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 나는 아이가 아니다 가족특강 시리즈 3
신근영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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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늘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지닌 문제를 성찰하는 <가족특강> 시리즈의 세 째 권이다. 영화 기생충을 토대로 핵가족의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내재화한 가족 이기주의의 자기파멸적 구조와 실체를 보여준 고미숙의 기생충과 가족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만들어지는 그 근원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에, 특히 '엄마-아버지-아이'라는 구조로 이뤄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구성된 가족의 작동방식, 배치구조 등 그 성격을 탐사하는 것은 인간 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근간이 된다.

 

미시적으로는 왜 오늘 한국 사람들은 사랑을 할 줄 모르는가, 왜 혼밥을 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곤혹스러워하는가, 더구나 "가족은 건드리지 마라, 다른 거 가지고 딴지 걸고 그러는 건 다 참지만, 가족은 안 된다."며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선언하는가? 좀 거대 담론으로 나아가면 배타적 경쟁주의, 폐쇄적 이기주의에 의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 공감의 고착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이라는 불가능한 추구의 작동원에 가족주의가 놓여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라 할 것이다.

 

1. 오이디푸스 가족 너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1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오늘의 가족이 왜, "욕망의 배치가 구성되고 펼쳐지는 장소"인지, 그리고 이 욕망이 바로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되는 힘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신화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는 상징적 도구라 할 만큼 대중적인 소재이다. 이는 근친상간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즉 자연 상태를 억압해서 극복해야만 비로소 문명인,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결국 억압되고 포기된 근원적 욕망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의 모습이다.

 

이것, 이 달성되지 못한 욕망을 우리는 결핍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 안에 어떤 결핍을 필연적으로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결핍이란 것이 죽을 때까지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은 포기된 욕망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모든 욕망의 출발지는 가족이고, 아이의 출발은 가족이다."라는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적 무의식은 가족적 경험으로 작동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를 넘어 '안티(Anti;)-오이디푸스'의 삶을 상상한다. "욕망이란 가족 경험으로 환원,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비가족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삶의 기본 층위가 무의식이자 욕망이라는 프로이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엄마, 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관점이다. 무의식이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이 됨으로써 욕망이 억압과 결핍의 언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가족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벗어나 그 폐쇄적 이기심의 자기 파멸성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을 '자아의 욕망'이나 '나의 욕망'과 같은 전체로서의 욕망을 거부하고 '부분대상', 즉 입의 욕망, 코의 욕망, 눈의 욕망과 같이 다종다양한 흐름인 '애벌레 자아'인 욕망-기계들의 작동으로 본다.

 




이 욕망-기계들, , , , , 항문, ...은 저마다의 끊임없는 활동, 곧 나름의 '생산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눈은 빛과 짝짓고, 코는 공기와 짝지어 숨을 쉬며, 몸 안에 모든 것들은 다 뭔가와 짝짓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짝짓기를 못하는 순간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 아닌 다른 것과 짝짓기 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욕망-기계라는 것이다. 욕망이란 이처럼 '결핍의 갈망이 아니라 생산의 욕구'라는 것이다.

 

이 짝짓기, 생산의 과정이 곧 생명의 원리, 혹은 존재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분대상들이 다 탈각되고 오직 성기로 집중된 오이디푸스적 발달 단계는 욕망을 거세 콤플렉스로 축소시켜 탐욕, 무한 소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지만, 이 결핍 충족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부분대상인 욕망-기계들의 생산과정으로 파악하게 되면, 바깥,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자아, 가족의 열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 가족, 내 핏줄, 빗장을 걸어 잠근 문 안의 가족은 이러한 생명원리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적 욕망을 가족적 경험으로 축소시켜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으로 추락시킨 오이디푸스 가족,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야 할 당위성, 무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 '소파 위의 편집증자'에서 '분열자의 산책'으로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신경증이나 편집증은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욕망이 비대해져 그 충족되지 않는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분열증은 애초 자아, 에고가 없는 사람들이기에 발산되고 해체되기에 갇혀 거대해진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파 위의 편집증자란 저마다 짝짓기로 분주한 부분대상을 모두 탈각시키고 하나로 집중된 욕망의 탐닉자.

 

반면에 분열자란 부분 대상들, 욕망-기계들이 짝짓고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 마구 섞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 마치 자연을 산책하는, 나도 너도 없는 그저 온 몸으로 햇빛을 받고 바람을 받으며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잊은 채 우주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그런 존재적 층위의 기분이다. 오로지 욕망-기계들의 생산, 짝짓기 과정만 있는, 여기에 그 어떤 결핍이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가족이란 것이다. 다른 욕망-기계들의 작동을 제지하고 오직 결핍만을 장착시키는 욕망은 그래서 끝없는 채움, 획득과 소유의 메커니즘에 속박되게 한다.

 

자본주의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존재적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체제, 결핍을 채우려고 쇼핑하고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고 끊임없이 화폐를 축적하게 만드는 이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에고의 장소, 결핍을 내부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둬놓는 작업을 통해서만 활성화 된다." 사람들 모두 자신들은 탐욕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결핍된 존재라고 항변한다. "난 부족해, 난 없어, 그러니 가져야 해, 더 가져야 해", 더 깊은 결핍감으로 몰아넣는 자본의 기본적 속성은 소유를 갈망하게 한다. 관계의 독점, 배타적 관계는 그래서 오늘 한국 가족주의의 핵심이 된다.

 

관계에 대한 독점적 욕망, 인정 욕망, 이 소유의 욕망, 일종의 '저장 증후군적 욕망'에는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갈등을 야기하는 그 근원에는 이 무한한 욕망, 이기적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폐쇄된 관계, 독점적이고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하는,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관계, 그 유대와 연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아,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고작 작은 아이에서 큰 아이가 될 뿐인 이러한 미숙함과 결핍의 성장에서, 생산하는, 만물과 교접하는 분열자의 산책, 바로 그 길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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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3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리아 2022-05-03 14:1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부터 들뢰즈와 가타리는 표현적 무의식에 종속된 오늘의 사람들을 힐난하듯 ‘욕망적 생산‘으로 시작하죠. 아마 구별하려는 권력에 기초한 결핍의 욕망 너머의 진실을 봐! 라는 듯 회심에 찬 전복을 시작하는 것이죠. 아마 <안티 오이디푸스>는 항상 곁에 두고 우리들의 사고가 사회적 소음에 질식하려 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책일 거예요. 유쾌한 시간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