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및 사회 조건이나 그네들의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화, 민담, 동화라는 유사성의 장르는 당대 사람들은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이해를 위한 효과적인 경로가 된다. 특히 인문학을 비롯해 문학서들은 전해오는 이들의 인용을 통해 인류라는 인간 종(種)에 대한 어떤 본질적 성격을 헤아리기도 하고 하는데, 아마 오래되었다는 고대 우화에서 토속적 민담이나 17세기부터 공식화되어 집필되기 시작한 고전동화에서 상징화되거나 은유된 양상들이 오늘의 사람들이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우화 또는 동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펴진 것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작품을 통해 일생을 삶과 죽음의 문제와 윤회와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했던 박상륭 소설가의 『雜說品』 속 발견으로부터이다. 이 장편소설은 성배(聖杯)를 안치하고 있다는 문잘베쉐(Munsalvaesche)라는 “생기를 잃어 찬바람과 대막(大莫;엄청난 적막함) 휩싸인 악취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곳”이 배경인 소설이다. 아마 그이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이해가 대중에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그나마 조금 부연 설명을 곁들여가며 다시금 인간 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풀어 반복하려했던 작품으로 여겨진다.
【박상륭 소설 『雜說品』 문학과지성사刊, 80쪽 부분 발췌】
낳지 않는 상처를 지닌 왕의 치유를 위해 불새를 찾아 떠난 시동(侍童)의 꿈 속 이야기인지, 현실 속 대화인지 모를 장황한 이야기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작가의 작품 속 칠조(七祖)로 추정되는 ‘순례자’로 불리는 노승과 ‘것 11’로 불리는 문잘베쉐로 유학 온 어느 나라 공주가 주고받는 설법을 가장한 시론에서 고대 인도의 우화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 ‘빤짜딴뜨라’로도 읽음』와 이와 동일유사 내용을 지닌 『이솝 우화』 중 하나의 이야기가 그 시발(始發)이다.
짐작컨대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한 개구리들」로 번역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씨앗 불이 되어 내 읽기의 욕망에 불을 싸질러댄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이 근심을 해소하는 것은 그것으로 찾아드는 것인데, 그것이 그저 들불로 확 번져 동화(童話)의 세계로까지 번져 페로와 그림형제, 안데르센으로 대표되는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 질서의 내면화라는 역겨운 고전동화에 반기를 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력 3세기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우화집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는 '다섯(panca) 논설(tantra)'이라는 뜻처럼 다섯 장으로 구성된 작은 이야기 논집이다. 매우 어리석고 아둔한 세 왕자의 아버지인 왕이 이들을 가르칠 선생을 찾고, 마침내 ‘위싀누샤르만(visusarman)’이란 현자가 세 왕자에게 통치학을 깨닫도록 가르친 논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치학의 개념이 이솝우화의 개구리 이야기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개구리들은 인간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못 속 개구리들은 그들 집단의 리더를 찾는다.
신은 이들에게 나무토막을 내려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말없는 나무토막의 다스림 없는 다스림에 만족하지만 이내 그 무용함으로 짜증을 낸다. 결국 신은 그 웅덩이에 뱀을 보내는데, 개구리들, 즉 이 노예근성의 피학쟁이들에게 가학적 능동성을 구비케 하려면 독사(毒蛇)로 인한 혼비백산의 허둥거림과 살기위한 극악한 발버둥만한 처방이 없는 것이었을 테다. 노승(老僧)은 말한다. “미온적, 수동적, 또는 노예근성의 피학적, 반 잠에 들어있는 질료를 독사(毒死)시키기 같은 것이 아니겠다구?” 라고. 이는 수많은 동화들에서 공주가 개구리에게 행하는 입맞춤이 바로 이같은 충격요법 이라는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人間의 저 적나라한 재림(再臨)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곧 인간 삶의 고달픔으로 안일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나무토막을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이 이야기가 노승에 의해 발설된 까닭은 황폐해져가는 문잘베쉐의 진짜 현상은 바로 이러한 독(毒)의 ‘날것-썩히기’와 ‘날것-익히기’라는 두 변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설명하며, 어떤 특정 사회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는 그 구성원의 깨우침일 것이라고 미루는 것 같다. 여기서 정치철학을 얘기할 것은 아니고, 이 야기기로부터 작금의 우리네 정치현상이 이 독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자문으로 이어졌다는 말에 그치기로 한다.
