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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평점 :
우리 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로 들끓는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의 충만한 끓음일 때도 있지만, 무기력과 두려움, 슬픔과 공허의 혼란으로 내몰림이기도 하다. 내적 평화와 복락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겨운지, 삶의 시선을 새롭게 일신하기에 너무도 고달파 좌절과 포기, 분노와 공격성으로 전락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내 존재의 가없는 흔들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네에게 한낱 이야기로서의 들려지던 신화와 전설, 설화로부터 우주자연의 섭리, 우리 안의 선과 악, 힘과 가치에 대한 '자기서사(story-in-depth of self)'를 발견케 하여 내 안에 공존하는 본원(本源)성을 목격토록 견인한다. 즉 신화가 품고 있는 서사 속에서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서 삶을 움직여 가는 존재의 본질을” 통해 삶의 실체를 목도함으로써,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내적 실존(實存)을 깨워”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사유토록 하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 존재의 본원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 신동흔 교수는 ‘창조, 자연, 영웅, 애정, 생사’의 다섯 신화로 구분하여, 존재의 시원, 그리고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인간적 삶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투쟁, 세상과 타자와의 연결과 확장,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우리의 서사로 수용할 수 있는 지를 명상케 하고, 삶의 치유로서의 서사로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의 신화를 오가며 대체 인간의 본원이란 무엇이며, 창조와 자연의 신화로서 그것들은 우리와 우주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교섭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영웅, 애정, 생사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존재로서 서사를 바라봄으로써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계와 어떻게 투쟁하고 초극함으로써 내 존재의 거듭남의 길을, 생명적 섭리를, 존재적 숙명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깨우치게 돕는다.
아마 이 책의 덕목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우리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 볼 수 있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진 이집트와 그리스, 북유럽의 신화가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실체, 그 자화상을 통해 삶의 갈래길에서 어느 길을 걸어야 할 지에 대한 신선한 이정표를 발견 할 수도 있다. 인간 존재를 비롯한 우주 자연의 창조에 대한 신화는 서양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 창세 신화 <초감제>’가 있으며, ‘함경도 구전 신화인 <창세가>’도 있다. 거대한 창조신 미륵이 땅과 하늘이 뭉쳐진 혼돈의 세계를 분리하여 기둥을 받쳐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든 이야기, 그리고 하늘을 향한 축원을 통해 내려진 생명 금벌레, 은벌레라는 원초적 생명체로부터 햇살과 이슬, 비, 바람, 곡식과 열매 등 온갖 자연의 기운을 취해 인간을 만들어 낸 이야기다.
수성(獸性)을 지닌 미력한 물질성(物質性)의 존재인 벌레가 맞물린 인성(人性), 세상 만유와 연결된 존재인 바로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물성을 쫓는 존재인가, 신성(神性)을 쫓는 존재인가를 묻게 된다. 한편 우라노스에서 크로노스로 다시 제우스로 야생 자연의 폭력성, 신들의 투쟁사로부터 세계 질서 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인간 존재의 운명적 서사를 길어 올리고, 우리는 창조적 파괴,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의 그 근엄한 우주적 질서,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내 존재의 살림이란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대홍수 신화는 부조리와 타락으로 퇴행하는 인간에 대한 거듭남의 서사로서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나무도령 이야기’로 씻김, 재탄생의 신화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 욕심만 찾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본래의 자연성을 지키고 있던 유일한 존재인 나무도령만 대홍수에 살아남도록 하였던 신성을 어기고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소년을 구해 주었으나, 바로 그 소년이 나무도령을 배반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재앙으로 씻음과 재창조가 완수되지 못한 세계가 계속 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바로 지금의 세계는 선한 생명의 세계와 욕망과 배반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들의 세계는 이 둘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어떤 세계, 혹여 대홍수의 물결에 접어든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는 깊은 침잠과 재탄생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명이란 이름의 광기, 이 방주, 혹은 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심란한 시대다. 이처럼 우리는 매양 나는 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체 내 앞에 길은 있는 건가? 라는 물음이 그치지 않는다. 황막한 세계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나는 이 부유가 근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뿌리를 묻는 신화를 ‘원형적 신화’라 부른다.
