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특별 한정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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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풍부한 서사가 있는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기 때문인데, 아마 나도 모르게 외로웠었는가보다. 짧은 소설들을 피해 비교적 호흡이 긴,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길지않은 작품을 고르다보니 익숙한 최은영 작가의 4세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의 화자(話者) ‘(지연)’는 바닷가 할머니가 계신 희령이란 곳에서의 열 살 무렵의 추억을 더듬는다. 어린 자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열었던 할머니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하는 지연은 새로운 직장인 천문대의 근무를 위해 희령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지연은 서른두 살이다.

 

지연은 결혼을 파탄으로 몰아대곤 이유를 지연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외도에 대해 죄책감이라곤 없는 남편과의 이혼을 자기 존재가 부정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희령으로의 이동은 이러한 존재박탈이라는 자기부정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삶의 분투이기도 하다. 지연은 아파트와 마트에서 수차례 할머니와 마주치지만 할머니가 다가와 아가씨 내 손녀를 닮았어, 이름이 이지연인데라는 조심스러운 인사말이 오기까지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그녀를 이끄는 무엇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희령이란 장소가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조금씩 열리는 마음의 문과 함께 희령이 곧 지연으로부터 거슬러 세() 세대 여인들의 기억의 뿌리, 그네들 삶의 역사를, 살아갈 용기를 품고 있는 장소로 드러남으로써 모순은 와해된다.

 

이 어색한 만남 이후 조금씩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며, 할머니 영옥이 들려주는 지난 삶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증조모 삼천이, 증조모의 벗인 새비 아주마이와 그녀의 딸 희자, 그리고 새비 아주바이, 증조부, 고조부, 피난길의 안식처가 되어 준 명숙 할머니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땅에 서린 곡절의 시간을 관통한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사랑과 몰이해, 강요와 속박의 굴레를 체념처럼 껴안고 살아야 했던 증조모, 할머니, 엄마 세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지녀야만 했던 여자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생의 유일한 믿음이 되어주었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여인네들의 무한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드넓은 강처럼 유유히 흐른다.

 

39년생인 할머니는 개성 태생이다. 할머니의 엄마인 증조모가 들려준 할머니의 기억과 그녀가 간직한 한 장의 빛바랜 사진 속 증조모와 그녀의 친구 새비 아주마이의 모습, 증조모 삼천과 새비가 주고받았던 한 묶음의 편지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지연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삶의 태도와 방식의 길이자 빛을 뿌려준다, 그것은 전쟁 전 구습에 매여지내야만 했던 여인네들의 신산한 고립과 고통의 이야기들이며, 전쟁 속 피난시절의 여인들만이 나누던 마음 깊이 깃든 애정의 순간들이다.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사회의 냉혹함과 인간들의 폭력성, 생존을 위해 병석에 누운 엄마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가 그녀의 고통에 무관심과 백정을 구원했다는 보상심리로 일방적 권위만 강요했던 증조부의 좁아터진 이기심과 갈등한다. 또한 전쟁 후 기만적 중혼(重婚)으로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던 할머니, 허겁지겁 삶의 도피처로 결혼을 했던 엄마의 체념적 이야기와 더불어, 그런 엄마조차 딸에게 남자의 바람조차 여자의 태도에 있다는 근거없는 뒤집어씌우기가 곤혹스럽게 현재의 이야기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지연의 이야기들과 그 속살을 교환하기 시작하는데, 지연의 언니 정연의 어린 죽음으로 고통을 겪던 엄마 앞에서 지연 자신의 슬픔은 발설되지 못한 채 심연에 묻어두어야 했던 고통이 되었음과, 아마 이로부터 비롯된 모녀의 감정적 충돌이 여자의 삶에 씌워진 굴레의 서로 다른 이해로 변주되어 여자의 삶이라는 전체적 성찰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읽으면 자칫 여성주의의 소설로, 남성의 가부장과 유교적 권위주의의 비판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범주에 갇힌 읽기를 거부하는 작품의 면모를 읽을 수도 있다. 삼천의 남편인 지연의 증조부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보이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무관심과 무시로, 자기 가계(家系)에 몰두하는 인간이니 위선적 인물로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증조부의 친구인 새비 아주바이로 등장하는 남자는 어떤 경우에도 남위에 올라가서 주인 노릇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처럼, 배려와 약자인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보내는 인물이다.

