 대상은 1940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 될 폴란드 유대인 게토 내 민중들의 모든 자료 - 편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쪽지들, 사진들, 일기들, 유언들, 오고간 행정문서들, 은밀히 건네던 자체 소식 문서들, 그 밖의 타자원고와 등사본, 인쇄본 등의 문서들 - 를 ‘오이네그 샤베스’라는 비밀 모임을 통해 수집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의 3만 5,269쪽 분량의 자료들을 모체로 한 상상과 반추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해석 에세이다. (린겔블룸은 1944년 가족과 함께 총살 처형되었다)
이 상상과 반추는 흩어지고 누락된 결핍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이해의 목소리이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집단적으로 체험되고 전승된 고통과 흔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터무니없는 지적(知的)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화적 경험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억의 매체로서 해독하기이다. 첫 장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절망 속에 쓰여진 글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읽을 때 그 글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비극적인 탄식의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이 첫 장의 일면 감성적 시작은 책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르며, 린겔블룸의 아카이브들과 그 아카이브들의 매립과 발굴에서 감지되는 고통과 정념의 몸짓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들이 머금은 가능한 의미들의 추적을 실행해나간다.
1943년 5월, 750명 남짓 남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봉기를 진압하는 SS(나치 친위대)장군 위르겐 슈트로프가 벌인 ‘최종 게토 청산 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폴란드 내 유대인은 절멸한다. 저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응과 내 감응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을 게다. 높이 3미터 둘레 13킬로미터에 달하던 게토 장벽의 잔해들을 모아 전쟁 후 다시 세워놓은 붉은 벽돌 장벽의 틈새에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탄식의 사물 혹은 결정화된 눈물”로 읽어내는 그러한 감응을 나는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파괴와 학살의 흔적으로부터 그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하 통로의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이미지 아래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얼굴을 벽에 대고 서 있게 하고서는 귀와 머리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인간 사냥, 유흥거리로 삼기위해 유대인을 죽이는 인간성 침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942년 7월 22일부터 9월 21일까지 나치는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이 두 달 동안 유대인 30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 역사의 눈으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적어도 문서들만큼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고통과 한탄의 기록들이 미래 세대에 전달될 수 있기를 거대한 욕망으로 생동하면서 죽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의 바람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절멸될 것임을 이미 잘고 있었던 듯하다. 게토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모든 음식의 수급은 차단되었으며, 극단적 굶주림과 반복되는 처형, 가축 열차에 실려 절멸 수용소로의 이송되어 사라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참혹함은 구태여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양철상자에 담아 세 차례에 걸쳐 노블립키 거리 38번지, 시비에토 에르스카 거리 31번지 건물 지하에 각기 매립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 난 후 1946년 4월 게토봉기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렇게 매립되었던 린겔블룸 아카이브를 발굴해야 한다고 라헬이라는 여성이 호소한다. 그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아카이브를 찾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며, 하찮은 종이쪽지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친 방해의 목소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그것을 찾는 일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기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종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히 흉물스럽다.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수색이 결정되었지만 이미 잔해가 말끔히 정리된 바르샤바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니, 그 엄청난 길이와 높이의 장벽,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항공 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굴을 시작하여 표면이 산화된 양철통이 발굴되기까지 4년 동안 물이 흘러들어가고 곰팡이가 서식하면서 습기와 팽창으로 상자에 눌러 붙고, 글자가 지워지고 부패되고 훼손된 문서들의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다. 린겔블룸이 주도하여 수집한 오이네그 샤베스 아카이브는 그렇게 윤리적,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물려준다.
사진 이미지 작업을 통해 사유이론을 전개하는 이 독특한 저자는 지워지고 뭉그러지고 종이끼리 들러붙어 흐려진 문서들과 사진으로부터 역사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애초에 흐릿했기 때문에 사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역사의 사물들과 사건은 존재하게 되고, 광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독성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재가 현실에 뒤섞여 역사는 그 흐릿함에서 건져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매립된 양철통을 발굴해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디-위베르만은 그 자료들이 두 번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한 번은 땅 속 지하의 물속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증언하는 눈물의 감동적 물속에서”라고.

