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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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세상에 하나의 모습을 입어 태어나 풍파 속에서 사랑하고 꿈을 꾸고, 투쟁하다 다시 형태를 갖기 이전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무한한 양태로 연결의 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을, 한낱 꿈과 같은 찰나의 연()인 것이 것만 뭐 그리 대단한 영화(榮華)를 천세만세 만만세 누릴 것인 양 인간들은 교만을 떨어대고, 잔악과 폭력을 휘둘러대는 것인가. 장구(長久)해 보이기만 하던 육백년의 시간을 견뎌온 팽나무 할매에게 명멸하는 존재들의 덧없는 생의 분투는 얼마나 시린 것이었을까, 모든 만물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의 미련스러움과 탐욕스러움도 한단지몽(邯鄲之夢)인 것을 말이다.

 

【군산시 옥서면 하제 마을 600년 팽나무, 군산시 지정 보호수


아무르 강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소설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적의 공격을 피하고, 짝을 찾아 새끼를 낳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을 향한 생을 건 비행을 한다. 조선 반도 서해안 하구에 긴 여정에서 바닥난 신체를 보충한다. 겨울이라 바짝 마른 열매를 달고 있는 팽나무는 개똥지빠귀의 고마운 양식이다. 그의 짝 암컷 개똥지빠귀 개암이날개의 고통스런 외침이 들려온다. 황조롱이에 낚아 채여 도움을 요청하는 울음이다. 그는 날아올라 황조롱이로부터 개암이날개가 풀려나도록 만들고 자신은 황조롱이에게 쫓긴다. 집요한 공격과 도주비행, 개똥지빠귀는 날개에 치명적 상처를 입어 동료들이 있는 하구 부근 곰솔이 무성한 숲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난 빈터에 떨어진다. 기진맥진한 작은 새의 몸 위에 눈보라가 들씌워졌고 체온이 떨어진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죽은 새는 눈 밑에서 썩어갔고, 그의 뱃속 팽나무 열매 몇 개 중 거죽이 사라진 딱딱하게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 흙속으로 들어가 습기에 불고 싹이 트고 실 같은 뿌리가 생겼다.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들어 기름진 땅....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뎌낸 어린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생명의 활기를 깨달으며 거목으로 성장한다. (31쪽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조선초엽 어느 시절의 한반도 서해안 한 하구(河口)에서 이렇게 역사의 시침은 흘러, 지배층의 무능과 착취에 내몰린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생을 건 행로에서 한 노승은 유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다섯 살 아이를 거두어들인다. 긍휼(矜恤), 측은지심이다. 보경사 광덕스님은 아이에게 몽각(夢覺)이라는 불가(佛家)의 계명을 준다. 아이는 불법과 경전에 뜻을 두지 못하고, 노스님은 몽각에게 절의 식량과 채소를 가꿀 밭을 내준다. 몽각은 성실히 절에 자신이 수확한 양식들을 나른다. 수박과 참외를 한 지게 지고 공양간에 건네주던 그 어느 날 불공드리러 온 강릉부사의 여식과 만나게 되고, 몽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애태운다. 그렇게 일심으로 여인을 그리워하며 절을 올리다 법당에서 잠깐의 잠을 이룬다. 아마도 몽각이 꾸는 이 한나절의 일취지몽(一炊之夢)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생의 깨달음, 팽나무 할매가 지켜본 삶의 궁극에 대한 견성(見性) 그것일 것이다.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처럼 몽각은 소녀와 이룬 금슬지락과 나라의 폭력에 내몰린 유민의 곤궁함, 그리고 이별이라는 한 생애를 현생처럼 겪는다. 세속의 한평생 덧없는 희로애락을 겪은 몽각은 홀로 수도(修道)의 길에 나선다. 몽각의 견성은 이미 그에게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여정에서 보게 되는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백만 백성의 끔찍한 재해와 외딴 섬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로 불리는 장소의 절대 고독의 삶과 갯벌에 앉아 그를 연명하게 했던 생물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하는 장면은 모든 미혹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어떤 숭엄함에 젖게 한다.

