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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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몸과 마음이 이 세계에 젖어들 때면 강신주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며 체제내의 질서에 빠져있는 나를 건져 올린다. 그의 글에서 어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기 위해 장자(莊子) 수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나의 상태를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강신주의 글을 통해 매양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다.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재발견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장자당대 제자백가들의 체제 정당화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긍정하는 강력한 인문 지성이라고 규정한다. 오늘 우리네는 삶을 잠식하고 있는 불의한 지배 권력이 야기하는 수많은 갈등의 상황들로 질식할 지경이다. 장자의 인공호흡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책은 내편, 외편, 잡편, 33편으로 전해져오는 장자의 구성을 오늘의 현실과 독자인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총 48편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내편의 시작인 소요유(逍遙遊)가 아니라 잡편 외물황천 이야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쓸모있음을 강요하는 오늘의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는 유용(有用)의 개념에 도사린 그 오만성과 탐욕, 폭력성의 이해가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용(所用) 또는 유용(有用)이라는 쓸모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장자전편(全篇), 즉 내,,잡편을 망라하여 빈번히 반복 등장한다. 인간을 유용성으로 구분하여 무용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는 이 폭력적 언어가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며, 지배질서가 악착스레 유지, 보존하려는 개념이기에 더욱 그 의미는 중차대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외편<천도>의 수레를 만들고 수선하는 윤편(輪扁)이야기내편<양생주>의 푸주한인 포정(庖丁)이야기처럼, 육체노동자인 당대의 소인(小人)이라 폄훼되던 인물들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던 일종의 정신노동자인 대인(大人)의 삶의 실천능력을 능가하는, 나아가 어떤 위대한 성인(聖人)보다 더 심오한 삶의 지혜를 지닌 진정한 대인임을 밝혀내기도 한다. 소인들의 조용한 자기혁명!, 대인/소인, 지배/피지배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혁명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가축화는 소위 문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야만의 시작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같은 동류의 종을 가축화하는, 다시말해 길들여 지배하기 시작한 그 변곡점 이래 인간의 세계는 그야말로 원초적 폭력을 동력원으로 삼는 기이한 사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편」 〈제물론사생 이야기를 비롯한 성심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가축화, 즉 생계와 자유의 박탈이라는 원초적 폭력인 채찍을 휘두름으로써 복종과 반항에 따른 상벌의 질서가 수립되고, 당근을 내밀어 빼앗은 것을 마치 자신들이 내어준다는 듯 내밀어 의존을 습관화, 관행화 시켜왔다. 자유와 풀을 빼앗고는 주인에게 의존하게 하는 이 서글픈 풍경이 인간들의 세계이다. 장자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인간,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들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적 눈을 치밀하게 맞추어 관찰한, 몽상적이거나 혹은 초월적 형이상학과 같은 실제를 이탈한 세계의 공허나, 개체의 질적 차이와 언어의 추상성에 사장(死藏)시켜버리는 모든(all-ism)주의의 지배지향성과 전체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듯싶다. 아무튼 강신주 박사의 장자수업은 장자의 문자적 해독이나 단순한 해석집이 아니다. 바로 지금을 사는 한국 사회의 우리 인간 개체들의 삶의 진짜 방편을 바람의 철학자이자 마주침의 존재론을 말하는 장자를 통해, 스스로를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사람다운 삶인가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질서라는 것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 은폐된 것들의 면목을 이해함으로써 그토록 당연시되었던 굴종과 모욕이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사회,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이지 무수하게 다채로운 지혜의 이야기들로 수() 놓아져 있다. 나는 외편(外篇)<산목>빈 배 이야기에서 그 문학성은 물론 예리한 통찰력을 발견하곤 새삼 매혹되었는데, 예전에 미쳐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는 사람의 배에 빈 배가 와서 부딪히면 그 사람은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누군가 사람이 타고 있어 부딪힌다면 불같은 화를 낸다. 왜 빈 배와 달리 사람이 탄 배에는 동일한 상황인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빈 배는 내 것을 빼앗을 잠재적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고, 사람이 탄 배는 내 것인 것에 도전할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답변이 가능하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人能處己以遊世 其孰能害之!)”

