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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ㅣ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1
루이스 캐럴 지음, 정해영 옮김, 이진경 해설 / 그린비 / 2024년 4월
평점 :
그린비 출간의 이 번역판본을 읽게 된 동기는 극히 단순하다. 도슨트의 작품 안내를 기대했기 때문이고 더구나 그 안내자가 존재론과 감응의 철학자 이진경 이었던 까닭이다. 아마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번역판본의 양적인 측면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순위에 있는 작품일 것이고, 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읽었음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제 이 작품 읽기에 대한 내 감응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판본으로 그 미진함의 미련을 버리려 한다.
해설자는 이 작품을 ‘앨리스의 놀이 정신’으로 정의하며, “놀이에 대한 책”이자 “놀이에 의한 책”이라고 설명을 시작한다. 앨리스가 놀이의 주어가 아니라 대상이 되었다가, 놀이의 주어로서 그 위치를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야기의 왕래를 일컫는 것 같다. 어쨌든 도슨트는 이 놀이에서 중요한 건 “열린 공간과 개방성” 이라며, 느슨하거나 부재한 놀이의 규칙, 바꾸거나 슬쩍 새로 만들 수 있는 규칙의 개방성과 어떤 장치나 도구에 의한 제약 없이 무수한 창조가 가능한 열린 공간을 열거하고 있다.
즉 이 동화는 “뜻하지 않은 일들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바로 이 예기치 못한 일에서 마주하는 사건을 “새로운 길이 열리는“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정신이라 읽고 있다. 들뢰즈도 이 작품을 ‘의미와 무의미가 얽힌 즐거움의 요소들을 모두 갖춘 한바탕 놀이’라 평하기도 했다. 굳이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비평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놀이’에 대한 동화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도슨트는 앨리스가 엮여 들어가는 놀이의 규칙의 없음과 유연성으로 놀이를 정의하고 있는데, 이에는 보다 섬세한 놀이 성격에 따른 정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규정이 요구되는 이유는 다른 해석에 도달케 하기 때문이다.
놀이가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놀이에 규칙이 없거나 부재한 것은 아주 예외적 놀이로서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나 동화 속 앨리스에게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특정 역할을 맡게 되는 것처럼 감정이나 허구가 곧 규칙이어서 어떤 기준으로서의 규범이 없는 경우이거나, 일종의 홀림이나 현기증과 같은 환각 상태에 의한 착란과 혼란의 추구와 같은 환상 상태에서의 놀이 경우에 한정 된다. 이처럼 규칙 없이 감정이나 허구, 환상을 즐기는 놀이를 프랑스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규칙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놀이와 구별하여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와 ‘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앨리스가 참여하고 있는 동화 속 상황을 놀이라 한다면, 그것은 흉내와 홀림의 놀이라는 예외적 놀이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된다.
동화에는 약속(규칙)이 있는 놀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공정하고 평등함을 전제로 하는, 즉 불공평함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규칙이란 것이 설 자리가 없는 상황들만이 연출되고 있다. 일례로 도도새가 제안하여 하게 되는 코커스 경주처럼 출발하는 위치도 모두 다르고 도달지점도 제각기여서 그저 달리다 멈추고 싶으면 끝나는 그야말로 승패도, 목적도 없는 놀이가 있으며, 하트여왕의 명령에 의해 치러지는 크로케 놀이도 골문이 카드병정들이 허리를 굽혀 만들어 어떤 고정되거나 정형성도 없으며, 공 또한 움직이는 고슴도치이고, 타구봉도 홍학이어서 그 참가자의 그 어떤 의지도 반영되지 못할 뿐 아니라 특정한 규칙도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이 작품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즉 소질, 노력, 근면, 보상이 무의미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며, 책임의 고통이나 기억의 부담 등 현실 세계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할 놀이 또는 환상 놀이를 창의성이나 창조성으로 직접 연결짓는 해석은 과도한 건너뛰기로 보인다. 특히 토끼를 따라 굴에 들어갔다가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작은 병 속 액체를 마시고 커졌다 케이크를 먹고 작아지며, 키가 너무 커져서 멀어진 자신의 발에게 선물을 보내는 상상처럼 다분히 환각적이거나 어떤 홀림 상태를 보여주듯 앨리스의 놀이들은 모두 허구적 환상적 범주의 놀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동화는 규칙에 맞춰 생활해야하는 학교생활에서의 경쟁이나 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린 소녀의 일탈에 대한 갈망의 투사이고, 그 지루함과 압박감, 피로감의 배출이요, 순화의 실현이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창의성은 어쩌면 이러한 실현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부수적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앨리스가 경험하는 놀이는 다분히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의 일종의 탈출로 보인다고 해야겠다.
