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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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t is silence. (今歸于黙),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

 

21세기는 어쩌면 인류의 오랜 진애(塵埃)를 떨어내고, 평상(平常)하고 무심(無心)한 깨달음이 요구되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한국사회도 이제 묵고 낡아빠져 부패한 것들, 죽음 충동, 짙게 드리웠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고 새로운 도약으로 바야흐로 나아가는 삶의 지대에 이르게 된 것 같다. 대체 그 깨달음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한국인의 모습을 위해, 어떤 결여도 없는 유정(有情)의 여여(如如)함에 내재된 무궁한 잠재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음이라. 불교의 대표 공안(公案)집인 벽암록은 승방(僧房)에 좌선하는 선승(禪僧)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고, 그 에너지를 삶으로 전환코자하는 각고(刻苦)의 분투이다. 도올은 그만의 생각으로 풀어 벽암록을 오늘, 이 시대의 사유거리로 현재화했다. 그것은 곧 세계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위의 문장은 결투 끝에 죽어가는 햄릿의 마지막 한마디다. 이 말이 뭐 어쨌다는 것인가. 만일 이 말의 속뜻을 헤아린다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또는 희곡작품에 대한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것이라도 될까? 도올은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하나의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과제로 제기되는 언행이고 문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내가 실재하고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전제한다. 혜능(慧能)은 누구인가. 선종(禪宗)의 씨앗을 뿌린, 하나의 문명에 깨달음이라는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킨 진정한 창시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六祖 혜능(慧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올은 아마 삶의 차별이 해소되는 무차별인 죽음, 열반(涅槃), 삶의 근원적 충동으로서 내면화된 열반에 대한 대오(大悟)와 대각(大覺)을 햄릿으로부터 발견했던 모양이다. 정말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주절거리던 “To be or not to be, this is the question;” 이 햄릿의 실존적 결단의 우유부단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멜로 드라마적 비극의 원천인 건가?

 

도올은 접속사 ‘or'을 결단의 모멘트로 해석하는 순간, 한 영혼을 지배하는 독백의 외침을 듣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삶의 현존의 한 순간에 밀어 닥치는 모든 'or'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즉 존재와 비존재가 초월되는 그 무엇으로서의 해탈일 수밖에 없다고. 햄릿 자신이 죽든 말든, 그의 문제의식은 죽느냐 마느냐하는 실존적 결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의 독백은 죽음과 삶의 선택이 강요되는 독백이 아니라, 죽든 살든 그 선택이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무의미성에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차별에서 오는 희비(喜悲)의 연속이고, 삶 속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까닭에, 그 근원적 충동으로서의 열반이요, 대각이라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일체감을 보았기 때문일까? 햄릿의 독백이 과연 결단의 망설임에 방황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요, 열반인 삶의 완성에 대한 심원한 목소리였을까?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어 萬古長空, 一朝風月.”과 하이쿠 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는데, 만고의 변함없는 스페이스(Space), 그 무차별한 시공(時空), 그런가하면 한 아침 바람에 지는 달이 있다. 무차별과 차별, 영원과 한 순간, 깨달음의 계기는 이 만고장공에 그려지는 일조의 풍월이 있음에 우리의 직관적 총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적막한 옛 못/ 개구리 날라드네. / 물소리 퐁 당”, 적막한 옛 못 위에 던져지는 그 삶의 계기인 퐁 당이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근원인 열반의 의미인 것인가?

 

삶과 죽음의 이중주가 있는 바로 여기, 우리는 열반이 삶의 완성이라 되뇌지만 불현 듯 밀려오는 공포의 아이러니가 분별심을 자아내고, 그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 우리는 삶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햄릿은, 선의 깨달음은 죽음이라는 해탈 그 자체가 해탈되는 곳에 구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었다는 것이다. 열반을 두려워 한 겁쟁이, 이러한 자들이 득시글댈 때 세계는 어둠에 묻힌다.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분별을 초월한 해탈의 한 형태를 보았다. 죽음의 충동에 맞선 해탈이 곧 이들 시민이지 않을까?

 


선불교의 대표적 공안집인 벽암록에 대한 부분적 해설인 이 책을 비롯하여 무문관과 같은 선문답의 해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듣곤 한다. 즉 선()의 굳건한 주장이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이거늘, 그 수시(垂示)에 개념의 실체화를 도모하는 행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선지는 모르겠으나, 시중 대부분의 역서(譯書)들이 단순 문자번역이거나 어의의 해설일 뿐, 그 내면적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배면의 깊은 뜻을 언어화하지 못하면 그 번역(해석)의 정당성도 검증할 길이 없다.” 는 도올의 지적처럼, 벽암록이 합리적 언어의 질서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의 궁극에 부닥쳐 자기의 깨달은 바를 여여하고 소박하게 진솔한 마음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불립문자 뒤에 숨어 기만적 언행을 일삼으며 무식함을 영구히 나르는 무식의 항구화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벽암록의 초합리(超合理)는 비합리(非合理)가 아니다. 선계(禪界)를 지배하는 병폐는 초합리를 합리의 벼랑길에서 밝히지 아니하고 또다시 무지의 기만 속으로 얼버무리고만 있다는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자기 해석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한 방편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내 오류나 무지를 걷어내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말이다.

 

벽암록에는 이와 유사한 논쟁의 수시가 있다. 조주스님과 그의 제자 무리의 한 승려가 나누는 대화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재유언어 시간택? 노승부재명백리, 시여환호석야무? (至道無難, 唯嫌揀擇, 纔有語言, 是揀擇? 老僧不在明白裏, 是汝還護惜也無?)

時有僧問: 기부재명백리, 호석개집마? (旣不在明白裏, 護惜箇什麽?)