- <산목> 빈 배 이야기 에서

 

그런데 재야의 고수인 철학자 강신주는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는 사람에 주목하라고 한다. 배를 붙여 거친 물살의 황하를 흔들림 없이 평평한 상태 위에서 건널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냐는 것이다. 군주거나 지위가 높은 지배계급의 누구이거나 거부(巨富)일 것이라고 한다. 즉 강물 위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 하는 자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이, 소유욕과 자의식이 함께하는 이 해묵은 편견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위를 흔드는 인간은 그 위엄에 도전했으니 폭력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배를 붙여(方舟) 타는 이의 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이다. 즉 황하는 빨리 건너야 하는, 단지 지상에서의 목적을 위해 지나가야 하는 시간일 뿐이기에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 우리들을 장악하고 있는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때문에 황하를 건너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지상의 목적에 이를 때에야 행복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네 삶이 이런 것이다 보니 항상 행복은 합목적성에 의해 미뤄진다. 이야기는 이것에 지배되지 않는 행동, 즉 무위(無爲)에 대한 이야기다. 빈 배처럼 노닐면 그 누가 해칠소냐! 울림이 큰 말이다.

 

莊子하면 이를 시작하는 내편(內篇)<소요유(逍遙遊)>()과 붕()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변해서 새가 되었다(化而爲鳥)”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이 큰 물고기 곤이니 자신이 사는 너무 좁은 북쪽바다에서의 자신의 불행함이 얼마나 컸겠는가. 곤은 용기를 내어 물 밖의 바람이 거칠게 부는 낯선 세계, 타자의 세계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또한 거대한 새, ()이 된다. 이 거대한 새가 날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야 날아 오를 수 있다. 마침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는 거리가 구만리(搏扶搖而上者九萬里)” 나 되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데 성공, 대붕(大鵬)이 되어 거침없는 자유로움의 비행을 한다.

 

자신의 지금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어떤 존재든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두렵고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낯섦과 과감하게 마주해야만 비로소 타고 오를 바람도 맞을 수 있다. 물론 그 바람이 미약해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전을 피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의 불행만을 쓰다듬으며 자기 연민으로 훌쩍이고 있을 따름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씬 스틸러(scene stealer)’가 등장하는 것이다. 메추라기 새가 자신의 비행(飛行)도 완전한 날기 라고, 또한 자신도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장면이다.

 

협소한 세계에 적응 한 것이고, 그 협소함에 순응하여 살며 으스대는 것인데, 아마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불면 메추라기는 어디 숨어버려야 하거나, 바람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음을 외면한 이 정신승리법이 얼마나 비참한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한다. 협소함을 돌파할 것인지, 아니면 체제 내에 순응 할 것인지는 자신들만의 몫일 것이다. 가슴이 원대해지는, 괜스레 마음이 활짝 열린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해주는 이야기다. 찬바람 불면 나가지 말라가 아니라, 그깟 감기나 몸살쯤이야, 라며 강건해지리라 하면서 바람에 뛰어드는 긍정의 강렬함이 있는 가히 명문장이다.

 


너무 아름답고 지혜로운 글들로 가득 차 있어 모두 옮겨 적어 많은 이들과 같이 그 감응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지만 외편<천도>윤편(輪扁) 이야기 내편<제물론> ‘논변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아마 지엄한 상하 신분질서가 엄중한 시대에 가장 비천한 수레바퀴 노동자인 윤편의 도발이자 도전의 이야기가 너무 유쾌했던 이유이기에 적어두고 싶었다. 주인공은 춘추시대 다섯 제후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패자였던 환공과의 이야기다. 회당 높은 곳에서 환공은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마당 바닥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윤편이 느닷없이 성큼성큼 환공이 있는 당상(堂上)에 다가가서는 환공에게 묻는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읽고 있습니까?” (정말 맹랑하다!)

성인의 말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그는 죽었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 아닙니까?”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무례한 모욕의 언어다. 당연히 환공은 네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면 너는 죽을 것이라고 위엄의 명령을 내린다. 윤편은 살아남았겠는가? 그는 뭐라 답변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른 사람에게 말로 옮길 수 없는 그 체득의 도를 얘기한다. 몸과 마음이 목재에 따라 변주되어 일체가 되는 그 체득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으며, 그것을 글로 타인에게 남긴들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스승이 살아있다면 가서 물어보며 체득의 도움을 구할 수나 있지만 죽었다면 그 글이란 술찌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답변이다.

