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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입문 -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 필독서
롤라 유네스 지음, 이영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평점 :
사실 무수한 책들에 비트겐슈타인이 호명되고 인용 서술되고 있지만, 그 친근한 이름만큼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역설적으로 매우 천박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진실한 목소리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전 출간된 저술은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로 표기함)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의 후기작인 『철학적 탐구』(이후 ‘탐구’로 표기함)는 사후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된 책이고, 여타 사후 출간물들 역시 그의 의지와는 다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논고』만 하더라도 어떤 일관된 중심을 향해 서술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어 비철학도는 물론 철학자들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한 저술이 아니기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아마도 대중적 담론으로 얽혀들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1918년에 집필이 완료되고 1922년 출간된 『논고』는 1929년 7년전 출간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케임브리지大는 박사학위 수여논문으로 심사한다. 심사위원인 ‘G.E 무어’와 ‘B.러셀’에게 심사청구자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선생님들이 〔논리-철학 논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전언되는 이 익살극의 한 장면은 『논고』의 이해가 녹록치 않음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다른 철학자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이 풍경이 낯익다. 나 자신이 이 근방에 와 본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이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는 “진의를 파악했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저 문자에 머무르기로” 한다. 저자 ‘롤라 유네스’는 이러한 정직성을 토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글에 접근하기 쉽게 하는 열쇠들을 주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글에 몰입하도록 자극한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총 5장으로 구성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중기, 후기라는 연대적 설명과 함께 『논고』를 중심으로 『탐구』, 『소품집』, 『노트북』, 『청색 책』, 『갈색 책』, 『확실성에 대하여』를 비롯한 기타 논문들을 망라하여 윤리와 미학, 수학과 문화에 대한 태도, 자연사적-인류학적 접근, 말기의 인식론에 이르는 광활한 사유지대를 요령있게 소개하고 있다. 제1장은 「한 순회 철학자의 여정」이라 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삶인 전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레이 몽크(Ray Monk; 영국 사우스햄턴大 철학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평전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 에 의존한 것이기에 여기에 서술하는 것은 배제키로 한다. 다만 이 철학자의 성자(聖者) 또는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는 희망을 일생 실천하려는 의지로서 전장(1차 대전)으로의 자원입대에서부터 병원 포터, 실험실 조수, 수도원 정원사, 벽지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일상들은 이 천재 철학자를 더욱 경이롭게 바라보게 했음을 부언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제 2장은 『논고』를 중심으로 한 전기(前期)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것이다. 롤라 유네스는 『논고』를 “자기의 생각들을 신탁이나 일기예보처럼” 전한다고 평하며, “자신의 의견을 마치 차르의 칙령인양 표명한다.”고 한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부가한다. 내게는 『논고』 읽기를 몇 차례 시도하다 그 주장에 대한 논증도 설명도 상상할 수 없어 포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문장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글과 글들로부터 무엇인가 의미를 연결하거나 소기의 목표한 상상에 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렇듯 망망대해에 떠있는 듯했던 막막함에서 구제해준다. 『논고』 는 한 마디로 “생각에 한계를 그어주는” 작업이다. 사유의 한계를 탐구하기 위해 언어의 한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논고』에서 몇가지 중요한 핵심적 사유의 하나는 세계와 사실에 대한 개념의 이해가 될 것 같다. 대상들의 결합인 사태와 사태의 존립을 긍정하는 사실과 부정하는 사실, 이 두 유형의 사실들이 합쳐져 현실을 이루며 전체 현실이 세계라는 이 진술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초적 토대임을 확인한다.
또한 인과적 필연성의 관념을 거부하고 그 믿음은 미신에 불과함을 역설하는 것이 곧 엄격한 과학의 인식론적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롭게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 부정의 배경을 이해하게 된 것도 이 책의 도움이고, 결국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중심 문제인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 사이의 구별, 즉 무릇 생각될 수 있는 것은 표현 될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오직 보일 수만 있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논고 4.16)는 좀처럼 명료성을 얻지 못했던 문장을 비로소 풀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예전에 읽어나가면서 매우 애먹은 부분이었던 ‘사이비 명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고유의 이해를 얻게 된 것도 이 책으로부터의 수확이라 해야겠다. 『논고』 는 하나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라는 측면에서 형이상학적 명제들에 있는 모종의 기호들이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야 분명하게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번하게 말하게 되는 동어반복이나 모순들이 이미 명제의 한계적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말들이 가능성은 갖추고 있으나 뜻은 비어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이 말은 현실의 그림이 아니고 아무 것도 모사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말들은 실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는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지 사실에 속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표현하는 무력함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따라서 이 철저한 사실의 철학자에게 도덕적 심미적 가치의 그 어떤 표현도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가 된다. 이처럼 가장 깊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하며, 결국 철학적 문제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해소될 뿐이라 말하며 철학적 종언을 고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언어 논리에 대한 명료성의 천착으로 기성의 철학들이 언어 논리의 오해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은 많은 철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으리라. 특히 틀뢰즈는 이에 대해 강한 비난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의 저술 『A에서 Z까지』에서 철학의 암살자라고까지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그 자들 (...) 나에게 그것은 철학적 파국입니다. 그것은 철학 전체의 퇴보입니다. (...) 그것은 매우 슬프게도 비트겐슈타인 사건입니다. (...) 그것은 거대하게 건설된 빈곤입니다. (...) 그들이 승리하면, 철학은 암살될 것입니다. 그들은 철학의 암살자입니다.”
