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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리커버 특별판)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들은 여러 다른 시대, 다른 질서를 요구하는 현실에 때론 순응하거나 저항하며, 삶을 견뎌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 변화하는 그 질서와 무관하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처럼 외부에서 적응을 강요하는 사회적 힘의 존재와 무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진장한 내적 긴장과 외적 경계를 요구할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가 기술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개인의 심적 변화와 행위에 대한 고독한 투쟁을 보았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로서의 문학이 역사를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보았다고 해야겠다.
거창하게 권력관계의 변화, 전쟁의 발발, 인종말살, 이데올로기 대립과 같은 시대 전환적 사건들이 사회, 국가, 세계에 미친 영향들과 같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질곡(桎梏)을 통과해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의 형상, 두려움, 버려짐, 고통과 인내, 이것들이 응고되어 침전된 생(生)의 시선으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규명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대를 통과해 온 에메렌츠라는 한 나이 든 여인이 바로 이러한 역사의 실존적 가능성의 발견일 것이다.
이야기는 전업 작가인 작중 화자의 집과 그녀의 가족을 20년 넘게 돌봐주었던 에메렌츠의 삶의 기원들과 행적들의 회고이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문(door)'이라는 소설을 시작하는 장(章)에 이미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인 꿈의 이야기지만 이것이 현실의 작가를 하나의 의식으로 끊임없이 몰아대는 이유는 해소되지 못하는, 아니 해소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 죄의식!
어쩌면 이 죄의식이라는 것은 화자인 작가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싶어진다. 사회와 국가가 외면해온, 질서를 강요해 온 권력들의 무도함이 만들어 낸 희생물에 대한 애도(哀悼)요, 참회(懺悔)며, 환기(喚起)일 것이다. 전업작가로 전환하면서 작가는 집안일을 돌보아 줄 사람으로 에메렌츠를 맞는다. 아니다. 에메렌츠가 그들을 돌보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올바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에메렌츠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사람으로 다가오고, 작가가 에메렌츠의 관계망 속에 자리잡기까지 그녀에겐 여성 작가도 부인도 아니었으며, 필수불가결한 접근만 허용된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집안 일 외에 그녀가 사는 공동주택의 관리인이며, 건물 11곳의 제설작업까지 맡고 있다.
그녀의 삶은 가히 초인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자신에게조차 자비없이, 노동으로 꽉 채워진 2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년 넘는 두 사람의 동행에서 작가와 에메렌츠의 심적 대치 국면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 대치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상대에 대한 평가로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만큼 이 둘의 감정적 교류에는 위선이 없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삶에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지만, 이는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으로부터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화자는 에메렌츠에 대한 의혹과 불신, 몰이해를 한 동안 유지하지만, 남편의 폐종양 수술로 감정적 고통을 겪는 작가에게 베풀어지는 에메렌츠의 투박하고 거친 보살핌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에메렌츠에 대한 세간의 소문들과 억측들을 점진적으로 무력화시키며,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정치인들의 허언, 정치적 처형과 전쟁이 앗아간 남자들의 목숨, 남아있는 여인들의 처절한 고통들, 그리고 겹친 불행의 순간들은 어린 소녀 에메렌츠의 삶마저도 어둡게 내리누른다. 불행과 고통의 존재로 내던져진 여자아이는 유대인 부부의 하녀로 팔려가게 되고, 그녀는 세상의 곡해된 증오의 제물이 된 유대인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념의 헤게모니싸움으로 갈라져 참혹하게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에서 그들이 규정한 질서와 무관하게 도피처를 찾는 상처난 이들 모두를 숨겨주고, 사랑을 베풀지만 그녀에겐 배신과 갈취의 흔적만이 남는다. 한 여인에 대한 압축된 나의 묘사는 조각조각 작가에게 에메렌츠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와 작가가 이웃들, 에메렌츠의 유일한 조카, 그녀의 고향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아들은 자취들의 짜맞춤이다. 이 이야기들, 특히 에메렌츠가 작가에게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작가의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보일 때 혹은 선한 의지에 대한 교감이 있을 때만 가르침처럼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이들 이야기의 편린으로부터 한 여인, 한 인간의 현재적 삶이 왜 그러해야 했는가를 우리는 어설프게 구성할 수 있다. 에메렌츠의 집 문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열린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그 문은 항상 굳게 걸어 잠겨있으며, 그 폐쇄적 공간에는 침대도 없으며, 오직 아홉 마리의 고향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누워서 자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는 도움과 노동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철저한 냉담함으로 감싸인 천상의 성녀, 그녀라는 존재의 모든 중요한 부분들을 덮고 있는 에메렌츠의 하얀 머릿수건처럼 걸어 잠겨진 문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적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숨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연민이자 사랑이고, 보이고 싶지 않은 흉터이며, 고귀한 영혼이며 남루한 현실이다. 그녀는 이것들, 세상의 비뚤어진 시선, 몰이해에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눈이 내리면 새벽처럼 동네의 길에서 빗질하는 에메렌츠가 보이는 듯하다. 작가는 20년 넘게 그런 에메렌츠의 돌봄으로 영예로운 국가 최고의 문화훈장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에메렌츠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자신의 집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열지 않는 문, 그 집안으로 단 한번 들인 사람은 오직 작가 한 사람 뿐 이었다. 에메렌츠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녀의 실천적 삶이 보여주는 생의 교훈으로부터 작가는 자신의 바보같은 오만함을 조금씩 벗어나고, 두 사람은 소름끼칠 정도의 냉소적 교류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확신했다. 작가는 에메렌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군가 조건 없이, 아낌없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 말고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고.