 

오늘날 서점에는 무수한 자기 계발서들이 불티나게 팔리듯 가장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청년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책을 쓴 작자들의 경험 이야기다. 그 경험이 독자에게 체득되지 않고서는 결코 배움이 되지 못하는 한낱 찌꺼기에 불과한 것일 테다. 사랑하는 법, 수영하는 법, 사회 생활하는 법은 직접 부딪히며 경험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글로 반복하여 읽는다고 될 일인가? 윤편의 눈에 환공의 믿음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게다.

 

내편<제물론> ‘논변 이야기내편<제물론> ‘동시(同是)이야기와 함께 인식론의 문제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후자는 동시((同是)’, 즉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의 이야기이고, 전자는 진리의 논쟁은 허영의 논쟁이 되기 일쑤임을, 즉 확증 불가능한 논쟁을 가지고 우열을 다투는 그 비열함과 몽매함에 대한 환기라 할 수 있다. 책은 어떤 나무토막이 되었든, 종이가 되었든 계속해서 반으로 잘라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를 예시하고 있는데, 논리적 이성으로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두께가 있는 것은 아무리 잘라도 두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단지 가위나 칼의 문제일 뿐, 자를 수 있다거나, 두께가 없어지는 원자에 이르면 자를 수 없다고 주장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이를 실증할 수 있나? 경험으로 확인 또는 검증이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네 세계에는 즐비하다. 이를테면 통계수치가 의미하는 추정의 언어 또한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확증할 수 없다. 더구나 자유의지나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이나 종교의 문제로 나아가면 그 논쟁은 감정싸움, 위신싸움, 지적 헤게모니 싸움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논변들은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해프닝이고 비극이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확증 불가능한 논쟁을 수적 우위나 권력이라는 반지성적 행동으로 옮음이라 주장하는 작금의 양태는 파렴치와 몽매에 터 잡은 악의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야기하는 세력이 누구인가는 곧 그들의 추한 저의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가 될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지경까지 되었다. 어떤 말을 더 할까?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는가! (行賢而法自賢之心 安往而不愛哉!)”

- 외편<산목> ‘미인 이야기에서

 

허영의 문제가 나왔으니 외편<산목> ‘미인(美人) 이야기로 이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다. 현실을 냉혹할 정도로 응시하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기보다 허영의 존재다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남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해서 행동하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듯, 그 숨겨진 허영의 논리를 간파하는 것은 그에게 수월한 관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보다 비교우위에 서려는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비교의식이 왜 생겼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는 불평등구조가 인간을 허영의 존재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8)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평온한 굴종의 메커니즘을 유지 존속하려는 위계의 사회, 그 지배적 권력의 보존 욕구에서 출현한 것임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사회구조에서는 실제로 지위, 재산, 체력, 미모, 장기 등을 갖추든지, 갖춘 척 하든지 해야만 이익 추구에 장애가 없다는 것을 모든 인간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인데, 그러하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허영이라는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 책략은 오랜 인간의 지배적 질서에 순응한 결과라 하겠다.

 

객사의 아름다운 여인과 못생긴 두 부인에 대한 객사 직원들의 전복적인 태도가 나타내는 이야기인데, 객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허영의 감옥임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허영의 감옥을 피해간 인물이 없음이 드러나는 것인데, 비교우위를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곳, 자기 필요를 증명할 억압체제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을 생각게 한다. 왜 자유의 지대로 나가는데 주저하는 것일까? 백인백색의 그 찬란한 개성이란! 장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잘도 그러겠다!”

 

짧은 감상이 되길 바랐지만 긴 글이 되고 말았다. 48 (각권 24 수업)의 수업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을 좇다보면, 분명 우리네 마음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힘과 새로운 삶을 모색케 하는 힘으로 향하는 언어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 당근 경쟁과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는 삶의 그 실체를 보게 되고, 경쟁 실패에 좌절한 인간의 낯선 세계로의 비상의 몸짓도 읽을 수 있으며, 소용보다 무용의 즐거움, 그 참됨에 다가갈 수도 있고, 외부성과 타자성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던 자신의 인지상태를 파악할 수 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의 본질이라 규정한 질서란 것은 진정 무엇인가? 이 책은 장자의 지적 영민함 못지않게 저자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의 지고함이 느껴지는, 더구나 삶의 이 실질적 현상에 생생한 방향등이 되어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지혜로 가득 채워진 내용들 모두를 적어내지 못함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나치게 장황해진 듯하여 그 유명한 바람과 구멍이 어울리는 마주침의 존재론을 말하지 못하고, 이제 장자 수업 2로 시선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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