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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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꾸준히 독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를 생각게 되는데, 아마 인간의 두 대립하는 성향을 마치 시뮬레이션 하듯고립된 섬이라는 실험 공간에서 극명하게 관망케 함으로써, 적나라하게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직관적 체험의 장으로 이끌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 대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감성,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방편 대 눈앞의 편익의 매몰, 합리적 논리 위에 선 민주주의 대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의 대결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골딩은 시뮬레이션을 위해 한 장소에 모여 자신들의 생존과 구조를 위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하고, 구성원 각자의 임무와 능력을 조화하고 수행할 작업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할 리더의 선출 장면을 펼친다. 이를 위해서는 섬에 흩어져 인원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을 모아야 하고, 그 수단이 랠프라는 소년이 발견한 소라. 소라를 부는 것은 무리 전체를 공론장에 모으는 기능을 가지며, 또한 소라를 지님으로써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즉 무리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다수의 결정으로 특정 의견을 결정하는 일견 민주주의적 질서를 상징하는 도구이다. 최초의 모임에서 랠프가 대장으로 선출되고, 대장이 되고 싶어 했던 잭은 자신의 본래 무리를 이끄는 사냥대의 리더가 된다. 이로써 원시적이지만 무리의 기초적 질서가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의기투합은 이내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데, 구조를 위한 방편으로 산 정상에 불을 피워 혹시 지나가던 배로부터 구조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그들의 생존에 중대한 일이다. 인원을 나누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불씨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다. 또한 밤과 알지 못하는 두려움과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한 오두막의 축조가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두막 짓기에 관심이 없으며, 수영이나 놀이에 여념이 없으며, 봉화의 불씨는 꺼지고, 당번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즐거움에만 열중한다. 배가 나타났지만 봉화는 불타오르지 않으며, 의무를 진 아이들은 멧돼지 사냥 놀이에 빠졌다. 희박한 구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무리는 그것을 놓쳤다.

 

여기서 작가는 두 측면을 제시하려 하는 듯한데, 반성적 성찰없는 행위가 가져오는 직관적, 즉흥성으로 인한 생존행위의 방해가 그 하나이고, 눈앞의 편의라는 단기적 이익의 향유에 현혹되어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목표가 사라지고 마는 자기파멸적 몽매성이 또 하나일 것이다. 무리의 선출된 랠프와 사냥꾼 리더 잭은 첨예한 적대감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의견들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배가 이 섬 가까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연기를 피워야 해. 봉화를 올려야 한다구!”  -56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는 거였어.....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조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니?”  -69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있어. 그가 뭐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냥 몰려가고...”  -69

 

생각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자기 쾌락에 열중함으로써 무리의 구조 기회를 날려버린 것, 다시 말해 개인의 편익만을 우선시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파멸성이다. 이 최초의 갈등으로 무리는 분리되기 시작하고, 곧 이어 끔찍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갈등과 적대감이 쉽사리 폭력으로 전이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숱하게 접했던 실상이어서 사실 그리 새로운 식견이랄 수도 없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작가가 표출하고 싶어했던 것은 두 소년의 죽음의 의미와 아주 쉽사리 잔인함과 폭력으로 전이하는 인간과 무리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종교적 상념이다.

 

두 소년, 사이먼과 새끼돼지(무어)의 죽음과 원시적 종교성은 양 극단의 대척에 서있지만 인류의 본질적 고질병,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에 맞닿아 있다. 사이먼은 섬에 고립된 아이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공포의 정체, 그것을 뱀이라고, 혹은 짐승이나 유령이라 부르며,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신비화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바로 인간인 자신들뿐임을 자각한다. 한편 새끼돼지로 불리는 무어는 생각하는 능력, 사물과 사태의 궁극을 이해하려는 사유의 필요성을 말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소년은 트로이의 예언자이자 진실의 목소리인 카산드라이다. 사이먼과 무어는 무리에게 외면당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미친 소리이거나 직면한 현실에서 아무런 울림을 가지지 못하고, 마침내 야만성과 살의로 충만한 잭 일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인류의 역사는 늘 진실의 목소리를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저열성과 몽매성을 정당화했음의 고발일 것이다.

 

소설은 우리들에게 이해가 가능하고 합법적인 세계가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리고는 묻는다. 대체 우리가 뭐지? 사람이야? 아니면 동물이야? 그것도 아니면 야만인이야?”, 세계는 어떤 합의된 질서, 규칙을 지키려는 상호 노력에 의해서 지탱된다. 만일 이것이 파괴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각자 자기 개인의 편익만 한없이 추구하는 홉스식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이로부터 폭력성의 얼굴을 보여주는 데, 잭과 그 사냥 무리들이 원형을 이루고 창을 치켜들며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반복하여 외치며 광기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피와 진흙과 숫으로 채색된 가면이 된다. 모든 수치와 분별이 가려진 짐승으로의 변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치밀하게 통찰했던 인간 무리의 야만성에 깃든 그 시원적 폭력성을 짐승의 변장이란 이미지에 덧씌움으로써 자신들의 잔인성과 악덕을 정당화하는 기만으로서의 종교적 기원, 그것일 게다. 이 소설이 드러내고자하는 주제들의 보편성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 사회의 대립되는 두 부류의 본질에 가닿는다.

 

즉흥적이고 눈앞의 이익을 쫓으며,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무리들의 야만성, 이 무리들의 탈 규칙(), 법 초월적 야만성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성하는 자기 성찰과 좌절하는 상식의 세계, 합의된 질서의 세계를 지켜내려는 무리이다. 사냥 술책과 신나는 희열과 기만적 전술의 세계가 있다면, 인간이 함께하는 삶의 세계를 위해 생각하고 조금 더 현명해지기 위해 인간과 인간사회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규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가진 것이라곤 바로 그 규칙뿐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합의하여 가진 것, 그 규칙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의 퇴행이고 자멸이다. 그 누가 살아남겠는가? 윌리엄 골딩이 프로그램한 이 시뮬레이션을 관찰하다보면 절로 지금의 저 무도한 야만의 무리들이 해독될 것이다. 이 소설이 그침 없이 읽히는 까닭은 바로 인간과 그 무리의 본성이 발하는 어두운 진실을 밝은 하늘 아래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길은 과일 나무 숲도 침범했을 것이다. 도대체 내일은 무얼 먹을 작정이란 말인가? (...) 그들은 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313


P.S. 헌정 질서를 파괴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저 무도한 무리들은 그 파괴된 질서 이후에 대체 어떻게 한 사회의 안녕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독재로 국민의 입과 손발을 묶어 탄압하는 끔찍한 저 파시즘의 세계를 원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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