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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비너스 ㅣ b판고전 14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8월
평점 :
18세기 초, 뉴턴(Isaac Newton)주의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모페르튀(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1698–1759)의 네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 《자연의 비너스(Venus Physique)》는 인류 지성의 무지(無知)에 대한 적나라한 이해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한 탁월한 지성의 경탄할 만한 사유의 진행과정, 즉 통찰력으로서의 치밀한 사유의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는 놀라울 만큼 흥미로운 저작이다.
이 논문들이 쓰여지고 발표된 시기는 대략 1740~1750년대로 여겨지는데, 당대에는 ‘세포’나, ‘진화’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나 이해도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동물의 생식에 관해서 당대 자연철학자들은 ‘난(卵)에 태아가 들어있다는 이론’과 ‘정자(精子) 동물 이론’이 각축을 벌였던 무지의 논쟁으로 마치 두 편 중 한 편이 죽어야 끝날 듯한 논의의 격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모페르튀는 이러한 논의들을 전술(前述)하고, 이어서 각 논의가 지닌 결점과 난제들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태아형성 가설’을 제시한다. 이 논의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당대 최고의 과학지성이라는 사람들의 확신을 보는 것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너무 무지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정신은 감각이 발견한 것을 추론하는 데 그칠 운명인 것 같다.” -58쪽
하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자기 확신에 의혹을 가지고 인간의 지성은 항상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는 반성적 사유를 하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인간에 대한 어떤 희망적 가능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책은 〈동물의 기원에 관하여〉, 〈인간 종의 다양성〉, 그리고 부록으로 수록된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과 〈디드로 씨의 반박에 대한 답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 이성을 내세운 계몽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어서 오늘의 앎의 토대에서 볼 때, 당대에 이러한 터무니없는 생각들로 최고의 지성들이 논쟁을 벌였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난에 태아가 들어 있다는 난(卵)주의자들의 주장을 오늘 우리들은 전성설(preformation theory,前成說)이라고 부르고, 남자의 정액에 들어있는 동물 벌레가 태아를 만든다는 주장을 후성설이라고 거칠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간략히 말해서 전성설은 개체 발생에서 완성되어야 할 개체 각각의 형태와 구조가 발생 출발 시에 이미 미리 존재하고 있어 발생에 즈음하여 분명한 형태를 갖는다는 학설이고, 후성설은 난주의자들이 압도하고 있던 학계에 네덜란드의 자연학자 하르트소커(Hartsoeker, 1656~1725)가 남성의 액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함으로써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는 살아있는 동물을 발견하게 됨에 따라 생식능력이 전적으로 수컷에 귀속된다고 하는 학설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 두 이론의 터무니없음을 잘 안다. 난에 태아가 들어있다는 학설의 내용은 이렇다. “난소 안에 이미 완전한 형성을 끝낸 암컷들이 들어 있어서 이들이 무한한 생식의 원천이 되고, 모든 암컷은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들어있는 식으로 존재하므로...”와 같은 도토리 안에 참나무가 들어있어 그것이 성장하여 가지를 뻗고 대지를 덮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같다는, 눈에 보여 자신들이 잘 아는 유비(類比)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리곤 이런 작은 조각상으로 사람을 만들려면 새로운 재료와 정기(精氣)가 필요한데 그것이 남자의 정액으로 여성의 몸에 들어가 팔다리에 스며들어 난소 안에 이미 완전한 형성을 끝낸 그것을 움직이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해준다는 학설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 젊은 자연학자의 현미경 관찰로 뒤집혔다. 정액의 “한 방울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헤엄치고 있는 대양(大洋)을 본 것”이다. 일련의 학자들은 성급하게 이 발견을 토대로 동물들이 언젠가 그 수컷의 후손이 되리라 단정 짓고, 크기도 작고 모양도 물고기를 닮았지만 나중에 그것의 크기와 모양이 변할 것이라고, 자신들이 주변에서 관찰해 잘 알고 있던 곤충의 변태 등과 같은 것이라고 수컷에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선언한다.
“난은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태아를 갖고 있거나, 태아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최초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 année, 《왕립 아카데미 논문집》, 1701년
그런데 이것도 생명 발생에 대한 이론으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고, 난이론과 정자활동 이론을 혼합한 이론이 대두된다. 그렇다면 대체 난(卵)이 왜 필요한 것인가? 완전한 인간이 정액에 들어있지만, 난은 여전히 필요한 데, 영양분을 제공하고 성장에 책임을 지는 물질 덩어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곤충들이 과일 속에 들어가 과육을 영양분으로 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당대의 이러한 생명 발생이론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무지의 지(知), 즉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쓰라리고 중대한 것인지를 생각게 된다. 사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어떤 과학적 발견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경험에 기초한 사유만으로도 결점들이 충분히 드러났을 텐데 말이다.