州云: 아역부지 (我亦不知.)

僧云: 화상개부지, 위집마각도부재명백리 (和尙旣不知, 爲什麽卻道不在明白裏?)

州云: 문사기득, 예배료퇴 (問事旣得, 禮拜了退)

 

조주는 말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선택적 판단을 싫어할 뿐이다. 선택적 판단에 떨어지지 않으면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 가게 된다. 그런데 이 늙은이 조주는 말이야, 그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런데 그대들은 아직도 그 절대경지를 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 한 스님이 일어나 묻는다.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다면 구할 대상조차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저희들이 뭘 구하겠습니까? 조주는 말한다. 나도 몰라. 스님께서 나도 몰라 하신다면, 왜 명명백백한 절대경지도 있지 않다고 아는 체 하셨습니까? 다 물었냐? 그럼 이제 절하고 가봐. (본문 번역 인용)

 

이 공안을 어떻게 풀까? 평행선을 달리는 이 공안, 즉 논리와 분별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조주와 논리의 철저성을 추구하고 무분별을 거부하는 문승(問僧)이 있다. 왜 이 공안을 풀어 설명하는 책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이 피 튀기는 논쟁의 문제, 논리적 맥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왜 안 된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길을 안내 받는 것이 왜 선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인가? 진리에 대한 준열함을 엿보는 것이 진정 깨달음을 훼손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주의 말뜻은 나는 그걸 바로 알았단 말이야.’ 명백(明白)이란 인간의 상대적 집착이고, 그것은 상대가 모두 멸절되어버린 절대적 경계를 말하는 것임을. 조주는 이 절대적 경계마저 부정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직관의 총체다. 궁극적으로 무언가 알아들어 먹으려면 스스로 여우굴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들어갔다 나와도 될까말까 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직관 속에서 깨달아야 함이다. 그걸 한마디로 말하라고? 거저 먹으려구, 그렇게 되면 얼마나 손쉽겠나. 오로지 스스로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한국인들은 이제 조금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법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았을 터이다. 작금의 이 불의한 장애적 사건이 어떤 깨달음의 시간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이 책은 해석을 거부하는 수전 손택을 거부한다. 어찌 주관성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인간 개체는 누구하나 같지 아니하다. 다만 그러함에도 우리가 지향하는 길을 찾음에 있어 그 방편의 안내는 불가피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혜능이 비록 의법상전(依法相傳)의 법통을 깨부수고 적통의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선을 우뚝 세웠지만, 그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禪師의 가르침을 전승(傳承)하지 않았던가? 그 전승이 바로 해석이지 아니한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숭배하는 언어 呵佛罵組(가불매조)’에 가닿는다. 깨달음의 우열을 말하고, 법랍의 서열을 말하고, 큰 스님을 말하고, 조실(祖室)을 말하고, 방장의 권위를 말하는, 본체는 전하려 하지 않고 의발(衣鉢)만을 전하려 하는 편협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 언어다. 이것이 우리사회 전반에 흐르는 필히 뒤엎어야 할 근원적 부조리다. 선생의 권위에 머무르며, 제자의 지식을 억압하고, 빼앗으며, 체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말이다. 소위 갑질이 여전하다. 윤의 사태도 이 갑질의 뿌리인 권위주의에 기인한 일제의 뿌리깊은 잔재일 것이다. 이제 온 분야에서 걷어내야 할 터이다.

 

벽암록1에서 5에 이르는 덕산과 암두, 황벽과 임제의 일화들은 스승과 제자의 배움의 여정에 있어 서로의 기지를 뛰어넘으려 경쟁하는 격렬한 치고받음을, 그 스스럼없는 평등의 현장을 보여준다. 배움과 깨달음의 격정적 현장이 바로 선종의 극성(極盛)기였음은 아마 진정견해(眞正見解), 무사지인(無事之人)의 생생한 증거일 것이다. 제발 뭘 한다고 꾸미고 으스대고 폼 잡지 말라. 그저 평상한대로 있으시오.(但莫造作, 祇是平常.)” 平常無事! 오늘 우리사회, 정치, 교육의 꼬락서니를 보면 납승(衲僧)의 다반사(茶飯事)에도 못 미치는 연놈들로 무성하지 아니한가? 마치 제가 제일 잘난 연놈처럼 구는 모습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한다. 짐짓 자신을 뽐내려는 의지로 달마에게 如何是聖諦第一義?(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오?)”는 설익은 양무제(梁武帝)처럼 말이다.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었는데 뭐가 성스러워?, 영혼과 신의 합일을 논구할 바탕조차 없는 것일 진데, 뭐 말라빠진 이냐! 라는 말은 경건조차 없을 때, 비로소 절대, 경건이 우뚝 솟게 된다는 얘기다. 정신과 진리의 정체로서 당당히 대결하고, 그러한 존재로서 만날 때, 아마도 이 세상은 조금은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가 될 게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사고의 뭇 흐름이 자유로워야 한다. 역순, 종횡, 여탈로부터의 해방, 그래야 비로소 사유의 세계는 비상한다.

 

이제 이 땅을 잠식해 온 썩은 뿌리들을 도려내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찬 발돋움을 도모 할 때에 이르렀다. 깨달음이란 저 심오한 열반과 해탈의 지향이 아니다. 삶의 방편에 대한 올바른 스스로의 각성,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다. 심오한 문장 하나, 기발한 문구하나, 신선한 문제 제기 하나 얻어, 선종의 공안에 펼쳐진 이야기 하나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닐 것이다. 책을 통해 자기만의 작은 깨달음 하나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이 책은 삶의 지혜에 대한 또 하나의 올곧은 전승(傳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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