책은 이렇게 발굴해내 복원한 문서들의 내용이 빼곡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긴박하고 다급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간절함들, 비통한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제 이름은 나흠 그지바치입니다.”,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동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그곳으로 이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그런가하면 매립의 마지막 순간에 상자에 밀어 넣었던 19살 소년의 개인적 유언 같은 글도 있다. “우리가 당대의 세계를 향해 외치고 울부짖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땅 속에 묻습니다. 나는 이 소중한 보물이 언젠가 발굴되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순간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이 어린 소년조차 자신들이 곧 절멸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쪽지와 문서들이 미래 세계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사로워 보이는 서신들에는 당시의 급박한 동료들을 향한 정보들도 있는데, 트레블링카 절명 수용소를 급하게 그린 지도가 그려진 우편엽서, 특수 트럭에서 자행된 가스학살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들도 있다. 헤움노 절명수용소에서 1942년 1월 탈출하여 4개월 후 체포되어 베우제츠(Bełzec)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슐라메크가 전한 정보기록이다.
그런데 더욱 아찔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명 “상상하기의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여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 되면 스스로 고의적 무지나 자발적 예속의 심리상태로 빠져드는 현상이다. 상상력이 현실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아니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현실의 가혹한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연한 목소리들, 경악스러운 사실들이 매장된 종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일상적 생존의 단순한 몸짓들, 비참 속의 고귀한 몸짓들, 비영웅적 몸짓들로 직조된 이들 자료를 그들로부터 물리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텍스트 속 문자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감상적이라고? 어찌 감상적이기만 하겠는가, 더는 합리적 이성이란 것으로 해독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면서 차가운 이성 어쩌구 하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고 문명적 퇴화의 비윤리 아닌가.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이 수집행위, “가능한 많이 수집하라, 분류 작업은 전쟁 후의 일이 될 것이니”라며 오이네그 샤베스의 동료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은 현재의 무력함을 미래의 힘으로, 나중에 쓰일 당신들의 역사로 바꾸기 위한, 생존의 불가능성을 잔존의 기회로 만들고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디디-위베르만의 진술처럼 “일관된 무언가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 흩어진 이미지들”로부터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 문명 퇴화적 표징이나 그들이 축조한 절멸용 기술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해석을 통해 흩어진 도덕 관점들을 다시 주워 모을 수 있으며, 1942년 독일군이 게토에서 촬영한 사전 위조되고 연출되어 왜곡되고 억압되어 전복된 이미지들이 같은 이미지 자료임에도 얼마나 은밀하게 다른 관점을 생성하게 하는지도 분별하게도 된다.
게토 내에는 유대인 자체 행정기구인 유덴라트라는 것이 있었으며, 유대인 동료를 감시 통제하는 유대인 경찰도 있었다. 유덴라트라는 특권 계층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하는 격식을 갖춘 단체 초상 사진과 유대인 경찰이 줄지어 세우거나 무리를 이루게 하여 조밀하게 모아 놓은 채로 찍은 일반 민중 사진의 뚜렷한 분할을 보는 것도 당시 게토 내 유대인들의 권력구조와 갈등을 상상케 한다. 어차피 1943년 8월 이후에는 모두 절멸할 동족임에도 구별짓고 위계를 부리는 인간들의 그 던적스러움은 역사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아니 유대인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아카이브에 담긴 그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기대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 얼굴들을 시간을 넘어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평범성에 깃든 숭고함과 극악스러움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늘 이런 외침은 반복되었고, 그 외침은 헛되이 울렸고, 훨씬 나중에야 메아리를 만들어냈다”고, 때문에 “글쓰기가 전달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통의 외침 앞에서 글쓰기에 내재된 본질적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만큼은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극악한 압제의 시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시간을 멈춘 채 묻혀 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일경에, 조선인 일제 주구(走狗)들에 쫓기면서 던져지듯 남긴 쪽지들, 색 바랜 사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날뛰는 뉴라이트로 불리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민족역사의 왜곡 날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해석이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묻힌 소소한 자료들에서 그날들의 진실을 우리는 읽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품고 있을 “단 한 번의 단순한 감정적 체험의 틈 속 깊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지 모를 흩어진 심리적 자리”를 우리는 복원하고 해독해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시작하는 이 문장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