심장의 혈액 펌프 운동 운반설로 유명스타가 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도 일종의 전성설 주장자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전폭적 지원 하에 수많은 사슴을 살육하며 생식 실험을 하였는데, 교미 직후 사슴 암컷을 해부해 자궁을 보았으나 정액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실험에 따라 수컷의 정액은 자궁에 머무는 일도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일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수태과정에 대한 기이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모페르튀는 이것을 자연학이 아니라 스콜라철학에 가까운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한다. “자궁은 아이를 배고 뇌는 머리에서 형성된 관념을 밴다.”, 정말 괴이한 결론이다. 인간들은 뭔가 모르면 모른다고 여기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확신한다는 듯 정신(머리), 관념에 돌리곤 마치 무언가 아는 체 하곤 한다. 인류 지성의 몽매함을 이렇게 둘러보다보면 어쩌면 우리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지식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모페르튀의 이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이 모르고 있음을 깨우친 인간의 치열한 앎으로의 지향의 노력,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탐구정신의 발견이자 앎에 대한 겸허의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깨우친다(éclairer)는 것이 무언가? 정신에 지성과 명증성을 부여하는 일이지 않은가? 대체 아무것도 ‘명증한’ 것이 없는데 확신하는 진실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잘 난 지성의 모독이 아닌가 말이다.
데카르트의 생명 발생이론은 하비와 거의 다르지 않은데, 오직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역학인 운동과 발효의 법칙만으로 심장, 두뇌, 눈, 코, 귀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작용이 모종의 작용을 일으켜..” 운운하는 지성의 교만을 보는 것은 자신의 오류를 승인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태도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난이론이건 정자동물이론이건 간에 생활의 주변을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뉘어 닮은 아이들이나 백인과 흑인 사이에 출생한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에 이미 새로운 생명이 갖춰져 있다거나 정액 속 동물벌레에 이미 형상이 갖춰져 있다는 주장으로 설명할 수 없었음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모페르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생식이 이루어질 때마다 유기체, 동물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이지 전혀 모른다고 하겠다.”고. 그는 자신들의 잘못을 벗어나야 난점을 해결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난의 영양분을 먹고 정자 벌레가 형체로 발육한다면 섭취하는 먹이의 모양을 닮게 된다는 믿음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냐고, 또한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이미 포함되어 있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연쇄된 동물들이 동시에 형성되었다는 믿음이 가능한 것이냐고 반문한다.

이에 더해 가히 터무니없음의 극치를 이루는 레므리와 윈슬로라는 두 자연학자의 ‘괴물논쟁’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역시 생명발생론에 터 잡은 논란이다. 윈슬로는 애초에 괴물로 태어날 난이 있어, 완전히 형성이 끝난 괴물이 들어있는 난이 있다는 것이고. 레므리는 안에 어떤 사고가 일어나 생겨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이 맞선 것이다. 실은 기형아에 대한 논쟁인데 당대인들은 괴물이라고 지칭했던 모양이다. 두 주장 모두 분명하게 틀렸지만, 결국 이 논쟁은 당대 지성을 짓누르고 있던 기독교 유일신의 모독 여부, 즉 형이상학적 원인의 문제로 치닫는다. 신이 태초에 괴물의 종자를 창조했다는 생각은 신성모독이라고, 반론은 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광범위한 단일성과 규칙성에 국한시키는 일은 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또 다른 모독이라고 맞섰다나. 과학의 언어로 말하지만 결국은 형이상학적 비이성을 최고의 자연학자들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의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18세기나 21세기 오늘에나 과학의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의 인식을 호도하는 예는 한 치의 차이도 없다.
당대 자연학자들의 기이한 믿음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있는데, 산모의 상상력이 괴물을 출생시킨다는 믿음에서부터 욕망이 기형아를 출산시킨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가히 존재 추적이 불가능한 그 믿음이라는 것의 불쾌함을 보게 된다. 서구의 정신이 자랑하는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과학적 이성의 계몽주의가 피어나던 1700년대 프랑스에서 말이다. 모페르튀는 각 이론과 모순되는 작은 반론을 말하는 실험들을 소홀히 취급하지 않는다. 정액은 항상 자궁에 들어가지만 다량으로 머무는 일은 없다시피 하다는 베르헤얀의 실험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명백히 모순되는 현상이 존재함에도 한 이론을 계속 따라가야만 한다면 자연학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모페르튀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태아형성 가설을 내놓는다. 당대의 과학적 발견이 오늘날 비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것들에도 미치지 못한, 다시 말해, 세포는 물론 세포분할, 유전체(DNA), 정자와 난자의 결합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현대 과학에 근접한 생각에 이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현대 과학 용어에 미치지 못하는 그만의 언어로 말하기에 세련되지 못했지만, 그는 새로이 발견되어야 하는 어떤 힘에 도움을 구해야 함을 직관하고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에티엔 프랑수아 조프루아(1627~1731)’가 1718년 발표한 물질 상호간 화학 결합을 이루는 정도를 나타내는 ‘친화력’과 모든 개체의 ‘구성 일원론’의 주장에서 ‘관계’라는 새로운 힘으로서 서로 결합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진 두 실체의 결합의 사유로 나아간다.