<원천강 본물이>라는 신화가 있다. 산 사람은 갈 수 없는 본원적 세계, 그 근원의 강이 원천강이다. 주인공 ‘오늘이’가 이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원천강을 찾아가는 여정의 이야기다. 여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곡절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오늘이에게 부탁한다. 여의주를 세 개씩이나 입에 물었으나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에서부터 그저 책만 읽는 두 남녀 등등,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의 우매함, 여의주는 입에 한 개면 족하다. 세 개가 필요 없는 것인데, 그 욕망의 무거움을 내재하고 있는 바로 자신인 여의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빛나고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여의주를 입에서 뱉어내야 하는 것,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그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망각하곤 한다. 가벼워지기. 오늘이가 만나는 존재들의 물음이 곧 존재에 대한 답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화가 있다는 것을 말지 못했다. 새로운 앎이다.
영웅?, 세계에 결연히 맞서서 틀을 바꾸고자 한 예외적 인간들, 불굴의 투지와 도전을 통해 “성취한 과업이 세상에 기여함으로써 집단의 존숭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일컬어 영웅”이라 부른다. 나는 이 적극적 힘과 용맹보다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성에 더욱 매료된다. 아마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가 지옥이라는 거칠고 험한 어둠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굴려 올리는 그 반복된 형벌을 수행함으로써 신적 질서에 도전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맞섬이야말로 바로 영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반복된 과업들에 그 얼마나 진저리를 쳤던지 모른다. 이제 그것이 형벌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나아가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음, 그 자체로 강복(降福)임을 이젠 안다. 노예적 삶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태의 그 다양성은 그리 간단히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웅에 대한 신화 하나를 더 소개하련다. 북유럽 신화의 신이자 영웅인 오딘과 토르, 요즘 신세대가 열광하는 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야생적 면모의 주인공들이다.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며 자연에 맞서는 길을 여는 존재. 우리에게 이 토르같은 신이 있다. 제주 작은 마을의 신이자 영웅인 ‘궤네깃또’, 대륙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제주 구좌읍 김녕마을의 신이 된 존재다. 너무 작은 곳의 신이라고? 신화의 사유 체계는 모든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그에게는 바로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었을 뿐이다. 자연에 맞서는 것은 고난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위해 때론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신화를 발견케 하는 이 책의 미덕에 자꾸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마 더 깊은 독서로,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가는 초석이 될 것 같다.
이제 오늘의 우리들 행위를 빈번하게 자극하는 어휘, ‘욕망’에 대한 신화다. 나는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 아리아드네가 열연하는 미궁(Labyrinthos)에서의 투쟁을 나의 서사로 품고 있다. 그래서 안개 낀 좁은 골목길의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인해 야기된 사연 많은 신화다. 파시파에와 소의 교접 결과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즉 인간의 범람한 욕망이 만든 산물, 소유욕과 성욕, 지배욕이 합쳐진 욕망 덩어리다. 테세우스는 이 욕망을 제압하러 나선 존재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승리하지만 그는 조력자인 아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한다.
아리아드네의 실, 이성의 끈이자 사랑과 인간적 연결을 놓는 것, 즉 자기 안의 라비린토스를 소홀함으로써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 신화다. 나는 이 신화에서 영웅과 이성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내 안의 선악의 이중성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모범으로 재생해 보곤 한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내가 망각하고 있는 것,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인지, 신화는 이렇듯 자기 안의 실제를 반추케 함으로써 내적 존재를 확장해 가는 길잡이, 혹은 치유의 서사가 되어준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 저마다의 현실적 상황에 따라 더욱 시선이 가는 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연인과의 애정에 고심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미래의 갈래 길에 서서 삶의 운영을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 필연적으로 도래할 죽음에 대한 상념과의 연결성에 대한 사유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현실적 고뇌를 새로운 거듭남으로 인도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지면을 가득 채운 한국을 비롯한 동서양 신화들을 거닐며 자기만의 서사를 분명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안의 나와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 고유한 서사를 지닌 존재자들이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여 휘청대기도 하고, 소유 욕망에 시달리며 더 큰 결여와 불화가 만든 문제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오만과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나이를 먹었으나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자녀서사에 갇혀 유아적 퇴행의 삶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에로스는 황금 화살과 납 화살 두 개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사랑의 거부, 생명력과 스러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 그는 곧 죽음의 상징 타나토스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에로스가 선을 넘어 폭주하면 부지불식간에 타나토스로 탈바꿈하여 공격적이고 공허로 그득한 존재로 뒤바뀌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이다.
책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론 지엄하고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신화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자기만의 서사를 발견하게 이끈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삼아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찾아보고”자 하는 이들, 즉 ‘내 안의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분명 나를 만나고 그 길을 이끌어 줄 것이다. 모처럼 이 책에 감히 추천한다는 문구를 남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