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 중 16편에 대한 주요 문장 발췌와 당해 작품에 대한 엮은이의 간략한 해설로 구성된 편역(編譯)집이다. 역자는 안데르센의 작품을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 열린 해석을 독자의 감정과 생각에 맡기고 있다. 사실 나는 매 작품마다에 서술된 역자의 해석에 부분적으로 동의하기도 하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 전반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편역자인 북큐레이터 박예진이 프롤로그에서 잠시 언급하듯 안데르센은 ‘자서전 작가’라는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그의 동화들은 그의 생애 전반을 잠식했던 사회 지배계급에의 편입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비천한 신분적 출신의 한계와의 간극에 대한 분열적 고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작품 해설에서 안데르센의 작품들이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행위를 지적하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피지배민들의 노력과 인내의 가치를 강조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그가 살던 사회의 모습을 투영해서 잔혹한 현실을 동화로 녹여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위의 해석에 절반만 동의하는데, 이 같은 의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안데르센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거나 시정하기위한 대안적 지향을 결코 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그가 그려낸 동화는 이러한 비판대상을 오히려 근접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만 삼았으며, 나아가 지배권력의 윤리와 태도들을 정당화하려는데 목표를 둔 어린아이는 물론 대다수 시민계급의 성원에게 유해한 이야기들에 훨씬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전기 작가인 ‘엘리아스 브레스도르프’는 이 덴마크의 동화작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실제 생활에서 그는 체제를 구성하는 계급 구조를 받아들였고, 경외하고 숭배했으며, 귀족들에게 인정받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유별나게 즐거워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민속학자 ‘벵트 홀베크’는 “안데르센은 남성에 의한 억압에 초점을 맞추는 민담을 지배를 찬양하는 민담으로 변경했으며, (...) 민담의 내용을 교묘하게 은폐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심하게 방해”했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안데르센의 동화는 사회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엘리트 계급의 질서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내면화시키는 의도로 점철되었으며, 작가 자신 또한 부르주아 엘리트 계급이 표방하는 대의에 헌신하는 겸손한 신하로서 교훈을 주겠다는 목적임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을 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이들 정치기준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기도 하다.
아동문학 전문가인 미네소타大 ‘잭 자이프스’ 교수는 1836년부터 1875년까지 안데르센은 “본질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동화 문학의 고전목록을 구축한 작가”이며,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동화 속에 주입했고, 지배 권력으로부터 좋은 하인이라는 인증서를 받을 수 있었던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본질주의 이데올로기란 온갖 사회적 위계질서의 근거로 생물학적 질서라는 초월적 원칙만을 인정하며, 사람들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 지능과 언어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용어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안데르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순된 감정으로 작동하는데, 자신의 열등한 출신과 사회지배 체제의 이념과의 부조화에 대한 강박적 고뇌가 그의 모든 동화 작품들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동화는 아이들의 삶에서 중대한 문화적 사회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으로 주입되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추적 사유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이해와 삶의 태도를 위한 교훈으로써 동화를 읽어주거나 읽도록 권장한다. 그런데 하나 중요한 오해가 있다. 동화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텍스트라는 이해이다. 결코 동화는 시대를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윤리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화는 그 발생과 성장 초기부터 당대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에 유리한 윤리적 태도를 사람들에게 주입, 내면화시키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이다. 안데르센도 이로부터 예외적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안데르센의 156편 작품 모두를 낱낱이 분석 비평한다는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일 뿐 아니라 지면이나 시간적 여건도 없기에 이 책에 수록된 몇 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물기로 한다.
책은 <인간을 파멸시킨 욕망>, <목숨과 맞바꾼 사랑>,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마법>, <사유에 묻히게 하는 철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잔혹 동화’로 네 분류하여 각기 네 편씩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에서 보듯 편역자는 안데르센의 작품을 ‘인간에 대한 보편성의 윤리’로 해독하고 있는 듯하다. 위에 서술한 나의 비판적 시선에서는 안데르센의 작품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피지배계급의 담론을 사회적 담론으로 결코 승화시키지 않고 있다고 보기에 이러한 보편적 분류에 반대한다.