정말 경탄하고 싶은 통찰적이고 반성적인 지성을 볼 때면 어떤 감동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스스로 반문하는 내용들을 보면 이렇다 “이러한 힘이 자연에 존재한다면 동물의 몸을 형성할 때 작용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 동물 자체가 되지 않으면서 동물을 만드는 데 어떤 식으로든 소용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등등, 모페르튀의 지성은 거의 현대적이다. 그는 물질의 거대한 더미에 어떤 지성의 원리가 존재함을 감지한다. “감정이란 결국 지각이고 사유”라는 점을 그는 현대의 객체지향 이론가들이나 감관주의적 실천철학자들에 앞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의 원리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부분들에서도 역시 존재할 것이고, 어떻게 조직이 되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가설적 생각들은 현대과학과 철학에 그대로 가닿는다. 물론 그의 결론인 가설들에는 역시 미흡한 요소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서양 백인 남성의 구조에 익숙한 인물이 지닌 한계가 노출되기도 한다. 일례로 인류의 흑인 기원설을 백인 기원설로 둔갑시키는 조잡하고 무지에서 비롯되는 논증들은 가증스럽기도 하다. 흑인의 피부 망상조직에서 발생하는 질병인 백색증을 증거로 하여 백인에게는 흑인이 출현하지 않는데, 흑인 부모가 백색의 피부를 가진 아이를 낳는 것은 본래 백인이 인간 종의 기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나, 백인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의 인종들은 추하고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육손이 등 기형아를 괴물로 지칭하는 것 등은 시대성에 속박된 인식의 한계일 것이다.
다만, 그가 낯선 기괴함을 자연의 광경에 감탄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이종(異種)에 대해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만큼 지적 편협에서 벗어난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이기도 한다. 반면, 그로부터 100년은 지나야 대두될 진화론적 발상들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다양성의 근원이 정액 자체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나는 환경과 양식의 영향도 배제하지 않는다.”라거나 “계속 세대를 거듭하는 종족이 되려면 이 세대가 반드시 여러 차례 거듭되어야 하고”와 같은 구절에서 그가 생명의 발생에 대해 상당부분 그의 시대보다 진전된 시선을 지니고 있었음의 증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응도에 따른 종의 발생과 멸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진화론의 선구자적 면모를 발견하게도 된다.
이렇게 앞 선 태아 발생에 관한 논쟁을 통한 가설의 제안을 말하는 두 논문에 이은 그가 가명으로 발표한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과 이를 두고 당대의 스타 지성인 디드로의 오류와 몰이해로 가득 찬 비판에 대한 답변의 논문은 그야말로 지성의 백미(白眉다. 디드로의 논지는 한마디로 모페르튀의 논문이 유물적인 신의 부정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자신도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무신론자라는 누명에 시달렸던 과학적 이성의 선봉자로 자처하는 인물이 정작 과학적 이성의 가설에다 무신론자라는 낙인을 찍으려 하는 괴이쩍은 비난이다. 생명 발생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존재론, 다시 말해 존재의 기원, 궁극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모페르튀에게서 발견되는 탁월함이란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으로서의 원소에 지성의 원리, 다른 말로 감각지성의 존재를 사고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질에 지성, 욕망, 혐오, 기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오늘날 모든 물질 개체의 정동(affect)을 말하는 철학적 접근에서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바로 그것이 개체의 조직과 차이를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사(近似)하다. 특히 그의 논문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은 영혼이 고유한 본질이 사유이며, 물체에 고유한 본질이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어, 그가 비록 유기체라고 한정하고 있긴 하지만 존재 일원으로 확장 가능한 존재 발생에 대한 세 분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에도 전혀 손색없는 지성을 읽을 수 있다.
“신이 단 한번 원소들 가운데 내뿜었던 속성들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 더 위대하고 전능한 신에 걸맞은 것 같다.” , 이 표현에 신이 들먹여지지만 그것은 당대 유일신론자들의 비난을 비켜가기 위한 에두른 언어로 내게는 우주자연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혔다. 그가 조프루아의 모든 개체의 구성 일원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읽기일지도 모르겠다. 들뢰즈의 정동 이론을 구성하는 존재 일원론의 원천으로 조프루아를 말했을 때, 모페르튀의 유기체 형성론은 어쩌면 그 영향의 한 원천으로 읽었을 법도 하다. 화려한 지성사를 수놓았던 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던 뛰어난 학자를 통해 앎이란 무엇인지, 그 앎의 토대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앎의 진전이 아주 느리지만 인류에게 찬란한 지성의 빛이 되어주는 것을 목격하게도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에게 존재란 그 근원을 사유하려는 과정과 노력으로부터 체득되는 것이기에 유기체 발생에 대한 이 오래된 논문은 또 다른 지성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데카르트 주의자들이 주류로 구성된 당시 프랑스왕립아카데미에서 이 뉴턴주의 자연철학자는 고난을 겪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항시 주류집단의 기득권이 새로운 진실의 접근을 방해하곤 한다. 만일 이러한 패거리 문화의 반이성과 반지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마 저 멀리 앞선 지혜로운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지난 시대의 지성들의 논의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들 무지를 반성하는 뜻 깊은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찬란한 무지의 확신들에 어린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모처럼 크게 웃으며 읽었다. 웃음이 고픈 지성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