아무튼 이 기발한 인간세(人間世)에 대한 은유 이야기는 우화와 동화의 의도, 그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는데, 17세기 ‘샤를 페로’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 후반 ‘그림 형제’와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으로 이어진 ‘고전 동화(이후 이들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함)’의 그 던적스럽고 위선적이며 체제 옹호적이었던 문학적 보수주의를 띤 것들은 차치하고 20세기 전후하여 이러한 질서 수호와 강화에 이바지했던 사회정치적 조류에 반기를 내걸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작가들의 동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박상륭의 소설 속 화자인 패관(稗官)이 전하는 우화는 17~19세기 보수주의 동화의 지배질서 내면화 동기와는 다른 것이고, 이는 오히려 이들에 비판적이고 전복적 시선을 가했던, 즉 기성의 관습과 관행, 규범 일반적 담론을 변경하고자 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했던 일군의 작가들과 그네들의 동화에 고대 우화의 전통이 연결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라는 편견 때문에 그의 환상소설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던 ‘조지 맥도널드’에 대한 재발견은 내겐 앎에 대한 겸허를 다시금 환기토록 했다. 오히려 그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인간 존엄에 대한 근본적 신념의 자양분으로 작동했으며, 종교적 에피파니가 그의 동화 속 상징들과 연결되어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계발의 자극원으로 동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도널드와 함께 위선에 대한 혐오, 상층계급의 위선적 관습과 고전동화의 체제 수호적 문명화 담론에 반대하여 문명화과정의 재(再)맥락화를 시도한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와일드는 전통적 동화 담론에 개입하여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동화의 사회 미학적 경향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그는 비판 대상의 언어와 행위를 차용하여 그것이 내재한 부정과 불합리, 불명예를 지적함으로써 그것에 반기를 들게 하는 전복의 문학을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들은 고전동화가 현실 세계의 가치를 비판하고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가치에 사후적이고 우의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치고, 결코 현실 사회를 문제 삼거나 그 대안 세계나 관념들에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즉 이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등의 고전동화들은 지배 계급이 도모하는 안전한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그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고통의 내면화에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안데르센의 경우는 마치 하층 계급의 고난에 관심을 보내는 듯 하지만 결국 상층 계급이 원하는 질서에 편입하고자 그네들의 규범과 권위에 타협했다. 이는 안데르센 부류의 동화가 '부르주아의 교양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에 헌신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 속에서 작용, 인간 제반 기억 내지 판단을 왜곡시키도록 작용했다고 지적한 발터 벤야민의 비판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판의 관점에서 맥도널드와 와일드는 지배관계와 지배담론에 대해 강도 높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동화의 세계에서 이를 역전시키고 전복시켰다.
두 사람은 전통적 고전동화 담론이 분명 아이들에게 해악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배계급의 관습과 규범,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를 사회와 타자에 책임을 가지는 인간, 창조적 인간상이라는 가치로 문명화과정의 담론을 변형하고자 한 것이다. 여전히 안데르센 부류의 굴종적이고 순응적 인간을 만들어 체제에 길들이고자하는 동화가 출판과 영상 시장에서 활개 치는 세상이지만, 왜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음을 멈출 수 없게 하는지에 대해 자성의 필요를 요구하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맥도널드의 동화 한 편을 읽는다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가벼운 공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푼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반영한 패러디 작품이랄 수 있다.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왕과 왕비에게 늦게나마 공주가 태어나지만 아기를 태어나게 도와준 마녀에게 이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중에 떠다니는 가벼움의 마법에 걸린다. 이 과정에서 맥도널드는 관습적 사회질서와 사회관계를 희화화하는데, 왕실 형이상학자들은 바보로, 전형적 왕자는 푼수 짓으로 조롱당한다. 그럼으로써 상층계급의 어법과 규약의 가면들을 벗겨낸다.
떠다니는 공주의 가벼움, 공주는 중력(重力)을 체득하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력은 사회적 책임과 연민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중력은 추상적으로 강요하거나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경험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수영을 통해 이를 알아간다. 이때 왕자는 수영장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물속에서 물마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주는 물속에서 물마개를 하는 왕자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사회적 책임과 연민을 말하고 있지만, 여성과 남성의 역할도 전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의 행동양식 등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인식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아마도 「라푼젤」을 읽는 아이와 「가벼운 공주」를 읽은 아이는 자기 성의 행동양식이나 사회관계에서 많은 사유와 행위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맥도널드의 작품으로 「황금 열쇠」라는 내면세계의 탐색을 떠나는 상징 여행의 이야기가 있다. 남녀 상호존중과 상호의존 관계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구축토록 하는 정말 아름다운 동화다. 인생의 진짜 보화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는 통찰의 실현을 약속해주는 다른 세계가 있는 길로의 안내이며, 유토피아적 성적 탐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도널드는 상상력과 도덕적 위력의 끊임없는 발휘를 재촉하여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적 명성에 연정을 품고 권위와 지배 계급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적이었던 안데르센의 대척점에 오스카 와일드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권위에 머리 조아리기를 거부했으며, 규범을 깨뜨리면서 잔인한 계급의 정의 체계가 보여주는 억압적 관용을 끊임없이 시험한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동화 창작의 근본 목적을 ‘전복’이라 공언했으며, 기성사회 옹호론과 결별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문제를 반영하여 변혁하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 그의 동화집 두 편인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이하 ‘행복한 왕자’로 표기함』과 『석류의 집』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오스카 와일드의 아홉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조건반사 체계를 주입하는 방식,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자에게 가하는 처벌방식의 부조리함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가 지배계급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동화집 『행복한 왕자』에는 동명의 동화 「행복한 왕자」가 있는데, 이는 납으로 제작된 죽은 왕자의 동상이다. 