작가는 에메렌츠의 닫힌 문을 열어 그녀가 방치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에메렌츠는 마비된 몸으로 찾아 온 작가에게 문틈으로 고양이의 사체를 담을 작은 나무상자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한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도 그녀의 집안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내적 세계로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 들어가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작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에메렌츠의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악취는 임박한 죽음처럼 그녀를 살려내야 한다는 딜레마가 된다. 상자를 가져다주는 기회에 그녀를 구해내 병원으로 호송해야 한다고 에메렌츠의 염원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다. 의사와 이웃들에 에메렌츠를 넘겨주고는 임박한 자신의 강연을 위해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에메렌츠는 이미 뇌졸중으로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으며, 악취가 진동하는 집 안에는 이웃들이 문틈으로 전해준 음식들에 구더기가 들끓고, 몇 안 되는 세간들은 안간힘을 글어 모으던 그녀의 흔적들로 흐트러진,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에메렌츠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이 그토록 타인들부터 지켜내고 싶었던 완벽성, 철저한 완전성이 파괴되도록, 그 은닉된 것들이 드러나도록 작가는 방치한 것이다.
이 소설에는 ‘삶의 이해방식에 대한 지극한 엄밀성과 섬세함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 또는 ‘응축된 감정의 치열함을 통한 사랑의 예찬’, ‘창조적 성취의 이면에 있는 열정적 헌신으로 이루어진 돌봄 노동에 대한 존경의 고백’ 이라는 찬사어린 감상들이 있다. 이들 진심어린 감상처럼 작품의 수면아래 낮게 그러나 도도하게 분명 흐르고 있어, 격렬한 감동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독자에겐 커다란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감상의 글 모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 작품을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를 쓴 것이라고 읽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실존의 역사적 차원을 검토하는 언어로서, 소위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개인의 변화를 목격하게하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나 사회, 정치학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사람들의 잊혀진 삶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고 읽는다. 역사로서의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는 이야기’라고.
즉 작가는 실존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독자로 하여금 누군가를 보게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소설의 축을 이루는 두 인물, 작가와 작가의 가족 살림을 돕는 에메렌츠라는 여성의 20년 넘는 삶의 동행에서 겪는 치열한 심적(心的)대치와 가치의 충돌이라는 격전의 시간에 펼쳐진 마음과 육신의 교감, 그 속에 진술되는 기억과 현재적 일상이라는 증거를 통한 확증에 의해 또 따른 역사의 진술을 하고 있다고.
이 엄청난 작가를 어쨌든 지금이라도 읽게 됨으로써 나는 역사를 말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사실 시대의 시간 속에 살아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실존적 가능성의 면모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인간 시선의 협소화를 강요하는 20세기 문명 속에서 그 축소된 개인주의의 편협성을 돌파하며, 인간의 심적 지평을 확장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할은 작중 화자인 작가가 맡고 있으며, 세계대전을 전후한 그 전환적 사건들을 살아낸 독특한 한 여인(에메렌츠)의 삶의 모습에서 그 실존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말을 하는 것. 그것은 돌봄 노동에 대한 겸허한 존경으로, 좀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처절한 죄의식의 인지로서 말하는 것일 게다. 그 어떤 역사기록보다,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내게 끼친 영향이 큰 책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나만의 소설이다. 들여다보지 말아야 했을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이 세계의 그 악취, 치욕스러움이 죄의식과 함께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스며들게 한 작가에게 존경의 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