 

또한 증조부를 설명하는 증조모의 말 속에도 남성의 권위적 표시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품성, 인격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며 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평생 몰랐던 자기 무지와 성찰적 인간이 아니었음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현재의 지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천문대에서 그녀가 수행하는 데이터 정리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사정(지연의 이혼)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라는 상대 직원의 말에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내게 전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처럼, 세상을 보며 어떤 사건의 양태를 하나의 관념으로 단순화하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무수한 진실들을 사라지게 하고서는 단 하나의 이해로 세상을, 인간을 판단하려 드는 어리석음, 그 무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음으로, 몰이해로, 무관심으로, 나아가 배제와 무시,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양태의 가장 위선적인 장면을 보게 되는데, 지연의 이혼 사실을 친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으나, 삼촌 딸의 결혼식에서 만나게 된 가족들의 모임에서 지연의 결혼 생활을 묻는 질문에 일 년 전 이혼했다는 사실을 발설 할 때이다. 이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삼촌이란 인물이 형수라며 지연의 엄마를 낮추어 호칭하며, 조카의 이혼을 조롱의 화제로 비아냥대는 것인데, 지연은 형의 아내인 지연의 엄마에게 형수님으로 호칭을 제대로 부를 것, 그리고 이혼은 당신들에게 알릴만한 개인적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삼촌이란 인물의 내심에 자리한 조잡한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조카인 지연이 겪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재하는 인간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것, 여전히 이 사회는 구태를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실상의 강렬한 스틸-컷 같다.

 

이러한 관념의 단순화 욕구가 파생시키는 공감부재, 무지, 편협성, 판단오류는 인간 모두에 두루 편재하여 인간 세계의 유대를 폭 넓게 파괴하는 중대한 요인일 것이다. 소설은 물론 이러한 관념적 오류와 낡아빠진 신분제나 가부장적 권위의 불모성과 폭력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는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어쩌면 모성 신화에 심어둔 거짓 이야기들을 전복하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 어느 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듯, 아이에 대한 사랑은 엄마의 본성에 억지로 꿰맨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근심에서 자라는것임을, 자기감정에 진실한 어느 순간 다가오는 것일 뿐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장면이 딱 세 장면이 있는데, 모두 무조건인 사랑이 서로 무한히 교환되는 그런 공간이자 시간에 관련된 것이다. 특히 피난길의 고생을 면하게 해준 새비 아주마이의 고모인 명숙 할머니의 작은 집에서 증조모 삼천네, 새비 아주마이, 할머니, 희자, 다섯의 여자들만이 어우러져 모처럼 조촐한 술상을 앞에 두고 해맑은 애정의 몸짓들을 발산하는 순간이나 삼천의 딸 영옥이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마다 절제된 침묵의 여인인 명숙 할머니가 귀 기울여 듣는 양상이다. 그리곤 전쟁이 끝나고 증조부의 자기 피붙이들이 피난한 장소라는 희령으로의 이주 고집으로 삼천과 새비네의 이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삼천과 새비가 재회하여 바닷가에서 공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사실 여자들만의 이 이미지가 왜 낙원처럼 여겨졌을까? 그 해맑은 자유의 정경, 어떤 구속도 없는 그네들의 때 묻지 않은 사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찰나의 포착이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도입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 그녀가 보관해 온 편지들과 사진,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역사에 회의적 심정을 밝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 살아났다.”로 변화한다, 지연은 엄마와 갈등으로 단절한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증조모의 이야기로 거슬러 자신의 직계 여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며 삶을 살아가는 길, 그 길을 비추는 빛을 따라 나아간다. 더 나아지는 모습, 더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 부정당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조바심 서린 두려움에 장악된 자신의 반면교사들을 보았던 것일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향해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곤 하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편리하게 타인과 세상의 일을 단 하나의 관념으로 축소하여 그것이 곧 진실이라 판단하곤 하는가? 그 사이에 수많은 진실들이 빠져나가버리고 편협하고 고루하며 알량한 쭉쟁이를 들고선 인간의 추레함이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알지 못했던 소설 속 지연의 증조부로 대표되는 인물이 어쩌면 우리네들의 일상적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말이 너무 생소해서 나는 순간 움칫 거렸다. 앞으로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우리들은 어떤 이유도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렇듯 우리 역시 이유없이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때 삶은 아마 풍성한 의미로 다가 올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우선 1945년 이전의 개성을 배경으로 한 식민지민의 삶, 제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던 신분제와 남녀의 차별, 그리고 전쟁과 피난길, 피난지 대구에서의 여인들의 생업과 애환, 전쟁 후 현재에 이르는 질기게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 등 이야기를 구성하는 풍부한 소재들과 무엇보다 갈등하기도 하지만 여자들만의 고 고유한 유대와 압도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꿈길을 걷듯 안락한 즐거움이었다고 하겠다. 읽는 동안 외로움은 이미 떠나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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