두 번째 관점은 이 작품의 구성을 신체적 놀이와 언어적 놀이로 해독하고 있는 것인데, 키가 너무 커져서 이동할 수 없게 된 앨리스가 울어 흘린 눈물이 강물처럼 방을 채워 옷과 몸이 젖어 감기를 우려할 때 생쥐가 충분히 마르게 해주겠다며 들려주는 ‘건조한 얘기’가 결코 마르게 해주지 않는다는 실망과 같이 캐럴은 이러한 관념적 언어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원 모양의 경주코스를 그저 달리는 코커스 경주를 제안하는 도도새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겁니다.”, 즉 신체를 통한 체험과 그로부터 체득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다. 사실 신체적 놀이로서의 해석은 그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않는 진부한 교훈의 무리한 도출로 이해된다.
세 번째 관점은 언어적 놀이에 대한 부분인데, 대화들에는 실제 무수한 언어 장난이 있다. 도슨트는 발설된 언어의 의미가 누구에게나 확정된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바로 이러한 규칙성의 파괴가 가져오는 말장난으로서의 즐거움을 지적하면서 규칙의 무게에 대한 ‘가벼움’이라는 놀이의 덕목을 강조한다. 그런데 규칙이 가벼운 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놀이에서 규칙의 존재여부를 지나치게 뭉뚱그려 이해하다보면 그 놀이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아주 단순한 눈 깜빡거리지 않기, 숨 오래 참기와 같은 놀이에 조차 명료한 규칙이 있다. 누가 오래 견디는가라는 개인의 순수한 능력을 척도로 한다. 이러한 능력 드러내기 놀이에는 보다 세련된 놀이들인 적절한 연습과 부단한 노력이나 성취에 대한 의지와 지속적 주의력을 요구하는 체스, 축구 등 견고한 규칙으로 구성된 놀이들이 있다. 이들 놀이의 규칙이 유연하거나 수시로 변경된다면 아마 놀이 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고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품 후반부 재판 장면은 전형적 역할놀이일 것이다. 재판 의례 형식은 있으나 그 어떤 규칙도 무용지물이어서 재판은 한 바탕 말 장난으로 끝난다. 즉 규칙의 가벼움이 아니라 규칙이 부재한 놀이어서 즐거운 것이다.)
【앨리스가 일어나자 베심원석이 뒤집어져 난장판이 된 장면, 본문 146쪽 삽화】
이와는 다른 성격의 놀이도 있는데, 아예 의지를 포기하거나 운명에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 혹은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다. 이것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경멸이 자리잡은 놀이들인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작용인 놀이다. 주사위 놀이, 윷놀이 등등의 현실에는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을 마련한 놀이들이다. 이들에게도 반드시 규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범주의 놀이를 제외하면 모두 앞서 언급한 규칙없는 흉내와 연기, 환상의 놀이들이다. 따라서 놀이에서 가벼움의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놀이는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난 놀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벼움의 놀이는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지 현실적 감각의 실제적 세계에는 적합한 의미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가벼움의 해석 때문에 도슨트는 놀이의 무력화 요인의 하나로 규칙 준수 강제장치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보다는 앨리스가 참여하는 흉내와 일종의 가면(역할)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사회적 부패가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놀이가 우연성에만 맡겨지게 되면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무차별적 평등이 되어 공정 실현 불능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놀이가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회의 스타일, 가치, 얼굴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 동화는 발표된 186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산물임을 떠나서 21세기의 가치로 이해할 때 왜곡된 해석을 가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캐럴의 활동하던 시대는 전근대적 유산인 미신과 전설, 괴담이 여전히 횡행하며 합리주의와 뒤얽혀 공존하였으며, 도덕적 엄숙주의와 허영이라는 위선도 뒤엉켜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토대로 이 작품을 보면, 작가 캐럴이 그린 앨리스의 모험 세계는 합리성이라는 규칙 놀이의 세계 대두에서 감정과 허구의 세계인 연극과 환상 놀이에 머물기를 바란 일종의 문학적 수구의 갈망 아니었을까? 라는 데 이르게 된다. 물론 일시적 도피 수단으로서의 앨리스의 모험을 구성하는 역할, 환상 놀이가 사회적 순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하지만 이것이 곧 창의성이고 정신의 자유에 토대를 둔 삶의 낯설고 새로운 길에 당당히 맞서는 적극적 유연성이라 해석하는 데에는 주춤거리게 된다.
다만 특별하게 이 작품이 내게 인식된 것은 ‘의미’의 역설이라는 언어의 다의성을 통한 타자의 세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이다. 어쩌면 작가가 마지막 문장에서 앨리스 언니의 말을 빌려 “유년 시절 행복한 여름날”을 떠올리듯, 순수한 기쁨에서 즐거움을 찾으려했던 한 때의 기억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 그 이상은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도슨트 이진경 교수의 ‘놀이’라는 화두로 인해 이 책을 이제 내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 편협한 이해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분명 앎인지 모르게 다가 올 것이라 믿는다. “정말 쓸 만한 교훈이란 게 있다면 (...) 뻔한 교훈을 깨며 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