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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겨울빛
조지프 브로드스키 지음, 이경아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9월
평점 :
나는 러시아 시인이 한 도시에 대해 우아한 찬가를 쓸 수 있도록 신적 속성이 자본의 무참한 탐욕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 양태들을 제약토록 한 도시의 가라앉음이라는 예견된 재앙에 감사한다. 매 순간 해수면 아래로 조금씩 잠기는 그 근심이 어쩌면 내밀한 성소(聖所)보다 더 시간을 초월한 곳처럼 느껴지게 하는 베네치아의 물과 빛, 무수한 석상과 부조들, 안개 낀 좁은 골목길과 수면 위를 유영하는 곤돌라, 비논리적 욕망의 도시를 오늘에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적 정취 그득한 에세이는 베네치아의 시각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눈이 제일 먼저 인식하는 도시의 외면이 발산하는 이야기는 “남들의 시선에 노출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도시”라는 선언처럼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무한한 반영에 담긴 이야기를 스스로 쏟아낸다. 17년간 겨울이면 찾아간 베네치아에 첫 걸음을 내딛던 이방인의 인상부터 시작되는 글은 안내자로 만난 여인의 돌아가는 발길조차 화려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다. “나의 아리아드네는 고가의 향수로 만든 향기로운 실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사라졌다.”고.
아마 그녀의 향기가 베네치아의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그 유명한 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몽상은 그녀의 건축가 남편에 의해 끊어졌으니, 베네치아에서의 그의 걸음은 오히려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물의 도시, 거울이 도처에서 반짝이며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을 반영하는, 눈이 말 그대로 헤엄을 치는 도시이니 가히 시각의 도시라 할 만하다. 이 시각성, 반영은 우리의 콤플렉스와 불안을 부채질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에워싼 아름다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시인은 2주 만 살면 아마 재산이 거덜 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것은 도시를 구성하는 시각적 대상들인 “대리석 레이스들, 상감 장식들, 기둥머리들,...소조물들,...케루빔들, 여인상 기둥들, 벽공들, 고딕과 무어 양식이 뒤섞인 창문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허영을 부추긴다. 특히 겨울의 베네치아를 묘사하는 문장은 무한한 신적 속성을 보는 듯한 몽상에 빠져들게 하고, 시간을 잊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한다.
일요일이면 헤아릴 수 없는 종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흡사 면 커튼 뒤
진주빛 영롱한회색하늘에 뜬 은쟁반 위에서 커다란 도자기 세트가 진동을
하는 것 같다. ...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 커피 향기와 기도 소리인,
진주가 가득 맺힌 실안개가 바깥에서 곧장 밀려들어온다. -40쪽
이렇게 도시에 의해 생겨난 자기 망각의 시간을 지냐다보면 시인은 불현 듯 ‘수잔 손택’과 동행한 베네치아에서의 한 일화로 이끌며,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럿지’와의 한담을 통해 그녀의 연인이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윤리적 변론을 듣게 한다. 파시스트의 선전자였으며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바람둥이를 변호하는 쓰레기 같은 시간에 대해서. 아마 에즈라 파운드의 詩‘, 《캔토스》의 ’베네치아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 모양일 것이다.
이 불현듯한 침입의 글이 인간 양태(樣態)의 별난 현상을 생각나게 하여 짜증스럽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도시 베네치아의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바실리스크, 스핑크스, 케르베루스, 미노타우르스. 켄타우루스, 키메라”등, 우리 종에 남아있는 진화의 유전적 기억을 보여주는 신화의 자취들을 열거하며, 물에서 튀어나온 이 도시, 바로 이곳에 부조와 석상으로 수많이 존재하는 이유, 곧 우리네 자화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도시임을 입증하려 한다.
나는 결연하게 시인의 말에 동의하며,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안개 낀 베네치아의 골목길이 바로 다이달로스의 천재적 두뇌의 소산인 미궁(迷宮)처럼 여겨지고, 인간의 원형적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화, 곧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대로 품고 있는 도시라는 증거를 더하고 싶어진다.
아마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 성당으로 운하를 미끄러져 가는 곤돌라로부터 유독 에로틱한 감상을 나열하는 시인의 문장에서 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한 문장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발라드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도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 음울한 장례식을 생각나게” 해주는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고 쓰고 있다. 아마 고르게 옻칠을 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곤돌라의 에로티시즘은 야릇한 중성적 갈망을 상상하게 하게 하는 까닭일 것이다.
산자카리아의 프론토네 거리, 비발디가 세례 받았음을 적은 간판을 내건 분홍색 벽돌 교회, 라구나의 수면 위를 뽐내며 걸어가는 태양 빛, 벨리니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마돈나 델 오르토’ 대성당..., 수로처럼 거울 같은 표면이 된 보도를 자박거리며 걷는 밤의 산책과 닫힌 가게의 위에서 불을 밝히는 간판들의 자기애적 행위를 상상하다보면 이 도시가 왜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고, 밀애와 이별이라는 양 극단의 장소로 적합한 장소인지를 수긍하게 된다.
태고의 분위기를 간직한 물과 빛의 낙원, 신화를 간직한 이 도시의 매력을 만끽한 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체험할 장소일 것만 같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저항하며 강제노동과 감옥을 드나들던 저항시인,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시인의 시간과 이미지 속을 유영하게 된 것은 순전히 ‘막상스 페르민’과 ‘알프레드 뮈세’가 쓴 작품의 배경 덕분이다. 어쩌면 이들의 작품으로 베네치아에 관한 짧은 문학적 소품 하나가 쓰여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