왕자는 비로소 높게 세워진 동상이 됨으로써 백성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 알게 된다. 생전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보상하기 위해 헌신적 제비를 통해 재물을 나눠주고 구휼한다. 결국 제비는 추운 겨울에 왕자 곁을 지키다 세상을 등지고, 시장과 의원들은 왕자의 동상을 녹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기를 갈구한다.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자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행동은 빈곤과 불의와 착취를 끝내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시는 여전히 시장과 시의원들의 지배하에 있다. 우쭐대는 이 광대들이 분명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고 왕자와 제비의 박애적 행동은 곧 잊혀지고 말 것임을 안다. 탐욕과 허세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와 질서의 근본적 변혁 없이는 결코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와일드 동화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 ‘긴장’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와일드는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문명화과정이 인간성의 퇴화에 이바지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의 작동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묘사한 동화들이 『석류 나무집』에 수록된 「어린 왕」, 「별 아이」 등 네 작품이다. 「어린 왕」 의 주인공은 염소 치는 소년이 어느 날 왕족 할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 밝혀지면서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년은 사교계의 아름다움이 노동자에 대한 잔인한 착취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대관식에 화려한 복식과 빛나는 왕관을 쓰기를 거부하고 염소 칠 때 입었던 옷과 찔레나무 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다. 구경꾼들은 왕의 허름한 모습에서 더 없는 품위와 찬란함을 본다.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장면이다.
그런데도 역시 작가는 사회적 반목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열어둔다. 한 사람의 실천으로 사회의 케케묵은 수구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열어 둠으로써 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사회관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에 대한 반성의 물음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동화는 위선적 사회 관습과 지배질서가 지닌 이중적 척도가 부당하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묘사하여 그 실체를 숙고하게 만드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울림을 전하는 동화인 「별 아이」는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역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본질주의에 대한 철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오만함과 잔인성과 이기심을 모두 갖춘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만, 그 자신이 추하게 됨으로써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후 시련을 겪고 왕이 되어 백성을 자비로 다스린다는 이야기다.
와일드는 주인공 한 사람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나는 고전 동화의 위선을 전복시킨다. 그리고는 “그러나 그는 오래 다스리지 못했다. 3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겪은 고통이 극심했고, 그를 시험한 불길이 너무 뜨거웠음이라. 그의 뒤를 이은 자(者)는 다스림에 악(惡)했도다.” 작가는 아름다움, 선의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지배관계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와일드는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을 역전시켜 새로 쓴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인어 공주」를 역전시킨 「어부와 그의 영혼」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꼬리가 다리가 될 때의 고통이 이 작품에서는 인어를 사랑하게 된 어부의 사회적 관습의 상징인 영혼의 복수로 인한 고통으로 대치된다. 성과 계급의 전복이다. 그리고 어부가 죽는 순간 비로소 인어와 하나가 된다. 안데르센이 고통을 합리화했던 기독교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나? 를 자문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성역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회화 과정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와 지배질서에의 순응을 내면화시키고자 한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부류의 고전동화의 획일적 사회화 과정에 적응시키려하는 순응주의적 동화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고전독서 목록에 자리 잡지 못하게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을 꽤나 오래 한 것만 같다.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프랭크 바움 등의 창조적 사유와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등에 대한 사유로 안내하는 동화들의 세계가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에게 낯설지만 인도를 비롯 페르시아, 그리스 등 고대 우화의 세계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드넓은 삶의 세계를 탐험하는 유익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우리네 인간이 사는 지상의 현실계임을 말하며, ‘몸->말->마음’을 토대로 하는 인간의 진화론적 틀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咄, 小說하기의 雜스러움!”이라 수없이 반복하여 뇌까려야 했던 한 작가의 잡설이 이렇게 전복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했다. 독서란 어쩌면 이렇게 널뛰는 정신의 방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앎의 세계를 거닐게 되고, 아주 작은 앎의 지평이 조금 축적된다. 아마 지배 질서에 켜켜이 내려앉은 곰팡이를 제거하는 데는 동화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으리라. (咄, 讀書하기의 雜스러움이란!)
“사회적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은 우리를 에워싼 회색빛 세계를 벗어날 출구를 보여주고, 창조적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화의 위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출판과 영상시장에 감시를 게을리 하는 순간 우리의 아이들은 길들여지고 체제에 순응하는 이솝의 왕을 요구한 연못 속 개구리들처럼 우리의 세계는 나락으로 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