 


칠게들이 그의 주검을 덮어버리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하제 앞 수라 갯벌에는 철새들이 날아들고 먼 비행과 폭풍우에 지친 도요새의 주검은 생합들의 몸이 된다. 바닷물이 밀려나가자 호미로 갯벌을 긁어 생합을 캐는 아낙들의 분주한 손이 작은 섬 하제의 팽나무 빈터에 사람들이 어느덧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개똥지빠귀의 주검을 거름삼아 성장했던 팽나무가 삼백 살의 거목이 되었다. 망념(妄念)과 미혹(迷惑)으로 분주한 인간들의 그 악착같은 욕심의 시간들이 한없이 축소된다. 결국 본래의 성품인 우주자연 그 어느 곳의 일원으로 합류할 존재인 것을.

 

소설의 후반부는 서낭목이 된 팽나무 할매를 중심으로 하제 포구와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찰나처럼 흐른다.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팽나무 할매를 몸주 삼은 당골네에 시집온 고창댁 자근연이가 낳은 배춘삼과 그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던 뱃사람 유 사공의 정성스럽고 충실한 여느 보통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사대부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궁핍에 내몰린 백성들의 오갈 곳 없는 의지를 기댈 수단이 되었던 천주교와 서학의 탄압 속에 이 민초들의 가계(家系)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신산한 삶이 무한히 내어주는 자연, 갯벌과 드넓은 어장에 기탁하여 다시금 생을 지속해 나간다. 어언 팽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에 이르렀을 때, 그 잘난 조선의 사대부들과 왕은 외세를 불러 구국(救國)의 길, 온 백성이 형제자매이고 만물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무차별 학살하며, 나라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시천주(侍天主),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동학의 우주만물의 평등과 그 존귀함의 정신은 망령된 집념에 사로잡힌 사대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파괴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들의 야욕의 시간이라고 달리 흐르겠는가. 그것들 또한 썩어 흙과 강과 대기의 한낱 원소로, 그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하제 위에 있는 중제와 상제에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일본은 군용기 활주로를 건설하고, 팽나무 할매는 그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패망한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서고, 미군 군용기 활주로 확장과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간척지 사업으로 사람들과 온갖 생명의 터전을 탐욕으로 물들인다. 병인년 박해로 한 가계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핏덩이가 살아 그의 후손인 신부가 되어 국가폭력과 생태파괴를 무참히 저지르는 탐욕의 정치에 맞서는 길 위의 신부가 되고, 인적이 사라진 저녁 갯벌에서 들려오는 생명들의 대합창 소리를 들은 춘삼의 후손 배동수의 연대의 목소리가 더해져 숭고한 만물의 대합창이 되어 울려온다,

 

소설의 목소리는 견성이요, 시천주이고, 만물의 인연이며, 존재의 일원성에 대한 깨우침일 것이다. 이제 섬이었던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저지른 갯벌의 간척화로 인해 섬의 흔적은 사라지고 군산 옥서면 선연리 하계 마을이라는 육지가 되었는가보다. 새와 나무와 갯벌과 인간, 지상의 모든 개체들의 그 짧은 순환의 순간으로 경유하는 생의 찬연(燦然)함과 인연과 궁극의 본성을 생각게 된다.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좀체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온갖 인위적 관습에 순응하며 저마다 분주히 자기 욕망에 몰두할 때 타자의 세계는 저만치 물러나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얼마나 짧은 순간 우리들은 이 형상을 함께하며 살아가는가. 이름없이 서있는 나무들과 풀과 꽃, 곤충들과 새, 강과 갯벌과 바다의 수많은 개체들, 이 모두가 우주의 근원인 하늘님을 지닌 존재인 것을. 꼭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기만 하겠는가. 事萬物如天인 것을. 생태소설이며,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모든 목소리로 들려주는 한반도 우리네 터전의 통사(通史)이고, 생명에 대한 찬란한 서정시이자, 만물의 감응과 인연에 대한 견성의 경전이다. 오늘 우리네 지성의 깨우침은 여기에 이르렀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귀 기울이면 듣지 못했던 무수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들과 이 작은 몸뚱이가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 겨울 점점 더욱 땅의 흙내가 내 코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저 개똥지빠귀의 시간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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