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란 / 철학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월드북 67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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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질서가 횡행하는 것을 이것도 자유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고 

체념할 것이다."

- 존 윌리엄 워드(John William Ward; 1781~1833)

 

1930년 발표된, 당시 부상하던 파시즘에 대한 경고와 대중민주주의의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저술을 2020년 다시 깨워야 하는 것은 "범용한 정신이 ...모든 곳을 밀어 붙이려고 하는(19)" , 고정된 자기 인식에만 맞춰 사는 편협의 공존으로 퇴화하는 사회대중의 현상 때문이다. "말을 토해내고 싶다는 욕망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63)", 정작 필요의 의론은 중지시키고 적의와 선동적 야만이 여론을 장악하는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고 있음에서이다.

 

오르테가는 '대중'이란, "스스로를 ...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생각하고 타인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16)" 이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형을 스스로 반복하는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배제(19)"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관념의 창고 안에 들어있는 인식에 만족하며 이는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자신 밖에 있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이 "관념의 창고에 안주하고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59)"을 반복한다. 바로 편협성, 무지의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에 터 잡은 위력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이같이 지성이 폐쇄된 인간들의 군집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알량한 지식, 이미 정해져 있는 관념의 변죽을 울리며 자신의 머리에 쌓인 공허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외곬의 대담함으로 황색언론의 기수로 변신한 스스로에 감동한다. 정의와 공정성을 외치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부정의에 따른 자기 편익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모순된 형태는 자만한 도련님이라는 형태이다." 

- 본문 86

 

이 밀봉된 마음의 존재는 자기만의 규칙에 따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자만한 도련님의 규칙이 아닌 이유이다. 그저 자신의 견해만이 정의라는 태도를 취하는 인간 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 입장에 어떠한 존중 의지도 없는, 상호 따라야 하는 일련의 규제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결국 의지할 사회적 규준의 권위가 사라지고 협의(協議)의 의론이 불가능(62)"하게 된다. 기댈 수 있는 규칙이 없으니 문화가 존재할 도리가 없어진다. 결국 이 결여는 문화를 사멸시키고 야만성이 득세케 한다.

 

오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와 원한의 거친 언어가 정치 무대를 지배하고, 여기에 환호작약하는 대중의 원시성이 활개를 친다, 조중동을 비롯한 황색언론과 미디어들, 기득권을 결단코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구정당과 검찰 등 권력기관, 여기에 주구노릇을 하며 자기 이익의 기회를 엿보는 기회주의적 담론가들이 마치 정의의 수호자 행세를 하며, 대중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 불어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야만 상태이며 대중민주주의, 포퓰리스트들이 마음껏 날뛰는 세계를 조성해준다. 틈만 나면 규제의 폐기를 제안하는 '야만인의 대헌장'이 수시로 읊조려진다. 내가, 우리가, 이들 대중이 아니기 위해, 전체주의 세계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 무지의 편협을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안에서 풍부한 수단만 보고 고뇌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대중! " 

- 본문 85

 

이제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것은 대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세력을 부여받은 원시성 충만한 범용(凡庸)(81)" 인간이 외관상의 승리를 향유한다. 어리석음, 프로파간다, 적의(敵意) 충만한 언어로 인간본능의 가장 저열한 부문을 자극해 점점 지배력을 확장한다. 그래서 오르테가의 책 제목은 '대중의 혁명'이 아니라 '대중의 반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 정신적 야만성을 밀어붙이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기 영역의 아주 작은 한쪽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대중의 평범성에 기생해 이 사회 모든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누구인가?

 

더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복잡 미묘해져만 가는 문명 자체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단을 획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능과의 부조화(77)"를 깨닫지 못한다. 기술 문명에 킬킬대며 저항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 채 엉뚱한 반문을 하기까지 한다. 앎의 깊이가 어디까지이냐고? 타자의 고뇌를 헤아릴 만큼, 자기 앎이 천박한 것을 인식할 만큼, 이것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자기 관념의 창고가 결여, 공백 투성이임을, 그래서 끊임없이 타자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게 될 만큼 겸허한 앎이면 대중에 파묻히고 휘둘리는 정신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르테가가 정리한 '대중의 심리구조'라 기술한 항목들을 열거하며 맺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자신의 의견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매사에 개입하며 자신의 평범한 의견을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혹여 자기 삶에서 비극적인 제약이란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야만적 정신의 응석받이를 탈피해야 우리가 가까이 가려하는 민주주의, 자기 삶의 주역임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그 사생아인 전체주의는 너무 빼 닮았기에 이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개인의 몫이다. 대중은 항상 어리석기 때문이다.(1) 대중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적 고찰의 서술은 어쩌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귀할 테마일 것 같다.

 

 

(1)2016년 촛불을 든 시민들은 '공중'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대중은 그저 수신자로서의 집합적 군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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