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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ㅣ 트랜스필 총서 4
권용선 외 지음, 최진석 엮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7월
평점 :
"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感應;affect)이다."
- 16쪽에서
사실 '감응(affect)'이란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재적 힘"으로 규정한 바있다. 다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도구'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의 잠재력을 문학을 비롯한 예술, 사회정치 및 세계를 고찰, 규명하는 시도들이라 할 것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쓴 여섯 꼭지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유물론적 시학'을 말하는 이진경의 문장을 빌어 말한다면, '내 신체 속으로 밀고 들어와 스며들고 휘감겨', 어떤 변화를 표현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마다 수용능력이라는 감각이 다르니 말이다.
Ⅰ. 첫 번째 평설인 이진경의 「감응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처럼 감응에 대한 입문으로 제격이다. 그의 말처럼 전공자의 호구가 된, "전공자의 가정된 지식 없이는 무의미한 단어"들을 남발하는 그런 조악하고 오만하며 무지를 포장하는 언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이란 철학자의 이론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 개념만으로도 사람들의 사유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효과를 가진 독자적인 말"이라는 그의 정의가 그것이다. 어떤 외부- 책의 문장이 되었든, 사람 그자체가 되었든 - 와의 만남으로부터 촉발 받을 능력이 있는 신체라면 누구라도 이 감응의 시학과 함께 섞이며 감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경은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쓴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감응의 모호한 일원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가는 소설"이라고 35년째 폐지 압축 일을 하는 주인공 '한탸'를 통해 감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압축되어 버려지는 책들을 보면서 점점 스스로가 버려지는 책이 되는 감응을 갖게 되는데, 아마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예술 작품이란 감응의 응결"이란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구나라는 반가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
각각의 존재자의 신체에 변화를 야기한다." - 15쪽에서
감응이란 이처럼 "어떤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변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효과를 신체 안에 수용하여 얻는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의 시를 비롯한 감응의 다양한 양태들이 소개되는데, 이해되지 않아도 의미화 되지 않아도 전해지고 파고드는 감응의 독특한 능력, 특이함의 문턱을 넘어 흘러가지 않고 기억되어 신체 속에 응결되어 다시금 다른 것을 촉발하는 '사건의 말없는 신체'인 사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합리주의 이성을 말하면서 이러한 감응의 능력을 잃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다 내재된 것임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이같은 탁월한 감응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신체 안에 응결되어 있던 강밀했던 감응의 기억은 어쩌다 무심코 무엇인가에 의해 밀려 들어와 삶의 장소에 쏟아 내게 될 때가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이진경의 평설은 문학작품을 쓰는 이, 그리고 읽는 이들 모두에게 진짜배기 사유의 도구로서 감응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감응, 그렇게 밀려든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시간과 환경이 달라져도 잊지 않기 위해 신체를 갖는 어떤 것으로 응결"시킨 것이 곧 예술작품임을.
Ⅱ. 아마 내가 감응을 지녔던 두 번째 평설은 최유미가 쓴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이 될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은 세대를 거듭한 차이의 누적이 계통수의 분기로 나타난 결과라는 전통적 진화론을 거부하고, "생물 다양성의 원동력은 분기가 아니라 융합"이라 주장한 1967년 美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gulis)'의 이질적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 즉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 말하는 새로운 배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진화론과 신다윈주의자들의 게놈 중심적 생물학은 '타자와 관계를 경쟁과 적대'로 보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연결하는데 소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임을 인정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는 화합과 공생의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시지구에서의 고세균과 박테리아가
서로가 서로를 먹던 시대의 영상을 돌려본다. 이 적대의 일상이
어느 순간 멈추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고세균이 박테리아를 먹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느닷없는 실패가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연다.
이들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각자를 자신의 부분과 융합한 것이다."
- 78~79쪽에서, 부분 변형 발췌인용
우리(인간)는 개체였던 적이 없다. 이 "소화불량 메타포는 약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의 허위를 들추어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에게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 서로 밀려들어가고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종혼효적 결합의 아름답고 멋진 사례인 꿀물을 제공하지 않는 오프리속 난초와 꿀벌의 공생 이야기는 수분과 꿀물의 교환이라는 타산적 경제원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과학을 "자연이란 무자비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규정"하여 인간사에 투사하려는 물신화된 왜곡의 도구화 환상을 깨부순다.
난초와 꿀벌이 서로의 즐거움과 놀이를 위해 서로 감각을 촉발하고 반응하는 모습은 매혹 이상의 '감흥의 생태학'이 발설하는 얽힘, 그 현명한 신체들의 마주침의 의미를 읽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신체에 맞춰나가는 성취의 기쁨, 아마 고매한 지능을 가졌다는, 신이 되려하는 인간이 망각한 이것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바로 지금에라도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각성을 촉발한다.
Ⅲ. 내게 감응을 일으킨 세 번째 평설은 문학평론가 송승환이 쓴 「증언의 문학성과 시적 감응의 정치성」 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독일강제수용소 체험의 기록을 쓴 '로베르 앙텔므'와 '프리모 레비', 고문의 기록을 쓴 '장 아메리' 글을 통해 공백의 언어, 비인간의 증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증언 불가능성의 고백이야말로 감응의 말임을 듣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세살 가량 되어 보이는 죽어가는 아이의 환원 불가능한 언어, "'후르비네크(Hurbinek)'의 언어"가 비언어롤 읽힐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지금-여기 부재하는 증인임을 의미화 하는 문장들은 그 상상 불가능성의 사건을 내 신체의 어느 공간 속으로 풀어 놓는다. 이것은 시인 랭보의 1인칭 주체의 시선을 상실하고 타자로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신체에 새기게 되는 시(詩)를 통해 증인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일 수밖에 없음을 몽롱하게 바라보게 한다.
Ⅳ. '발터 벤야민'의 1926년 12월 모스크바 박물관에서의 세잔의 그림과 우연의 마주침은 "예술작품을 관조와 반성의 대상적 위치로부터 탈출시켜 작품 고유의 무게를 방사하는 '신체'로서의 지위"가 되었다는 「신체 또는 감응의 전도체」를 말하는 권용선의 평설은 '감응'이 예술작품을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의 전도체임을 가리킨다. 이밖에 스피노자의 'affect'에 대한 해설이라 할 현영종의 글과 문학평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최진석의 글이 감응의 역동적 적용을 시도하여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 글에는 여전히 일본식 번역어인 '정동(情動;affect)'의 사용이나, 또는 감응과 감정의 명료한 개념적 분리 없이 혼용되어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감정은 감응의 산물이다. 감응이 "상이한 정서적 반응이 섞이는 이행상태"라면, 감정은 "이렇게 섞인 정서적 반응이 귀착되는 정서적 상태"이다. 이진경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사유에 파고들 수 있는 언어로서 개념어들의 정리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세계의 이해와 통찰 도구로서 감응이 많은 사람들의 신체로 확산되기를 염원하는 그런 멋진 걸음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삶이란 부단한 배움의 연속인 것만 같다.
"동종과 동류가 아닌 것들 사이의 상호적인 포획은 어떻게 하면 상대를 더 잘 촉발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잘 촉발될지를 부단히 배워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신체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어나간 부단한 배움의 기록이다." - 105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