들뢰즈가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인 듯한데, 비트겐슈타인은 후일 들뢰즈가 하는 내재성의 철학에 대한 철저한 거부 위에 세워진 철학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철학 발견의 가장 전형적이고 일관성 있는 예시들을 제공했다는 것이고 들뢰즈 또한 이 토대위에 있었음을 알지 못했으리라는 ‘부브레스(Bouveresse)’의 비평은 맹점(盲點) 혹은 소외가 모든 이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믿음과 신뢰에 대한 문장을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 “지나친 의심은 그 의심을 죽인다. 어떤 사실도 확신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말뜻도 역시 확신할 수 없다”는 『확실성에 관하여(§114)』의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또한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말의 중대함을 다시금 다지게 한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쓰임’이다. 그리고 때때로 한 낱말의 의미는 그 소지자를 가리킴으로써 설명된다.” - 『탐구』, §43
『논고』의 철학이 실재와 충돌하는 방법론적 요구라면 『탐구』는 삶의 세계라는 거친 대지로 돌아가려는 의지라 구분할 수 있다. 즉 『논고』가 사태의 존립을 주장하는 하나의 언어놀이였다면 『탐구』는 언어가 얽혀있는 활동들 전체로서 언어놀이에 대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부이며, 삶의 형태의 일부라는 것과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맥락과 비언어적 활동에 의존한다는 것을 부각하려 한 저술이란 것이다.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맥락 - 활동들, 행동들, 실천들 - 속에서 상상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확한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통한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놀이 내에서 그 낱말의 쓰임에 의존하고 언어놀이는 삶의 형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탐구』에는 독특한 개념어가 등장하는데, ‘가족 유사성’이라는 낱말이다. 이를테면 카드놀이, 공 놀이, 장기류 놀이 등등을 모두 ‘놀이’라 부른다. 이 놀이라는 낱말이 어떤 공통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사성, 근친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을 가족 유사성이라 부른다. 결국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말의 반복이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그저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문장이 출현한다.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 철학은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걸린 마법에 맞서는 하나의 투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철학자를 마비시키는 물음들에서 정신을 해방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개념의 본질에 대해 헛된 기획임을 주장하는 즈음에서 철학자들은 발끈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하게 되는데, 언어의 쓰임과 그것에 대한 이해는 공유된 삶의 형태에 공통된 행동과 실천에 의존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여타 소집단들의 사용 언어의 의미는 얼마나 다른가, 또한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다른 맥락에 의존하고 있는가는 정당간의 자기 말만 쏟아놓는 불통의 TV장면의 예시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 편에선 능력에 따른 처우가 정의라 하고, 다른 편에서는 소외된 약자에 대한 사회적 가치의 재분배를 정의라 한다. 다른 맥락과 다른 삶에 기초한 동일한 낱말은 서로 다른 뜻을 지닌다.
우리의 몰이해의 한 가지 주된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쓰임을 일목요연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탐구 §122)이라 주장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대중화하는 것에 살아생전 극구 반대한 오스트리아 철학자의 의지에 반해 그 의지를 해독하려는 노력인 이 저술을 비트겐슈타인이 보았다면 아마 안돼!라고 외쳤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의 생략적이고 단편적인 글로 인해 읽기를 포기했던 수많은 대중 독자들에게 목마름을 이 책은 상당부분 가셔준다. “주장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정원사의 진흙 투성이 손으로 장미를 더럽히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 귀족적 미학의 철학자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가려진 길을 안내해주는 그야말로 명쾌한 입문서이자 개괄(槪括)서라 할 수 있다. 200쪽 남짓의 작은 책자에 꼭 필요한 주요 내용을 누락없이 밀도 높고 수월하게 이해토록 돕고 있는 몇 안 되는 낭비 없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읽고자 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