제 1장(Part 1)인 <인간을 파멸시킨 욕망 잔혹동화>에 편성된 작품 중 하나인 「돼지치기 왕자(The swineherd)」를 역자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인간관계에서 지위, 경제력 출신 사이 경계를 선명히 보여주는 것을 비판하는 은유가 담겨”있다고 확인하고 있다. 오만한 공주와 공주에게 거절당한 돼지치기가 된 겸손한 왕자의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돼지치기와 공주의 에피소드보다는 마침내 공주와 혼인하게 된 돼지치기 왕자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안데르센은 여성의 복종과 순결, 침묵의 강요라는 당대 부르주아 엘리트 계급이 요구하는 예법의 내면화를 의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돼지치기라는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고 타고난 우아함을 드러내는 왕자와 달리 공주의 무례함을 묘사하며, 공주를 물속에 세 번이나 처박아 순종하는 여인, 침묵하는 여인으로 재탄생시키는 장면은 이 책의 발췌문장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공주를 물에 빨아 새롭고 순결한 여성으로 만드는 은유일 것이다. 안데르센은 이 작품에서 지위 경제력 경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여성의 순응성을 예의의 덕목이라고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보편성의 인간 윤리를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지배 질서를 주입시키려는 의도의 작품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작품일 것이다.
"The little mermaid drank the magic potion, and it felt as if a two-edged sword were passing through her delicate body." (인어공주는 마법의 약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섬세한 몸을 날카롭게 칼날이 통과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 「인어공주」에서
제2장 <목숨과 맞바꾼 사랑 잔혹동화>중 한 작품인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실연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독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인어공주는 상층계급의 일원으로 온전히 인정받고 싶어 했던 스스로의 욕구를 부정해야만 하는 안데르센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이라는 평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인어공주는 마음을 빼앗긴 왕자인 지상의 인간처럼 물고기 비늘로 덮인 꼬리가 아니라 두 다리를 원한다. 즉 이는 피지배층 성원이 지배층 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은유이다. 그녀는 마녀와의 거래로 혀와 꼬리를 잃는 대신 다리로 변형되는 고통을 감내한다. 다리는 칼날 같은 아픔을 준다. 이 또한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성원이 될 수 있다는 고귀한 미덕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의 감수를 의미할 것이다.
피지배층의 존재인 인어공주가 자신의 목소리와 현실적 권력을 잃음으로써 행복과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고, 왕자가 그녀와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그녀는 물거품이 될 운명이다. 왕자는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어 인어공주는 죽을 운명이 되고, 언니들은 동생의 죽음을 막기 위해 왕자를 죽일 칼을 건넨다. 왕자를 죽이면 인어공주는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일 기회가 있으나 그를 살려주고 자신은 물거품이 된다. 300년의 선행을 한다면 다시 환생할 수 있다는 조건만 믿으며.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축복 속에 공기 같은 존재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이 행위는 대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존재들과 섞이기 위해 사실상 자멸한 것인데, 다시 자신의 옛 삶의 거처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류 계급에 속하고자 하는 갈망이 삶의 지속성을 넘어서는 욕망인 것이고, 결국 상층 부류에 대한 희망, 즉 300년의 선행이라는 조건, 귀족이나 상류 계급은 분명 실천하지 않는 가치들을 수행해야만 하는 터무니없는 지배질서의 요구에 복종한 것이다. 스스로의 욕구를 부정해야만 얻을 가능성이 있는 지배계급의 윤리를 정당화하는 추악함이 슬픈 사랑이란 표면적 이야기로 은폐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생을 이 같은 모순의 지대에서 갈등했던 안데르센의 자기 처지에 대한 투사라는 독해가 가능한 이유이다. 아무튼 안데르센의 동화는 한결같이 이러한 지배질서에 대한 복종과 순응성의 내면화를 벗어나지 않는다.
제 3장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마법 잔혹동화>에는 ‘부시깃 통’으로도 번역되는 「부시 통(The Tinderbox)」이란 작품이 있는데, 역자는 “인간의 탐욕적 본성에 관한”작품이라 쓰고 있는데, 자신을 부유하게 해준 마녀를 죽이고, 왕과 왕비를 백성 들 앞에서 죽이고 공주와 혼인하여 왕국을 차지한 한 병사의 이야기다. 나는 이 작품을 안데르센의 일생을 관통하는 본질주의 신념의 끝판왕같은 작품으로 읽었는데, 당대 지배계급의 권력을 보장해주었던 적자생존의 메시지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센 놈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사이비 진화론인 사회진화론을 정당화하는 이 본질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정말 역겨운 것이라 할 수 있다. 3장의 분류에 포함된 한 작품을 추가하여 말하자면 「길동무 (The traveling companion)」 라는 작품도 전형적인 본질주의 이데올로기 주입을 목적으로 한다. 역자는 이 동화를 “대가없이 베푼 선행의 보상에 대한 이야기”라 해석하고 있는데, 내겐 표피적 감상으로 여겨진다.
