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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기록 ㅣ STORAGE BOOK & FILM 5
안윤 지음 / 저스트스토리지 / 2023년 4월
평점 :
“그리하여 물은 대지의 시선이 되고, 시간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 폴 크로델, 《해 뜨는 나라의 검은 새》, p229에서
예순 편의 글로 엮인 이 산문집은 작가의 「못다 한 말」에 “들킬 수밖에 없는 저의 일부분이라서 당장 숨을 곳을 찾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라 하듯, 한 사람으로서의 원초적 반영의 산물들 일 것이다. 작가의 소설집 『모린』을 읽으면서 나는 안윤 이라는 존재자를 구축해 온 세계들을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원인일 수도 있는 엄마가 늦잠 자는 딸을 깨우기 위해 옆에 누워 즉흥으로 불러주던 우엉 반찬 노래의 기억이기도 하고(「그 노래」), 시간보다 뒤늦고 여전히 익숙해질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계절의 흐름 사이에 겪는 「환절통」이며, 네 살 이후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도시 유목민의 습성을 갖게 한 근거없는 불안과 불쾌가 들끓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고향을 말하게 하는 안윤이란 사적 개인이다.
한편으로는 “시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는, 작가의 여러 소설 속 서사 축으로서 흐르는 시간과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조망자의 시선에 대한 어떤 성향 혹은 심리적 배경에 대한 이해다. 이 이해에 대한 요구는 좋아하게 된 작가의 작품들에 보다 감응의 깊이를 더 갖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산문집 『물의 기록』은 ‘물(水)’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가리키듯 이미 시간의 흐름, 시차, 틈, 간극과 같은 어떤 식별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산문들의 제목인 「강을 건너다」, 「문턱을 넘다」, 「얼룩」, 「얼굴 퇴적층」, 「간극에 닿다」처럼 이미 시간의 차이로 인해 거리를 확보한 관찰자의 시선이나 명상으로서의 관념화된 반성적 사념들이 흐른다.
산문 「환절통」에서 작가는 계절이 변화할 때 몸살을 앓는 자신은 “미련하고 뒤늦은 통각으로부터 나는, 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현재를, 계절을 본다.”며, 생의 감정주기에 견주어 볼 때 시차가 있다는 가설에 설득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나무의 칠이 벗겨지고 마모되어 거친 속을 드러낸 문지방을 짚어보며 “거기 시간의 속살, 시간의 주름이 있다(「문턱을 넘다」)”고 말하듯 지나간 시간에 대한 비로소의 애도와 그 기록을 통해 해석하고 유추하며 자기 삶의 현재를 감각한다.
이 시간과 거리의 필요는 “그 풍경의 마지막 기억과 현재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내가 미처 겪지 못한 시간과 공간이 그 틈으로 들어서”기 때문이고, “나의 부재에도 풍경이 제 나름의 기억들을 축적하며 변화해 왔다는 사실(「간극에 닿다」)”에 연유한다. 즉 생의 연속되는 간극에서 충실하게 서성이는 것만이 가능한 존재로서 자신의 부재에 대한 미련에 어떤 결벽성이 작동하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작가는 섣부를 수밖에 없지만 그 섣부름을 지연하기 위해, 그 틈을 충실히 서성이기 위해 애쓰는 시간 낭비자임을 무릅쓴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가진 “시력을 초월한 어떤 시선이 한꺼번에 세계의 깊이를 조망(「비존재 느낌」)”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산문들을 통해 독자들은 독특한 조망자의 시선을 가진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에 보다 친근하고 밀착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산문들에서 소설의 어느 한 문장과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 맥락과 분위기에서 연상되는 감정에 다가가는 간접적 통로가 되어 주기도 하고, 어떤 특정 소재나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서에 기초해 보다 심층의 함의(含意)로 접근 하는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집 『모린』에 수록된 단편 「또」에는 ‘계약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의 잔여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틋한 ‘또’소리를 듣는 수진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를 도시 유목민으로 살도록 만든 사연이 흐르는 산문 「이사」 에서도 “곧 있으면 계약 기간이 일 년 남게 된다.”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불안과 불쾌를 상시적으로 강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소재나 부분적 배경들에 얽힌 사연들의 발견은 눈 밝은 독자들에게 아마 몹시 반가운 발견이 될 것이다. 산문 「나무를 심다」에는 친구 G와 노을 공원까지 걸어 꾸지닥나무 두 그루를 심는 이야기가 있다. 단편 「하지 夏至」에 등장하는 지언과 함께하는 노을공원 이별 캠핑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독자로서 당연한 연결일 것이다. 아, 혹시 소설 속 지언이 바로 G와의 기억과 관련된 것일까? 하는 상상 말이다. “흙과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스스로 살아 주었”다는 한 토막의 에피소드는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봄으로써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소설을 보다 깊게 읽을 수 있는 어쩌면 상상의 확장에 기여할 지도 모른다.
아마 이 산문집의 글을 또 하나의 산문으로 정리한다면 어쩌면 「하려는 말」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전 생애를 거치며 구축한 고유의 언어 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희망, 아니 차라리 탐욕인지도 모른다. (...) 흩어지고 깨지기 쉬운 이 말들이 당신 앞에 가닿아 미끄러지기를, 아름답게 미끄러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당신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고 밑바닥만 내려다보게 되는 어떤 날에, (...) 도달하지 못했던 나의 말들 중 하나를 발치에서 집어 올려 들여다봐 주길 기다린다. 뻔뻔한 이 탐욕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시간과 거리의 적절한 확보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성찰의 대상이 되어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의 아픔이나 더러움,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이 문득 아름다움으로 변이한다는 사실도 발견하고, 때론 그 아름답지 않은 아름다운 생이 비로소 생을 아름답게 이룩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작가의 시간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물들기를, 피할 수 없이 기다리기 위한 사유의 지체인 듯하다. 안윤 작가의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면 정말 좋겠다. 천천히 말없이 차를 마시지만 오랫동안 무수한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산문집 『물의 기록』은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그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글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