이야기는 요하네스란 인물이 죽은 자의 빚을 갚아주어, 그 죽은 자가 요하네스의 길 떠남에 동행인이 되어 그의 욕망을 실현시켜준다는 내용이다. 또한 역자는 “모험을 통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라고 읽고 있는데, 하나 묻고 싶다. 주인공 요하네스가 마주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그 스스로 한 일이 있는가? 그가 한 일은 없다. 단지 요하네스가 미덕의 이름으로 하는 행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나오는 낯선 이의 명령에 따른 것 뿐이다. 즉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한 일 뿐이다. 주인공은 결코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제하는 주체적 인간이 아니며 수동적이고 굴종적이며 순응하는 인간이다.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안데르센의 이야기들 속 주인공은 단지 그들을 선택하고 시험하는 상부 권력에 부합하는 순종의 미덕에 대한 시험에 적합해야만 하는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예외없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윤리를 정당화하는 체계를 충실하게 지키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제 4장 <사유에 묻히게 하는 철학 잔혹동화>에 포함된 「미운 오리새끼(The ugly ducking)」도 비판의 시선을 벗어나기 어려운 작품이다. 역자는 “미운 오리 새끼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노력이 아닌 혈통 덕분이라며 비판하는 독자들도 존재”한다고 열린 해석이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혹독한 인생에도 언젠가는 봄이 찾아온다.”며 희망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혈통 덕분이라 단순히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안데르센의 본질주의는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타고난 것으로, 이는 곧 사회 계급의 변동불가능한 표시라는 믿음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비록 비천한 가정 출신이지만 본질주의의 개념처럼, 즉 자신은 미운 오리새끼가 실은 백조라는 고귀한 새인 듯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생주의를 확인하는 작품으로 상류 계급으로의 진입을 염원하며, 그 상층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것이다.
열등한 종인 오리 무리들은 아기 백조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안데르센 자신의 처지처럼 무수한 고난을 겪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의 본질적 위대함을 깨닫는 백조의 모습은 곧 안데르센 자신의 투영인 셈이다. 아기 백조는 백조들의 우아한 무리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난 저 고귀한 새들에게 날아갈 테야. 나같이 못생긴 새가 감히 접근한다고 나를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 겨울철에 떠돌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
백조(안데르센)는 평민들의 운명에 대해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상류 계급에 모욕당하는 것이 하층 계급 사이의 고난보다 낫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백조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가치와 미학적 기준은 아름다운 정원에 살고 있는 왕족 백조들과 함께 올바르게 처신하는 존재들이 세워 놓은 것이다. 귀족 감성에 호소하는 분명한 계급적 편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고전적 인종주의적 경향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말처럼 한낱 혈통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지배권력에 굴종적으로 아첨하는 안데르센의 비굴함과 비천한 욕망을 아이들에게 내면화시키려 하는 그 의도가 불순하고 윤리적으로 유해하기 때문이다. 아마 안데르센의 작품 중 가장 나쁜 동화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몇 몇 작품에서는 부패한 권력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사라진 사회상에 대한 솔직한 비판이 담겨 있기도 한다. 「성냥팔이 소녀(The little match girl)」와 같은 추악한 사회에 대한 직설적 고발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은 이러한 비판 대상의 종식이나 질서의 변혁을 향한 도모가 아니라 단지 사실의 진술에 멈추고 만다. 특히 안데르센의 작품 속 비판은 언제나 상류 계급에 대한 존경심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상쇄되고, 도덕적 분노대신 도덕적 타협을 선택하며, 피지배자들을 굴복시키는 권력 체계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시선에 머물고 만다. 그는 생애 내내 예속 상태의 토대 위에서 허위의식을 정당화하는 노력으로 점철 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능을 훈련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사용가치로 전환코자하는 시민예법 양성에 목표를 두었던 이 19세기 덴마크 동화작가의 작품들은 복종을 거부하면 천하게 여겨지거나 배척당한다는 것을, 예법이란 자기 부정이라는 고뇌를 견디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의 힘과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증명으로서의 글쓰기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무조건적으로, 아이들이 읽어야 할 고전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에는 반대한다. 아이들에게 순응성과 굴종을 내면화시키려는 글은 그 어떤 것이라도 유해하다 할 것이다. 편역자의 덕분으로 미뤄두었던 안데르센 동화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역자의 발췌와 해석을 통해 왜 여전히 이 시대착오적 동화가 읽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부정성의 경계를 지적한 편역자의 열린 견해에 공감한다. ‘문장의 기억’ 시리즈 두 번째 책을 제공해 준 펴낸 곳 센텐스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